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6화 (96/510)
  • 00096 왕과 장군  =========================================================================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었다. 시계가 확보된 상황에서도 명중하기 어려운 게 투석기였다. 기껏 바위를 쏘아봤자 안개와 어둠에 삼켜져 제대로 날아가는지 확인할 수도 없을 텐데. 적군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야밤에 말입니까? 시야도 확보되지 않았는데요. 설마 저 공격에 피해를 입은 아군 부대가 있습니까?”

    혹시 제국군에는 야밤의 안개를 꿰뚫고 명중을 확인할 방법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백팔십 도 달라진다. 우리는 적의 공성무기를 공격할 방법이 없으나 적은 신나게 우리를 두들길 수 있으니까. 모처럼 기사단 돌격을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했는데 어쩌면 써보지도 못하고 투석을 피해 도망가야할지 모른다…….

    제파르 대장이 내 우려를 없애주었다.

    ─ 현재 우리 우익 쪽의 피해는 전무하다. 전원, 여유를 잃지 말고 대기하게.

    제파르 대장은 그 이후로도 여유를 잃지 마라, 진지에서 벗어나지 마라, 하고 누누이 강조했다. 아마도 대장은 적군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목적으로 투석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뭐, 나 역시 대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딱히 적의 의도랄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라우라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가 금발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면서 말했다.

    “뚜렷한 의도가 없이 투석기를 운용할 리 없다.”

    “하지만 명중하지도 못하는 투석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굳이 명중하지 않아도 좋다, 제국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멀리서 쏟아지는 투석은 단지 타격용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라우라의 진지한 분위기에 감염되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타격용이 아니라면.”

    “소녀가 생각하기에 우리군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 적의 목적이다. 비록 명중 확률이 한없이 낮다 해도 계속해서 바위가 쏟아지고 있다. 아군은 자연스레 움츠러든다. 섣불리 군을 이동시키지도 못하지. 제국군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우리군을 현재 자리에서 묶어두려 하고 있다.”

    내가 이마를 짚었다. 라우라의 추측이 그럴듯했다. 그리고 라우라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곧바로 적군의 의도가 짐작되었다. 대규모 군단급의 전쟁을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라우라는 모르는 것이겠지. 머리가 아파왔다.

    “제국군은 지금부터 총공세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음? 어떻게 그걸 아는가?”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전 전선에 걸쳐 제한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쪽의 부대들을 잡아둔다. 이때 전선의 한 지점을 골라서 그곳에 전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 그렇게 전선의 일부가 붕괴되면 예비대가 없는 이상 끝장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제국군이 선택한 '전선의 한 지점'은 바로 우리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우익에만 바위들이 직접 날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그곳으로 이미 제국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제국군의 투석 솜씨가 제아무리 신의 경지에 이른다 하더라도 아군이 움직이는 곳에다 바위를 날려대진 않으리라. 아무래도 제국군은 어제 낮에 이쪽을 관측한 다음, 우리 우익이 가장 허술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상위부대에 보고했다. 제파르 대장은 나의 추측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어떤 감상에 잠겼는지 말끝을 길게 늘였다.

    ─ 우익이 가장 가열찬 전장이 되겠군. 군단장 각하께서 바라신 대로…….

    새벽 다섯 시 무렵. 우익에 배치된 전 부대에 비상사태가 떨어졌다. 주변이 깜깜하고 안개 때문에 밤눈이 밝은 몬스터조차 백 미터 너머를 분간할 수 없었다. 제국군은 바로 지금이 공격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골렘 서른 마리, 요정 열 마리. 죽음의 기사 열두 마리.

    총 쉰두 마리의 몬스터가 내 부대였다. 골렘과 요정은 최하급 몬스터가 찍을 수 있는 레벨 한계인 레벨 10까지 전원 도달했다. 어지간한 중하급 몬스터보다 강력했다. 여기에 레벨 50짜리 죽음의 기사들. 인간군의 분류에 따르자면 보병, 궁병, 최정예 기마병이 완비되어 있었다. 숫자는 적어도 자신이 있다! 어차피 칠흑처럼 어둡고 고약한 전쟁터이다. 수가 많다고 꼭 유리하리란 보장은 없다.

    다만 적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해올지가 관건이었다. 원칙적인 전술에 따라 보병을 앞세울 것인가, 아니면 기습을 노려 처음부터 기사단으로 돌격해올 것인가. 보병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만약 기사단이라면……진지 앞에다 구멍을 파두었고 말뚝을 수백 개 박았지만, 솔직히 기사단이 저지될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우는 척하면서 안개를 방패 삼아 도망쳐야겠지. 주변의 다른 부대와 연합해서 격파해야 한다.

    ─ 사역마가 적을 발견했다.

    상위부대에서 정찰을 보고했다. 라우라와 내가 예측한 대로 전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국군은 우익을 향해 다발적으로 진군했고, 우익 전체에 공세를 걸 작정이었다. 우리군 우익을 붕괴시키고, 좌익과 중앙은 차례대로 헤치우겠다. 그런 속셈이겠지.

    보고에 따르자면 제국군은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다. 단순히 기습으로 끝날 공격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처절한 전투가 되리라. 아우스터리츠의 언덕들은 때 아닌 핏물로 겨울과 봄 내내 메마른 수풀을 적실 것이다.

    나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전히 몇 분 간격으로 바위덩이가 대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은 안개의 늪 너머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십수 개였다. 그것들은 휙, 하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면서 이쪽으로 떨어졌다. 그중 하나가 마침 내 앞에 박혔다. 화살이었다.

    “…….”

    “…….”

    무심코 라우라와 내가 서로를 쳐다봤다. 우리 둘 다 얼굴에서 어이가 실종해 있었다. 화살이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저 멀리, 백 미터보다 더 되는 거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화살과 말발굽 소리.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였다. 라우라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뇌까렸다.

    “……저건 기병 아닌가?”

    적군은 궁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  *  *

    제국군, 아니 이 경우에는 총사령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일까. 변경백의 전술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참신했다. 오죽하면 라우라가 일순이나마 평정을 잃었겠는가.

    “야밤에 궁기병을 운용하다니!”

    투석기로 우리군의 중앙과 우익을 붙들어맨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러나 궁기병을 동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 때문에 그러했다. 궁기병이 적군을 향해 일거에 화살을 날려버린 다음 반전하여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궁기병 간의 빈틈없는 공조가 필요했다.

    화살을 쏘고 방향을 돌릴 때 잘못하면 아군끼리 부닥치기 십상이었다. 기병들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함은 물론이었고, 궁기병 특성상 명중률을 높이기 위하여 한 순간에 맞추어서 화살을 쏘아올려야 했다. 말 위에서 화살을 쏘아본들 명중률이 높을 리 없으니 적군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기 위하여 한꺼번에 화살 숫자로 밀어붙여야만 했다.

    한 마디로 마상궁술이란 익히기 어려울 뿐더러 그걸 부대 단위로 실행하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전장은 엄청나게 어두웠다. 약간만 삐긋해도 아군끼리 충돌사고를 거하게 일으킬 정도로. 이런 상황에서 최고정예인 궁기병을 운용한다고? 미친 짓거리였다.

    문제는 그 미친 짓거리가 우리군에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저 미친 놈들은 화살값이 아깝지도 않나…….”

    “사비로 충당한 화살이 아니라 기사단 차원에서 배분된 화살일 거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궁기병을 전문적으로 양성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다. 폰 로젠베르크 기사단의 시종 기병들이 아닐까 한다.”

    라우라와 내가 엄호물에 몸을 숨긴 채 대화했다. 기마 돌격에 대비하여 우리 부대는 진지를 최대한 튼튼히 지어놓았다. 당연히 화살비를 피할 엄호물도 잔뜩 배치했다. 영지에서 징발한 짐마차라든지, 브란텐부르크에서 여기까지 진군할 때 지나쳐온 마을들에서 떼어온 집문들이라든지.

    항상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곳 세계에서 주민들은 대체로 집의 대문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사시 훌륭한 차폐막이 되어주었다. 주민 여러분의 안전정신 덕택에 우리 부대는 궁기병이 쉴 새 없이 사격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골렘 두 마리에 화살이 박힌 것이 유일한 피해라면 피해였다. 물리내성 -50%가 적용되는 골렘에게 화살은 그야말로 모기침이나 다를 바 없었고.

    참고로 죽음의 기사는 물리내성이 자그마치 -70%. 요정이야 크기가 콩알만해서 화살에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었다. 우리 부대는 뜻하지 않았지만 사격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방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꼼짝할 수가 없다.”

    라우라가 탄식했다. 바로 이게 문제였다.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 부대야 물리내성이 강해서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다지만, 다른 부대들은 사정이 달랐다. 대다수의 부대에 주전력은 오크와 고블린이 담당했다. 오크와 고블린에겐 물리내성 따위가 없었다. 지금처럼 화살비가 쏟아질 때엔 얌전히 엄호물 뒤에 숨어 있어야 했다.

    궁기병의 사격은 우리부대뿐만 아니라 우익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우익의 행동반경이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제국군의 의도는 명확했다. 자기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우리의 발목은 꽁꽁 잡아두겠다는 것이었다. 사역마들이 정찰해오는 바에 따르면, 제국군은 보병 병력을 우익의 일부분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궁기병의 사격에 아군이 꼼짝없이 붙잡혀 방어하는 가운데, 저들은 우익의 일부분을 섬멸할 생각이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과연 폰 로젠베르크입니다. 단순하지만 지극히 효과적인 전술이군요.”

    첫 번째는 투석기 공격, 두 번째는 궁기병 공격.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고 있었다. 투석기로 끊임없이 공격함으로써 마왕군의 중앙군과 좌익군을 봉쇄한다. 그리고 궁기병으로 우익 전체를 봉쇄한다. 마지막으로 우익의 일부분에다 병력을 집중시킨다.……‘아군의 기동력은 살리고, 적군의 기동력은 죽일 것’이라는 병법의 기본을 문자 그대로 재현했다.

    곤란한 것은, 우리가 제국군의 전술을 파악했다 한들 딱히 할 게 없다는 점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일단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제기랄. 적군은 안개 속에서 십분 주의하며 천천히 보병을 전진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나무문 뒤에 숨어서 한숨이나 쉬고 있다.

    “군단장에게 병력 충원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가?”

    “아마도 불허될 겁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바르바토스는 우리 우익이 적군을 최대한 끌어모으기를 원합니다. 우익을 지키기 위해서 중앙군이나 좌익의 병력을 빼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립니다.”

    시간이 촉박해졌다. 이러다 우익의 어느 한 부분이 속절없이 돌파당하게 생겼다. 외부로부터 원군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우익의 부대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나의 부대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꽤나 빌어먹은 선택지 말이다.

    “우리 부대가 자력으로 궁기병을 궤멸하지요.”

    “……괜찮은가? 주군의 병력이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본의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병력 아낀답시고 가만히 있다가는 적 보병에게 돌파를 허용해서 나중에 쌈싸먹기 당할 겁니다.”

    정말이지, 귀찮기 그지없는 적군이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확실히 검은 산성의 쿠르츠 슐라이마허보다 급수가 높았다. 쿠르츠도 그랬지만 폰 로젠베르크, 이 사람은 내 미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멸살해야 했다. 내가 갑옷을 여미며 말했다.

    “준비하십시오, 라우라. 아무래도 오늘밤 아우스터리츠 무도회의 호프는 우리 부대로 선정된 것 같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시선이 콩밭에 가 있었다. 뭘 생각하는 것일까?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에 나서게 된 것에 대해 회한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인류의 적인 월맹군 소속이 되어 제국군과 맞서싸우게 된 것에 대해 아이러니를 느끼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아우스터리츠 전황 설명:

    제국군의 좌익이 마왕군의 우익을 공격하기 시작. 한편, 고지대의 이점을 활용하여 제국군은 마왕군 중앙군 및 좌익에 집중적으로 투석. 마왕군 우익에는 기사단의 시종 기병들을 분산 운용, 궁기병 전술을 감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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