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3화 (93/510)
  • 00093 왕과 장군  =========================================================================

    이 세계에는 불편한 점이 잔뜩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음악이었다. 삶에는 음악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게 가끔 나타난다. 지금은 비제의 <사랑은 자유로운 새>가 장난스럽게 울려퍼져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라벨의 <볼레로>라도! 라우라와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며 허리라도 흔들고픈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음악을 들을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을. 나는 아쉬운 대로 콧노래나 흥얼거렸다.

    “어째서 난세인가? 주군은 왜 난세를 바라는가?”

    “다만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나는 음악의 리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집중하면서 말했다.

    “라우라도 알다시피 저는 약합니다. 세력이라 부를 것도 없어요. 그에 비해 다른 마왕은 어떻습니까? 다른 인간 국가는 어떻습니까? 너무나 강대합니다. 그들은 한바탕 늪에 빠져 혼란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이, 주군은 세력을 일군다…….”

    바로 그렇다.

    바르바토스는 내 의도를 완전히 잘못 알았다. 월맹군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부러 마왕의 숫자를 줄이는 게 목표라고 생각하겠지. 틀렸다. 내가 왜 월맹군을 성공시키겠는가, 멍청하게! 월맹군은 적당히 성공하고 또 적당히 실패해야만 한다. 인간의 세력과 마왕의 세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게끔.

    평원파-산악파-제3황녀 간에 휴전협정이 성사하면 즉시 마왕 바르바토스는 대륙에 자그마한 영토를 소유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마왕과 인간 군주는 멍청하지 않다……난세의 간웅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비출 게 틀림없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의 영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인간이건 마인이건 가리지 않고 협력하게 된다.

    시작이 어렵지 그 이후는 간단하다. 제3황녀와 제6군단장이 서로 협력하여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내면, 그 모습을 보고 다른 군주들이 앞다투어 주판을 두들길 것이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선뜻 난세에 뛰어들지 못하는 군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걷어차주마. 특별 서비스다. 모쪼록 공짜로 즐겨주시라.

    라우라가 수해(樹海)처럼 깊은 눈동자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인간이, 마인이 죽어나갈 것이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죽고, 또 죽기를 바랍니다.”

    “수많은 비극이 생겨날 것이다. 민초들은 가족과 동료를 잃고 떠돌 것이야.”

    “안타깝군요. 눈물은 흘려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흘려서 금세 매마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저의 눈물은 귀족의 눈물이 아닙니다.”

    민초는 약자가 아니다. 난세란 민초에게도 기회의 장이다. 마음껏 반란을 일으켜라. 얼마든지 혁명을 일으켜라. 봉기하라. 그만큼 시대는 격렬해질 것이고, 그만큼 나에겐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던전 어택>에서 인간계는 왕당파와 공화파로 대립한다. 그쪽에도 거대한 불을 지펴주겠다. 예컨대 익명의 저자로서 공산당 선언 비슷한 책을 출간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시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저작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쩌면 간단하게 사장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예상 외의 결과를 자아낼 수 있다……실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실험이다.

    “저에게 질렸습니까?”

    “아니. 주군의 각오를 확인해봤을 따름이다.”

    “어이구. 주군을 시험하는 신하라니 불경하기 짝이 없군요.”

    하긴 얼마 전만 해도 인육이 태워지는 냄새에 아찔해하던 나였다. 라우라로서는 한번 내 각오를 시험해보고 싶었겠지.

    “주군은 어긋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잔혹한 짓도 서슴치 않는 주제에, 정작 그 참상을 보고는 눈물을 흘린다. 사람이 자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뻔뻔해져야 한다. 이건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다, 저들이 못나서 자초한 비극이다, 그렇게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라우라가 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허나 주군은 내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말했다. 그것은 강자의 오만함이라고. 강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약자에게는 어떤 처세술이 남는가……자신이 만들어낸 참상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거기에 어떤 변명도 어떤 정당화도 덧씌우지 않은 채, 비극을 비극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비극에 짓눌리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태도가 정녕 가능한가? 유지될 수 있는가?”

    그녀가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주군은 혼자가 아니다. 나 역시 주군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아무도 걸어본 적 없는 울창한 숲길이요, 가시에 짚신이 쓸리는 행로이다. 주군. 소녀는 우리 두 사람의 미래가 결국에는 그럴듯한 수사학에 얼룩진 것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그렇기에 난세입니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을 딛고 일어설,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유리잔이 부딪쳤다. 유리소리는 집무실의 정적을 깨트리지 못했다. 오히려 정적이 더욱 깊어졌다. 그 가운데서 그녀와 내가 읊조렸다.

    “단탈리안을 위하여.”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위하여.”

    우리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였다. 곁눈질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입안에 술을 잔뜩 머금은 채로,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술을 겹쳤다. 그녀의 달콤한 술이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지금부터 우리는 난세의 정중앙을 가로지른다. 혼자라면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라면. 여기에 또 누군가가 더해져서 세 사람, 네 사람,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간다면 분명 수해의 숲길은 밟아지고 또 밟아져서 이윽고 하나의 어엿한 대로가 되겠지.

    안 됐구나, 바르바토스. 너는 나를 단순히 마왕이라 생각했다. 전적으로 신뢰했다. 너의 이상을 함께 나누면서 걸어갈 동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월맹군이 성공해봤자 내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너는 간과했다……부디 계속해서 간과해주기를 바란다.

    원래 애첩이란 군주에게 있어 아름다운 장미나 마찬가지다. 애첩 때문에 패망한 군주 따위 역사서에 차고넘칠 만큼 많다. 나를 애첩으로 삼은 이상 너 역시 역사서에 한 줄의 이름을 남길 각오 정도는 해줘야 한다.

    무얼, 아직 우리는 든든한 아군이다. 당장은 변경백-황태자 연합의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다같이 물리쳐야 한다. 이 전투가 난세의 개막을 알리는 전초전이 되겠지. 당분간 사이좋게 지내보자.

    *  *  *

    “오라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소녀가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 엘리자베트였다. 경비병들은 차마 황녀를 말리지 못해 쩔쩔 매고 있었다. 황태자의 집무실은 설령 황족이라 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앞을 가로막거나 그녀를 제지하려 하면, '본녀는 제국의 중대사를 논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감히 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이냐!'라고 호통이 쏟아졌다. 여기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에바트리에 백작. 귀족으로서 체통을 좀 지켜줬으면 한다마는.”

    의자에 앉은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방을 모욕하는 의도가 들어간 한숨이었다.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 된 은발의 청년이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 황태자,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였다.

    “백작이 그리 경거망동하니 황실에 대한 민심이 날이 갈수록 혼탁해지는 것 아닌가.”

    “경거망동의 수준을 논하자면 소녀가 어찌 감히 오라버니에 미치겠습니까.”

    엘리자베트 황녀가 황태자한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탁자에 쾅, 하고 손을 내리쳤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서류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오른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무엇이냐?”

    “대(對)월맹군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구성입니다. 이번 원정군에 소속된 장성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요. 오라버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중앙군의 반절이 목록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루돌프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않느냐. 중앙군 전원이 출진해서야 누가 이곳 제도(帝都)를 수비하겠는고. 절반을 본진에 남겨두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전술이다.”

    “제도를 수비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황녀가 비웃었다.

    “대륙의 모든 열국이 월맹군의 침략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 어느 나라가 실성하여 타국을 침범하겠나이까? 마왕군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제도가 안전한 때도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루돌프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노라. 월맹군이 침공해오는 이때, 같은 인간의 국가를 공격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라고. 그게 상식이라고 말이다. 허나 이리와 같이 야비한 군주에게는 지금이야말로 국경 확장의 호기로 보일 터. 단지 상식만을 믿고 제도를 비웠다가는 뒤통수를 얻어맞기 십상일 것이다.”

    “하! 자기 나라를 보존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타국을 침략한다라. 도저히 제정신이 박힌 군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작자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나라가 있다고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황녀의 명백한 비아냥에도 황태자는 느긋하게 받아쳤다.

    “과인도 그리 생각하지만 세상사를 어찌 속속들이 꿰뚫어 보겠는가. 만에 하나, 라는 것이다. 일말의 가능성일지라도 섣불리 간과하지 않는 것이 제왕 된 자로서의 책임. 에바트리에 백작은 더 이상 이번 건에 대하여 불합리하게 덤벼들지 말거라.”

    일말의 가능성이라. 엘리자베트 황녀가 코웃음쳤다.

    눈 가리고 아웅거리는 데도 정도가 있었다. 이번에 황태자가 발표한 원정군에는 황녀파에 속한 장성들이 싸그리 제외되었다. 말이야 제도를 수비한다지만 그곳에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음을 삼척동자가 다 알았다. 황태자의 속셈은 뻔했다. 마왕을 물리쳤다는 위업을 독식하려는 것이었다.

    이백 년만에 다시 일어난 월맹군이었다. 인류의 위기를 구해낸 황족――그런 눈부신 징표를 움켜쥘 기회가 이백 년만에 생겨났다. 황태자는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보통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황녀파의 장군을 두세 명이라도 포함시킬 텐데, 황태자는 원정군을 죄다 자신의 파벌로 구성해버렸다. 인류의 위기에 맞서서 제국 전체가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군공에 눈이 멀어 내부분열을 자초한 것이었다. 그 어리석음에 황녀는 가래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좋습니다. 오라버니의 전술적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소녀도 매우 잘 아니까요. 얌전히 승복해드리지요.”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게냐!”

    황태자가 양손으로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다. 그는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삼 년 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황태자가 총사령관이 되어 진격한 적이 있었다. 반란군에 비해 두 배에 이르는 병력을 가졌는데도 황태자는 패배했다. 반란군이 더없이 기세등등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에 제3황녀, 당시 열네 살에 불과했던 그녀는 적보다 세 배가 적은 병력을 갖고도 반란군을 격파했다. 황태자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황녀의 군사적 명성이 하늘까지 치솟은 사건이었다. 엘리자베트는 그때 사건을 암시하면서 루돌프를 비꼬고 있었다.

    “과인이 적을 약화시켜두자 승냥이처럼 쓸어먹은 주제에, 기고만장해서는……!”

    “흥미롭군요. 그때 오라버니가 패배하고 난 뒤 반란군에는 네 명의 남작과 일곱 명의 자작이 더 합류했습니다. 단순히 병력만 따져도 두 배 가량의 군세가 되었지요. 세상의 어느 병법서에서 적군을 키워준 것을 가리켜 약화라 부르는지, 지식이 일천한 소녀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루돌프가 손바닥을 휘둘렀다. 살이 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

    주변의 관리와 경비병이 경악했다. 루돌프는 방금 황녀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루돌프가 있는 힘껏 뺨따귀를 날린 것에 반하여, 황녀의 고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한없이 싸늘한 눈빛이 황태자를 직시할 뿐이었다.

    “썩 꺼져라! 군략은 국가의 중대사! 조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 달린 거사에 앞서 세 치 혀를 놀림으로써 천리를 거스른 죄, 당장 처벌해도 시원치 않으나 남매의 연으로 넘어감이라!”

    한동안 엘리자베트와 루돌프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시선을 거둔 쪽은 황녀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고, 드레스 자락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황태자가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울분을 토했다.

    “위선자 년 같으니!”

    어차피 제깟 년도 군공이 탐나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전술이니 뭐니 그럴듯한 단어를 붙여가면서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황태자는 엘리자베트가 얄미워서 심장이 달아올랐다. 제국에는 멍청한 장님이 너무나 많았다! 저 년이 뭐가 대단해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라 추켜세우는가!

    머리가 조금 똑똑하다 한들 그래봤자 여자. 얌전히 황태자인 자신에게 복종하면 그만이었다. 저 년의 언니도 주제를 모르고 기어올랐다. 그 천박한 보지구멍에 육봉을 몇 번 쑤셔넣어주니 그제서야 자기 처지를 깨닫고 자살했다.

    그 언니에 그 여동생이라, 황태자는 똑같은 수법을 동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 원정이 성공하면 자신의 파벌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진다. 황녀를 두둔할 우인도 없어지겠지. 그때 가서 그년에게 주제를 파악하게 해준다. 건방진 년이지만 미모만큼은 뛰어나다. 친히 교육을 하사하는 보람이 있으리라. 황태자는 분노를 가다듬으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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