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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92화 (92/510)
  • 00092 왕과 장군  =========================================================================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온도가 하나 내려간 것 같았다.

    창밖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유리창을 열어 내려다보니, 성 안마당에서 벨레드 형님이 술독을 껴안고 몇몇 마왕과 작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벨레드 형님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을 훨훨 흔들었다. 나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성벽 너머로는 낮은 구릉의 전나무밭들과 붉은 황토가 한나절 햇살로 빠져드는, 한없이 나른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위스키를 머금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연 속에 정지된 어떤 영원감 같은 것이 있었다. 잔치의 웃음소리가 그것을 길게 잡아당겼다.

    “파이몬 군단장은 마계를 배신하게 된다. 동족을 공격하는 것이다. 굳이 평원파가 아니더라도 중립파나 무소속 마왕 또한 분개하지 않겠는가?”

    “명분을 만들어내면 간단합니다. 마계인은 벌써 이천 년이나 원정의 실패를 겪고 있습니다. 월맹군에 의문을 갖는 마계인도, 아니,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은 마계인도 적지 않습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쿤쿠스카 상단의 주인이자 진조 흡혈귀인 그녀는 마왕들의 실태에 깊이 실망했다. 결국 이바르는 마왕군을 배신했다. 용사가 이끄는 용병단에 투신했다. 마왕들한테 학을 뗀 마계인이 비단 그녀 한 명뿐이겠는가.

    “성공할 가망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원정하는가? 매번 월맹군이 실패할 때마다 수많은 오크와 오우거, 그외 종족이 죽어나갑니다. 마왕들은 마인의 생명을 담보로 도박에 뛰어드는 것 아닌가……그런 불안감이 분명 있습니다.”

    산악파가 평원파를 제치고 마왕군 제일의 파벌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산악파의 대두는 마계사회의 동향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마인의 생명과 군자금을 낭비할 바에야 적당히 인간종과 타협해서 살아가자――그같은 온건파가 현재 강세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평원파와 제3황녀가 손을 잡습니다. 평원파는 제3황녀의 휴전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제3황녀는 마왕군이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 점유하고 있는 영토를 인정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이로써 마왕군은 비록 대륙을 정복하진 못해도 일정한 영토를 확실하게 점령하게 됩니다.”

    가망이 없는 대륙 정벌인가, 확실한 영토 점령인가.

    마계사회에서 어느 쪽을 더 선호할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마계사회는 명백히 이천 년의 원정에 지쳤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면 기꺼이 파이몬의 영단에 박수갈채를 보내리라. '케케묵은 명분보다 확고한 실리를 쟁취한 마왕.' 파이몬은 그렇게 찬사받겠지.

    내가 미소 지었다.

    “월맹군 이천 년 역사상 첫 번째 업적이로군요. 파이몬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제로 피를 흘려가며 싸운 것은 파이몬이 아닙니다. 우리 평원파지요. 그런데 파이몬은 제3황녀와 밀약을 나눈 것만으로 모든 공로를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모략일지니. 백 명의 주먹보다 한 사람의 혓바닥이 두렵습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이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우라, 우리는 예전에 전쟁의 요소로 천지인(天地人)을 거론한 적 있습니다. 제6군단은 제1군단에 비하여 세 가지 요소 모두에서 뒤처집니다.”

    먼저 명분. 제6군단에는 대륙정벌이라는 실로 옛날옛적의 명분만이 있는 반면, 제1군단에는 마계인을 대륙으로 이끄는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명분이 있다. 전자가 명분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실리까지 겸한다.

    다음으로 지세. 파이몬의 시나리오대로 사태가 흘러가면 제6군단은 앞뒤로 포위된다. 제1군단과 제3황녀파의 군대에 의하여.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영지민의 민심은 단숨에 흔들릴 것이고, 나중에 이 땅을 차지할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겠지. 삼면초가에 이어서 자중지란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인적 차원. 평원파 제6군단은 일만팔천의 병력을 가졌다. 변경백-황태자의 제국군과 싸우고 난 뒤에는 병력이 급감하겠지. 반면에 마왕군에서 제일가는 세력인 산악파 제1군단은 삼만의 병력을 가졌다. 여기에 제3황녀파의 군대가 추가된다. 평원파는 최소 서너 배가 넘는 적군과 싸우도록 강요된다.

    결과는 자명.

    “포위되어 섬멸되겠군…….”

    라우라가 탄식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군단장이 휴전협정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에 들어서면 오히려 마계인의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대륙에 영토를 얻을 절호의 기회를 자질구레한 명분에 홀려 놓치고 있다, 라고.”

    파이몬은 거짓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동족과 싸우게 되어 슬프고 또 슬프지만 보다 큰 대의를 위하여 우리는 나아간다. 마계의 비원을 위하여 비극을 무릅쓰자, 동지들이여…….

    그 결과 평원파는 전멸한다. 산악파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일대를 점령한다. 산악파가 명실상부 마왕군 유일의 거대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럼 중립파도 무소속 마왕도 오피니언 리더인 산악파에 이끌려갈 수밖에 없다.

    파이몬은 서열 제9위이자 실질적으로 마왕군을 지배하게 된다. 산악파에 의한 절대패권. 그것이 목표이리라……파이몬은 자기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한다는 단점을 빼면 꽤나 하는 작자였다.

    “심각한 사태이지 않은가.”

    라우라가 다소 다급하게 말했다.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다. 어찌할 생각인가?”

    “뭐. 파이몬의 계략에 갈채라도 칩시다.”

    “……주군.”

    라우라가 눈을 가늘게 떠서 노려봤다. 나는 진심이었는데.

    전투를 하지 않고도 전쟁을 승리한다, 실로 훌륭한 계책이었다. 전투들의 집합이 곧 전쟁이라 믿는 바르바토스와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솔직히 나는 바르바토스보다 파이몬의 방식이 취향에 맞았다. 어디까지나 음험하고, 음흉하고, 조용하며, 용서없이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까는 그런 방식 말이다.

    이런, 라우라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장난은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 제6군단에는 한 가지 수밖에 남지 않습니다. 황녀의 휴전협정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전쟁하는 것을 바로 관둬야지요. 본래 파이몬이 얻고자 했던 명분을 우리쪽에서 가로챕니다.”

    “음.”

    라우라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둘둘 말았다. 그녀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렇군.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하는 것은 제1군단이 아니라 제6군단, 그러므로 마계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도 제6군단인가……나쁘지 않다.”

    “대륙정벌을 외치던 평원파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겠지만요. 뭐, 평원파 여러분께는 이참에 세상살이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시라고 말씀드리죠.”

    대체로 바르바토스 로리 백작께서는 욕심이 너무 컸다. 그녀는 뭐든지 얻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었다.

    “허면 파이몬 군단장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터인데.”

    “아니요. 우리 제6군단이 휴전협정에 동의하더라도 파이몬으로서는 손해볼 게 전혀 없습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되물었다. 라우라는 금빛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튜튼 왕국인가!”

    “맞습니다.”

    역시. 라우라와는 대화하는 맛이 났다. 내가 원하는 질문과 대답을 쏙쏙 던져주었다. 자고로 대화에 적당한 긴장감이 흐르려면 라우라 정도의 식견을 가져야 했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대화가 뭐 흥미롭겠는가.

    “제1군단은 그저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로 진군하기만 해도 크나큰 이득을 얻는다. 원래 제1군단이 튜튼 왕국으로 진군하려면, 우리 제6군단이 그러했듯 검은 산맥의 수비 거점을 돌파해야만 한다. 허나 제1군단은, 우리 제6군단이 미리 뚫어놓은 통로를 이용함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검은 산맥을 넘어오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흥분해서 말했다.

    “휴전협정이 무사히 성사되면, 제1군단은 그대로 기수를 돌려서 튜튼 왕국으로 침공한다. 그것도 대(對)마왕군 수비 거점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튜튼 왕국 남부 방면으로! 제1군단은 잘만 하면 튜튼 왕국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내가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턱을 살며시 끄덕였다.

    그렇다. 파이몬으로서는 제6군단이 휴전협정을 거부해도 그만, 찬성해도 그만이었다. 거부하면 제3황녀파와 연합하여 제6군단을 섬멸, 합스부르크 북부 일대를 점령한다.

    찬성하면 방향을 반전하여 튜튼 왕국을 침공한다.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과 튜튼 왕국은 우방이었고, 튜튼은 합스부르크 방면의 국경에 별다른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 거기로 제1군단이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것이었다. 튜튼 왕국은 형편없이 유린되겠지.

    결과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석을 점령했을 뿐인 제6군단에 비해, 왕국 하나를 통째로 점령하는 제1군단이 훨씬 더 위대한 군공을 세우게 된다. 산악파의 입지는 더더욱 공고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3황녀와 휴전협정을 주체적으로 이끈 파벌은 평원파가 아니라 산악파. 평원파는 뒤늦게 협정을 인정했을 따름이다. 평원파의 공로마저 어느 정도는 산악파가 앗아가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파이몬한테 이득이 돌아간다. 바르바토스의 패배……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대실패이다.

    라우라가 위스키를 단숨에 비웠다. 그녀는 약간이지만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모략인가.”

    “예. 전쟁입니다.”

    승리하는 군대란 먼저 승리를 구해놓고 그 다음에야 싸우는 족속일지니……. 본질에서는 리프가 이끌던 70인 모험대에 강요한 전투와 하등 다르지 않았다. 라우라는 산간 마을들을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내분시켜 리프의 모험대를 붕괴시켰다.

    제6군단은 검은 산맥을 뚫고, 변경백을 물리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상대를 단순히 적으로만 바라보았다. 파이몬은 달랐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세를 세심하게 파악하여 자신에게 아군이 될 자와 적군이 될 자를 구분했다. 그리하여 제6군단이 어떻게 행동하든지 아군에게 유리해지도록 판을 짰다.

    앞서 생각하는 자가 앞서 행동하고, 앞서 행동하는 자가 앞서 승리를 쟁취한다.

    “……소녀는 전쟁을 바라보는 눈이 갑작스레 커진 듯하다.”

    “축하드립니다. 무럭무럭 커주세요.”

    “허나 주군이 설명한 전국(戰局)에는 거대한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바로 주군이다.”

    그녀가 척, 하고 위스키잔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분명 주군을 제외하면 제6군단의 어느 누구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제1군단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자는 파이몬 외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주군이 알아채버렸다. 주군이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판국은 얼마든지 뒤바뀔 터. 그런데도 주군은 아무한테도 이 사실을 고하지 않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만 있다. 도대체 주군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

    나는 무표정하게 라우라의 술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술잔이 금새 채워졌다. 나는 위스키를 거두지 않았다. 술이 넘쳐흘러 바닥에 줄줄 떨어졌다. 술병이 텅 빌 때까지 나는 위스키를 쏟아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난세(亂世)입니다.”

    “난세……?”

    “라우라. 더 넓게 보십시오. 더 크게 느끼십시오. 월맹군 제1군단의 군단장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와 협정을 맺는다, 제6군단의 군단장이 조인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내가 작게 웃었다.

    “마왕이 대륙의 국제정치에 뛰어들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마인과 인간은 단지 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인과 인간이 서로 협력할 수도 반목할 수도 있는 상대임이 온 천하에 알려집니다. 이제 종족 전쟁은 종결됩니다. 마인과 인간은 종족으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득에 따라 합종연횡하기에 이릅니다.”

    라우라의 여린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의 숨결에 경악이 스며들어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즐거움이 북받쳐서 말했다.

    “난세입니다, 라우라! 전무후무한 난세가 도래합니다. 종족의 숙원이라는 명분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의 세력, 자신의 이익,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투쟁하는 군웅할거가 펼쳐집니다. 아직도 들리지 않습니까?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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