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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94화 (94/510)
  • 00094 왕과 장군  =========================================================================

    황태자가 황녀를 시녀 다루듯이 때렸다는 얘기는 순식간에 온 궁전으로 퍼졌다.

    합스부르크의 황궁은 작았다. 궁정 정원이 기껏해야 천여 명을 수용하는 크기였는데, 제국이 갖춘 영토와 위신을 고려하면 수준 미달이나 다름없었다. 현 황제는 번번이 궁전을 확장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황실의 위엄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황실은 단독으로는 건축사업에 뛰어들 만큼 재정이 풍족하지 못했다.

    절대왕정은 몰락했다.……엘리자베트 황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대리석 회랑에 멈춰서서, 기둥 건너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골목마다 짙노란 어스름 같은 것이 스며들었다. 이 세상이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한 저편이 석양빛 커튼 너머로 슬그머니 열렸다.

    엘리자베트 황녀가 중얼거렸다.

    “저물면서 더 빛나는 것이 있다더니……제국은 아니었는가.”

    백오십 년 전만 해도 절대적인 위명을 자랑하던 국가는 이제 사라졌다. 제국은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멸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루돌프 황태자를 도발했으나, 설마 저토록 인내심이 부족할 줄은 몰랐다. 어리석은 남자였다. 이런 소문이 나돌아봤자 그에게 득이 될 게 하나 없었다.

    제국 만민이 알게 되었다. 황녀는 출진하길 원했으나 루돌프 황태자 측에서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행여나 ‘황태자가 패배하도록 황녀가 일부러 군사를 내지 않았다’ 같은 소문이 떠돌 가능성이 봉쇄된 것이었다.

    제국에는 대대적인 외과수술이 필요하다. 군살을 도려내어 썩은 부위를 단호하게 끄집어내야 한다. 어쩌면 과도한 수술로 인해 환자 자체가 죽어버릴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변경백-황태자 원정군에 동원되는 병사 5만, 그들이 희생된다……이 또한 의사가 짊어져야 할 멍에겠지. 열일곱 살의 황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을 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  *  *

    제국의 대군이 움직였다.――소식이 평원파를 진동시켰다. 중앙군 2만, 용병 2만, 변경백군 1만, 총합 오만 대군이 이곳 브란덴부르크 영지를 향하여 진군했다.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르바토스 군단장은 군의를 소집했다.

    영주의 회의실에 제6군단 소속 마왕 열아홉 명이 집결했다. 오만이라는 병력에 당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 것이 왔다, 그런 분위기였다. 벨레드를 비롯하여 몇몇은 명백히 흥분했다. 우리들은 한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르바토스가 일일이 따라준 포도주가 고여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에피타이저는 생략하고 곧바로 본요리야. 집주인이 호화롭게 대접해주겠다는데 거절하면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공성전은 필요없어. 단 한 번의 회전으로 모든 것을 끝장낸다.”

    이번에는 자잘한 전략회의를 거치지 않았다. 제6군단은 일만팔천의 병력으로 적군 오만을 철저하게 깨부술 의도였다. 이쪽에 유리한 전장을 미리 선정해두었고, 편제도 완성했다. 제6군단은 바르바토스의 부대, 벨레드의 부대, 제파르의 부대 등으로 나뉘어서 적군을 요격한다. 나는 물론 제파르 대장의 부대에 속했다.

    “동지들. 군대에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바르바토스가 오연히 말했다.

    “군대에는 승리가 필요하다. 절대적인 승리가. 압도적인 승리가. 동지들, 나는 평범한 승리를 원하지 않아. 어떤 면에서는 이겼고 어떤 면에서는 패배하는 그 따위 전투를 바라지 않아. 철저한 승리를!”

    그녀가 소리쳤다.

    “다시는 우리를 넘보지 못할 승리를! 나는 제국의 인간 전원이 사지가 찢어지고 혀가 잘리며 내장이 쏟아지는 광경을 원한다. 나는 제국군 오만 명의 피가 흘러 산천초목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원한다. 나는 인간종이 마인에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이번 전투가 깨닫게 해주기를 원한다. 동지들――내가 기대해도 좋을까. 후퇴하지 않는 발걸음와 불굴의 의지를.”

    누군가가 “우리에게 피를!”이라고 외쳤다. 그에 호응하여 마왕들이 소리질렀다. 나 역시 큰 목소리로 입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피를! 우리에게 피를! 우리에게 피를!…….

    “좋다.”

    바르바토스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동지들이여, 그대들의 군단장은 언제고 선두에 설 것이다. 그대들의 전열이 무너지고 기사단의 말발굽이 천지를 뒤흔들 때, 그대들이 후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며 절망적으로 눈앞을 바라볼 때, 바로 그곳에 나 바르바토스가 서 있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돌격 명령이 내려졌을 때 눈앞을 바라보면 바로 그곳에 나 바르바토스가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와인잔을 들이켰다. 나머지 열여덟 명의 마왕도 포도주를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한입에 술을 마셔버린 바르바토스가 바닥을 향해서 유리잔을 내팽개쳤다. 유리조각이 산산이 흩날렸다.

    “승리를 위하여!”

    진군이 시작되었다.

    나흘 후, 월맹군 제6군단은 아우스터리츠 구릉 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은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에서 수도 쪽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만일 황태자-변경백 원정군이 이곳을 무시하고 지나칠 경우, 우리는 곧바로 수도로 침공해 들어갈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충지였다.

    우리는 진군하는 와중에도 계속하여 적군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적군에 어떤 장성들이 포진되어 있는지, 각각의 부대가 어떻게 편재되어 있는지 알아냈다. 정보에 따르면 적군은 명목상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태자가 총사령관을 맡고 있으나, 실질적인 군지휘는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쥐었다. 1급 첩보가 생각보다 쉽게 얻어지자 제6군단 수뇌부는 도리어 의심했다. 연막 작전을 위해 거짓된 정보를 뿌린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거짓 정보가 아닙니다.”

    “왜지?”

    제파르의 반문에 내가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이 첩보가 제3황녀의 묵인 아래에 의도적으로 입수된 것임을 알았다. 쿤쿠스카 상회를 경유하여 얻어낸 정보에서는 요즘 제도 사교계가 하나의 사건, 황태자가 황녀를 폭행한 일로 떠들썩하다고 했다. 사교계 인사들은 어쩌다 이런 황망한 사건이 일어났냐며 떠들었고, 귀족다운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사건의 원인이 원정군 참여 여부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 과정에서 원정군에 참여하는 장군 목록이 나돌아다니게 되었다. 즉 이 장군 목록은 합스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인증을 거친 셈이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 황녀가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겠지. 목적은 우리에게 정보를 주기 위함이고……변함없이 수작이 음험했다.

    “적군의 지휘권을 중앙군이 아니라 변경군이 쥐었습니다. 이 사실에 적의 중앙군 장군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어찌되었든 패장(敗將), 우리에게 속절없이 영지를 빼앗긴 장본인입니다. 어째서 무능한 패장이 총사령관 행세를 하는가……중앙군 장수들은 폰 로젠베르크의 지휘권을 잘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탁의 지도에는 체스말처럼 생긴 점토인형이 놓여 있었다. 각각의 인형이 적군의 부대를 상징했다. 나는 그것들을 양쪽으로, 중앙군과 변경군으로 나누었다.

    “여기에 용병군 2만이 변수로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황태자에게 고용된 자들. 설령 지휘권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한테 있다한들, 황태자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고용주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부대입니다. 중앙군 2만에 용병 2만, 이러면 4만 명입니다. 1만 명에 불과한 변경군이 지휘권을 맡아서야 아무래도 세력에서 밀립니다. 중앙군 장수들은 여차하면 황태자를 설득하여 폰 로젠베르크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으려 들 겁니다.”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요컨대 놈들은 지휘권조차 불안한 오합지졸이로군.”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적군의 상황을 파악하여 해설하는 것이야 할 수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전술적인 승리를 거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것은 바르바토스나 여러 상위 마왕의 몫이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전쟁터를 겪은 역전의 용사이니까.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적군의 분열을 이용한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지휘권이 흔들리기 전에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얼른 승리를 취하고 싶어할 터다. 발정기의 숫말처럼 달려들겠지. 우리군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 보이면 그곳에다 전력을 집중시킬 게 뻔해. 따라서.”

    그녀가 지도 위의 인형을 움직였다. 아군을 표시하는 인형이었다.

    “우리는 적에게 유리한 고지를 내준다. 이곳, 정중앙의 고지를 일부러 내버려두겠어.”

    아우스터리츠 지역에는 정중앙에 고지대가 있었다. 지도에는 프라첸 고지대라고 적혔다. 제파르가 침음을 삼키면서 바르바토스에게 고했다.

    “각하, 고지대를 넘겨주면 적군의 기사단이 활개를 치게 됩니다.”

    이 시대에 기사단은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 집단이었다. 본래 세계에서도 최종병기쯤으로 인식되었는데, 여기에선 기사의 무력에 오러까지 겹쳤다. 평범한 군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전쟁은 항상 기사단을 위주로 돌아갔다.

    적군에 고지대가 넘어가면 기사단 입장에선 당연히 오르막길보다 돌격하기 유리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장의 각 부대를 한눈에 담을 수도 있으며, 부대끼리 보다 유기적으로 연동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왕군에는 고지대를 선점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알아. 활개 좀 치라고 내버려두는 거야.”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상식적인 전술안을 거부했다. 그녀가 지도상의 지형을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호수들이 위치했다.

    “난 이백 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이 부근에서 전투했어. 꽤나 잘 알고 있지. 주변에 호수가 많아서 아침마다 제법 짙은 안개가 껴. 나는 전투를 새벽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끝낼 생각이야. 기사단 놈들은 시야가 방해되어 좀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거다.”

    “하지만 각하. 뒤집어서 말하면, 혹시라도 전투가 지연될 경우 기사단은 자유롭게 돌격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짜식아. 정오에 끝내버릴 거라고.”

    바르바토스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어라. 내가 그대들을 믿는 만큼. 장담해주지. 여기 아우스터리츠는 제국군의 공동묘지가 될 것이다.”

    바르바토스는 회의 내내 의견을 강고하게 유지했다.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경고하는 마왕들도 있었지만,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이 그녀한테 동의하면서 토론의 추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우리 제6군단은 프라첸 고지대에 부대를 배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중앙, 좌익, 우익으로 군을 나눈다. 중앙은 나 바르바토스가 맡는다. 좌익은 벨레드가 맡도록. 그리고 우익은 제파르한테 맡기지. 이번 전투의 승패는 다름아니라 우익에 달려 있다.”

    바르바토스가 제파르를 바라보았다.

    “제파르. 우익에는 병력을 최소한으로 배치하겠어.”

    제파르 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소장은 미끼 역할이군요.”

    “아아, 인간놈들한테 가장 허술한 곳으로 비추어야 해. 그래야 놈들의 좆이 빳빳하게 굳어서 달려들 테니까. 제파르. 너의 임무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청년막을 고이 남겨두는 일이야. 만에 하나라도 인간놈들한테 후장이 뚫리지 마라.”

    제파르가 군례를 올렸다.

    “소장, 죽을 각오로 우익을 사수하겠습니다.”

    “동지들이여. 우리의 전투는 단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끝날 것이다. 건곤일척의 싸움이야. 서투름은 용납되지 않아. 다들 마왕으로서 긍지를 품고 맞서싸워라.”

    우리는 다함께 경례했다. 바르바토스가 응답하며 군례를 바쳤다.

    이틀 뒤, 아우스터리츠 일대에 제국군이 당도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프라첸 고지대에 자리잡았다. 바르바토스의 예상대로 전투가 흘러갈 것인가, 아니면 지극히 상식적인 수순에 따라 전투가 이어질 것인가. 나에겐 그것을 가늠할 전술적 안목이 부족했다. 라우라조차 바르바토스의 전술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의 기사>들을 대동한 채 제파르 대장과 함께 우익에 섰다. 힘겨운 전투가 펼쳐질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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