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5화 (95/510)
  • 00095 왕과 장군  =========================================================================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군의 작전안은 초장부터 삐꺽였다. 원인은 맥빠질 정도로 단순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의 예측은 전부 맞아들었으나 너무 과하게 적중해버렸다. 안개, 아우스터리츠 일대 전체에 안개가 지나치리 만치 짙게 낀 것이었다. 안개는 늦저녁부터 끼기 시작하여서 자그마치 다음날 정오까지 도통 개지 않았다.

    “……으음. 적군이 코앞에 닥쳐도 못 알아볼 판이다.”

    라우라가 걱정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전장은 순식간에 시야가 제한되었다. 안개는 꼭두새벽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겨우 백 미터 앞을 넘겨볼 수가 없었다. 심한 곳에선 시계가 오십 미터조차 되지 않았다. 아마 잠시 자리를 뜬다고 말해두고 저편에 가서 라우라와 떡을 한판 친다 해도 아군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아니, 그렇다고 굳이 떡을 치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때와 장소를 구분할 머리는 라우라한테나 나한테나 완비되어 있었다.

    백 미터의 시야. 이건 심각했다. 기사단에게 백 미터는 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군마를 타고 순식간에 백 미터를 질주한다.

    자칫 잘못하다가 우리는 기사단의 돌격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게 생겼으니, 원. 철저하게 방비해도 막아낼까 못 막을까 싶은 것이 기사단 돌격이었다. 그걸 준비하지도 못하고 얻어맞는다라……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당연하게도 마왕들은 불안에 잠겼다.

    제파르 대장이 직접 사태를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거의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가관이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네? 마법이 실패했다는 말씀입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 성공해버렸다.”

    사태의 경위는 이러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은 혹시나 아우스터리츠 일대에 안개가 충분히 끼지 않을까 걱정하여,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엿새 전부터 방책을 마련했다. 바로 군중 마법사 부대에 기상마법을 펼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마왕들은 저마다 서너 명씩 소수의 마법사를 휘하에 두었다. 제6군단에서 모든 마법사를 긁어모으자 약 오십 명의 마법사 부대가 만들어졌다. 3서클 이상의 고위마법사가 무려 오십 명. 그들은 아우스터리츠 일대의 호수에 미리 도착하여 엿새 내내 인위적으로 기상을 조작했다. 그리고……마법사들은 너무나 유능한 나머지 이 근방 일대를 죄다 안개의 늪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군단장 각하께서도 당황하셨다더군.”

    “그야, 그렇겠지요.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

    “개중 몇몇 마법사는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폭주해버렸다.”

    제파르 대장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모처럼 기상마법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자 흥분한 게지.”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법사란 인종은 정말이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떻게 정신교육을 시켜도 마법사에겐 집단보다 개인이 우선했다. 그들이 전쟁에 열심인 이유는 아군을 승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법을 마음껏 시험해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괴짜를 오십 명이나 모아뒀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만했다.

    제파르 대장의 말에 따르자면 마법사 부대는 자기네가 뭔 짓을 한지도 모르고, 바르바토스한테 달려가 '저희 잘했지요? 잘했지요? 칭찬해주세요' 하는 태도로 잔뜩 뻐겼다고 한다. 바르바토스가 폭발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전투를 앞두고 마법사 같은 고급전투인력을 팽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씩씩거리기만 했다던가 뭐라던가. 불쌍하게도.

    내가 작은 기대를 담아 말했다.

    “작전이 바뀌지 않을까요, 형님?”

    “본인도 그것을 기대하네마는……군단장 각하께서 워낙 주관이 뚜렷하신 분인지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상부에 연락해보지.”

    “시야가 제한된 전장은 수비측보다 공격측에 유리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상대측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먼저 움직이는 자가 주도권을 쥐지요. 제국군에 공격권을 넘겨주면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에 이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제파르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 중에 상식이었다. 공성전이 아닌 이상에야 공격측은 수비측보다 유리했다. 공격측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지점을 타격할 수 있는 반면, 수비측은 저쪽에서 공격하고 나서야 움직이게 되니까. 이천 년 동안 전쟁터를 뒹굴어온 바르바토스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각하되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

    “군단장 각하께서 작전의 속행을 명하셨다. 우리 우익은 이대로 방어 태세로 들어간다.”

    “하지만 제파르 경.”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마왕 중 한 명이 말했다.

    “이래서야 아군끼리 협조나 제대로 할 수 있을련지 걱정이외다.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오손도손 지휘부에만 모여 있을 수도 없지 않소. 각자가 구역을 맡아 유기적으로 적군을 요격해야 할 터. 허나 안개가 이래 짓궂어서는 아군과 아군의 공조가 이루어지기 어렵소.”

    내심 올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적군의 장수였다면 양동작전을 구사할 것이다. 주력부대로 이쪽의 우익을 공격한다. 우익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 기사단을 송곳으로 삼아서 우익의 전열 일부를 단숨에 꿰뚫는다. 안개가 이 정도로 짙으니까 기사단을 몰래 이동시키는 것은 쉬우리라. 그렇게 기사단은 일순간에 전열을 돌파하고 곧바로 반전, 주력부대와 협력하여 이쪽의 우익을 앞뒤로 압살시켜버린다.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전술이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군끼리 협조와 소통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가 어느 정도로 공격받고 있는지, 아군의 어느 부대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혹시 한순간에 전열이 뚫려버렸다면 거기가 어디인지, 항상 정확하게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제군의 염려는 타당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군단장 각하께서 아군의 공조를 위해 급히 마법사를 파견하셨으니.”

    “마법사 부대를 말이오?”

    “아니. 한 명이다.”

    아리까리했다. 부대단위도 아니고 한 명의 마법사가 어떻게 교신 문제를 해결할까? 혹시 바람마법이라도 일으켜서 안개를 지우려는 것인가.

    “마법사는 우리 우익뿐만 아니라 아군 전체의 유기적인 소통을 담당한다. 마법사가 기르는 사역마를 모든 마왕에게 한 마리 분배하지. 제군들은 부대에 알릴 것이 생기면 곧바로 사역마를 이용하여 보고하도록.”

    “죄송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서열 제58위 아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검은 산맥 공략전에서 군공을 세운 이후 발언권이 생겼지만 아직 신참이라 자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신참이 아니어도 서열 제16위의 제파르한테 막 나가기는 어려울 거다. 평원파의 중위권 마왕들도 반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걸로 보고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요?”

    “제군이 사역마에게 보고를 한다. 그러면 사역마와 심상이 이어진 마법사에게 즉각 보고가 전달되지. 이제 마법사는 중개자가 되어 보고를 다른 부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본인의 군진에 위치하며, 명령도 마법사의 사역마를 통하여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아, 그런 수가.”

    아미가 감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사역마는 무전기가 되고, 마법사가 중계국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한 단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래 세계의 무전기보다 불편했지만 이게 어디인가. 오히려 상위부대에서 항상 전선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장점으로 작용할지 모른다.

    새삼 마법사의 전략적인 가치에 놀라고 있자니 제파르 대장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전장 상공에 마조(魔鳥) 삼백 마리를 풀어둔다. 제군은 마조를 통하여 전장을 보다 자유롭게 관측할 수 있다. 제군뿐만이 아니라 마법사도 사역마를 동원하여 정찰에 나선다.”

    나는 바로 제파르 대장의 말을 알아들었다. 즉 마왕이 몬스터의 감정을 읽어내는 것을 이용한다. 만약 제국군이 우회기동이나 일점돌파를 시도해올 경우, 상공에 위치한 몬스터 새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경고한다. 경고는 곧바로 마왕한테 전해진다. 일종의 경보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안개가 짙으므로 새들도 전쟁터를 넓게 파악하진 못하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당연히 훨씬 더, 수백 배는 더 좋았다. 안개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적군한테 당할 가능성은 이로써 대폭 줄어들었다.

    어쩌면 도리어 우리군에 꽤나 유리한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겠다. 인간군도 안개에 대해 이 정도의 대비책을 갖추었을까? 만일 그러하지 못했다면 아우스터리츠는 제국군에게 거대한 회색의 무덤이 되어줄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라우라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군, 이건 획기적인 방법이다!”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얼마 뒤에 나를 비롯하여 우익의 모든 마왕한테 사역마가 한 마리 배분되었다. 사역마는 놀랍게도 슬라임이었다. 푸른 점액질로 이뤄진 이 자그마한 몬스터는 내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었다. 평범한 슬라임과 다른 점이라면 입구멍처럼 생긴 기관이 있다는 것일까. 나는 시험 삼아서 이 슬라임 통신을 한번 이용해봤다.

    “여기는 단탈리안 부대. 전선에 이상 없습니다.”

    몇 초 뒤에 슬라임의 작은 입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여기는 우익 본진. 알았다. 자네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장이 현재 전선에 이상이 없음을 열심히 알려주고 있다. 앞으로는 중요한 일만 보고하도록.

    나는 피식 웃었다. 슬라임 통신의 성능을 시험해보는 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다른 마왕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슬라임 통신을 사용하고 있겠지. 제파르 대장은 지금쯤 마왕들한테 일일이 답신을 내려주느라 어이가 없지 않을까.

    라우라가 옆에서 교신 내용을 엿들으며 말했다.

    “제국군은 절대로 이 방법을 쓰지 못한다.”

    “응? 저들도 마법사를 활용하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사역마이다. 사역마에게 어느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보고를 이해하며 또 전달하겠는가. 질이 매우 뛰어난 사역마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마법사가 한 마리의 사역마에 집중하여 정신적인 일체를 완전히 이루어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대규모 의사소통에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부대마다 마법사가 한 명씩 따라붙는다면 또 모를까, 어림도 없지.”

    그녀가 미소 지었다.

    “마왕에게는 모든 절차가 폐기된다. 몬스터에게 직접적으로 심상과 명령을 전달하니 말이다. 결국 한 단계를 건너뛰어 마법사 본인한테까지 심상이 전달되는 셈이다. 이제야 군단장의 의도가 이해되는군……안개에 휩싸인 전장은 단연코 마왕군에 유리하다.”

    라우라의 설명은 이러했다. 제국군에는 지휘부의 권위가 제대로 성립되어 있지 않고, 중앙군과 변경군 간에 알력이 있다. 이곳 아우스터리츠처럼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전쟁터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적군이 안개를 뚫고 바로 백 미터 앞에 등장할지 모르는 판국인데 어느 세월에 상위부대의 명령을 기다리겠는가.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총사령관으로서 무언가 명령을 내리더라도, 지휘관들이 ‘죄송하지만 현장의 상황에 맞추어서 임의로 행동했습니다’라고 말할 명분이 생긴다. 총사령부는 실제로도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없으니 지휘관의 임의행동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명분마저 성립된 상황에서 중앙군 2만과 용병 2만이 총사령부의 지휘에 순순히 따를까? ‘현장은 다르다’라는 말을 앞세워서 시시때때로 돌발적으로 행동할 게 분명하다. 총사령부의 존재의의 자체가 무색해지겠지. 제국군은 따로 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 제6군단은 빈틈없는 교신체계와 정찰체계를 완비했다. 이 차이가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지 기대되었다.

    제국군과 마왕군의 하루가 지났다. 제국군은 프라첸 고지대를 중심으로 진영을 세웠고, 마왕군은 안개 대비책을 고안하고 다듬었다. 양군이 대치한 첫 번째 날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다섯 시쯤부터 제국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우리로서는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공격 방식이 워낙 특이했다.

    웬 땅바닥이 쿠웅, 쿠웅, 하고 진동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막사에서 뛰어나왔지만 어두운 밤인데다 안개까지 끼어서 도통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쓰라고 슬라임을 나눠준 것이겠지. 나는 제파르 대장에게 어떤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 기다려라. 본인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는 얌전히 대기했다. 어느새 라우라도 막사에서 나왔다. 그 와중에도 안개 너머로 쿠웅, 쿠웅,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아군의 어느 부대가 공격 받고 있는 것인가? 무슨 공격이길래 이렇게도 멀리 소리가 들려오는가.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뒤, 슬라임의 입구멍이 열렸다. 제파르 대장의 전언에 나는 아연해졌다.

    ─ 제군들에게 알린다. 굉음의 정체는 투석기다. 반복한다. 굉음의 정체는 투석기다. 제국군이 공성무기 수십 기를 동원해서 사방에 바위를 날려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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