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91화 (91/510)

00091 왕과 장군  =========================================================================

집무실에 깃펜이 종이를 훑는 소리가 나긋하게 울렸다.

과감하게 잉크병에 펜을 쑤셔 넣어 굵은 글씨로 검게 썼다. 어찌나 힘 좋게 펜끝이 내달려 가는지. 문서는 당연하게도 내가 배운 적 없는 언어, 합스부르크어와 고대제국어로 써 있었다. 의미가 자연스럽게 저절로 파악되었다. 읽기는 물론 쓰기까지, 나는 자유자재로 이 세계의 언어를 구사했다. 만일 마왕이 아니라 인간으로 환생했으면 외교관으로 활약했을지 모르겠다.

“주군과 군단장은 파이몬이 차도살인지계를 획책한다고 판단했다.”

“예, 그렇습니다.”

서류를 찬찬히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일견 타당해보이는 파이몬의 계략에는 허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호오.”

“제6군단은 합스부르크 방면의 인간군을 상대한다. 반면에 산악파 제1군단은 튜튼 왕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의 인간군을 대적하지. 여기서 파이몬이 차도살인을 노려봤자,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약화될지언정 딱히 튜튼과 바타비아의 군세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제1군단이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한 차도살인일까……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글쎄. 단순히 우리 제6군단의 전력이 약화되는 것을 노리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기엔 제1군단의 태도가 지나치게 허술하다.”

라우라가 단언했다.

“그들은 아직 출병하지도 않았다. 책사라면 누구든 자기의 계략을 숨기려드는 법, 만약 파이몬 군단장이 오로지 제6군단이 약화되는 것을 노리고 있다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하다못해 제1군단은 검은 산맥으로 출병하여 전투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다……이쪽도 인간군과 열심히 싸우고 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명분을 취했겠지.”

파이몬은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마계사회에서는 파이몬과 산악파를 가열차게 비판했다. 동족이 피를 흘려 싸우는데도 이기적으로 처신하는 자들, 이라고.

“굳이 비난을 자초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혹시 파이몬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닌가? 모종의 이유가 있어 지금까지 꼼짝하지 않고 있다……그렇게 판단해야 옳다.”

“재밌군요.”

나는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깃펜을 놀렸다. 벨레드 형님과 제파르 형님을 변경백 산하의 남작으로 봉신한다는 문서였다.

이로써 제국의 공문 형식에 맞추어서 한 명의 백작과 두 명의 남작이 탄생했다. 마을 촌장들한테 혈서까지 얻어냈다. 마왕 벨레드와 마왕 제파르를 정정당당한 영주로 옹립한다는 혈서를.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파이몬의 진정한 의도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실로 간결하게 해결되는 답안이 있다. 마왕군에 평원파와 산악파가 있듯이,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역시 내부집단이 따로 경쟁하는 것이다. 주군은 지난 번 회의에서 지적했다. 마왕군이든 인간군이든 서로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거대한 집단에서는 응당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상충하기 마련이며, 많은 파벌이 대립한다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서류작업은 꽤나 흥미로웠다. 나는 서류작업이 체질에 맞는 것 같았다. 단순히 형식에 맞추어 수사학을 발휘하여 글자를 적어넣는 것 뿐인데도, 무언가 뿌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사람을 속일 때와 비슷한 쾌감이 느껴졌다. 본래의 처지보다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다는 점에서 서류 또한 일종의 거짓말 아니겠는가.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적당히 중간관리직이 되어 서류놀음이나 했을 텐데……아쉬웠다. 마왕은 근성이 썩어빠진 로리콘에게나 알맞지, 나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성격과는 원체 어울리지 않았다.

“라우라. 위스키 좋아합니까?”

“주군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서랍에서 위스키와 유리잔을 꺼내왔다. 폰 로젠베르크의 창고실에서 냉큼 쌔벼온 물건이었다. 변경백은 애주가였는지 창고에는 보물 대신 희귀한 술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대다수는 창고실의 진풍경에 눈이 홱 돌아버린 바르바토스가 가져갔지만, 나도 네 병 정도는 가로챌 수 있었다. 라우라에게 유리잔을 건네어 쪼르륵 술을 따랐다.

“건배.”

“단탈리안을 위하여.”

째앵, 하고 유리잔이 기분 좋게 떨렸다. 잉크 냄새가 들러붙은 숨구멍으로 위스키의 독한 향기가 물씬 스며들었다. 나는 혓바닥을 술로 적시었다. 두개골이 개운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데 파르네세는 사르데냐 왕국의 공작 가문이지요. 그곳에서 자라난 라우라는 아마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떤 내부적 상황에 놓였는지도 자세히 알 겁니다. 아닙니까?”

“맞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소녀의 가문에선 귀동냥만 해도 능히 대륙 정세를 알아보는 것이 가능했다.”

덕택에 마왕들은 느끼지 못한, 석연치 않은 구석을 파악했는가.

왠지 모르게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가 들뜨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기분이 쉽게 다운하고 쉽게 업하는 조울증 증상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여기엔 지금 내가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아인종이 없었다. 이 기분 좋음은 전적으로 나의 감정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았다…….

라우라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현재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누구든 그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몰락해도 제국은 제국, 절대군주의 자리를 놓고 황위계승권자 세 명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황태자이자 본처 소생의 제1황자. 둘째 아들인 제2황자. 마지막으로 셋째 딸이자 후첩 소생의 제3황녀. 본래 황제에게는 네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었으나, 세 명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공식적으로는 전염병과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었다고 발표되었지만 그걸 순순히 믿는 사람은 꽤나 적었다. 대부분의 식자층은 황족들이 정쟁에 희생되었다고 믿었다.

그건 진실이기도 했다.

게임에 제3황녀 엘리자베트를 히로인으로 삼은 루트가 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이른바 진히로인 루트라고 불리는 시나리오인데, 주인공이 용사이자 제3황녀의 애인이 되어 대륙을 호령하게 된다. 거기 시나리오 후반쯤에 가면 제3황녀 엘리자베트가 고백한다.

‘셋째 오라비와 친동생을 죽인 사람은 본녀다.’

달빛이 처연하게 비추는 창가에 서서 엘리자베트 황녀가 웃는다. 제법 유명한 게임 장면이다.

‘그때 본녀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에 오라비와 동생을 직접 이 두 손으로, 피를 묻히며 죽였다. 그리고 사고사로 위장했지. 참으로 악독한 여인이 아니더냐? 악마가 기생하지 않았다면 어찌 여아가 그처럼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겠는가?’

‘그때 황자들을 살해한 것은 악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비추는 사람은, 저주 받은 인생을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에 슬퍼하는 한 명의 여인입니다.’

주인공의 대사에 제3황녀가 홀라당 넘어간 것은 당연지사. 이후에는 그렇고 그런 장면이 이어진다. 덧붙여 말하자면 제1황녀와 제2황녀는 집단강간을 당하는데, 치욕을 참지 못하여 자살한다는 설정이었다. 다름아니라 친아빠와 친오빠, 즉 황제와 황자들한테 돌림빵 당했다.

막장 드라마 뺨 때리는 황실이 아닐 수 없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황실부터 썩어빠졌다. 파벌 싸움도 치열했다. 이에 제3황녀가 우국충정의 신민들을 규합하여 제국을 뿌리부터 재생시킨다……이것이 던전 어택의 주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때 주인공 용사는 황녀의 세력에 명분을 더해준다. 마왕을 토벌하는 용사를 민중이 지지하고, 용사가 황녀를 지지하여, 결과적으로 민중은 황녀를 지지하게 된다. 나쁘게 말하면 주인공 용사는 프로파간다용 간판에 불과하다.

뭐, 결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니 상관없을지 몰라도 그 해피엔딩이란 게 지금 시점에서 15년 뒤 일어날 이야기. 게다가 이 세계에는 나라는 이레귤러까지 끼어들었다. 황녀가 해피엔딩을 찍기란 요원했다.

라우라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들었다.

“소녀가 알기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권은 대부분 황태자가 쥐고 있다. 중앙군은 황자파와 황녀파로 나뉘어 있지만 변경백들이 절대적으로 황자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고 소녀는 추측했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빤히 직시했다.

“혹시 파이몬 군단장은 제3황녀와 모종의 동맹을 맺은 것 아닌가.”

“…….”

“만약 소녀의 추측이 옳다면 지금 변경백들의 군대와 합류하고 있는 중앙군은, 황녀가 아니라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임에 분명하다.”

나는 맞장구치지 않고 위스키잔을 기울였다.

“황태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중앙군과 변경군을 합치면 물경 5만 대군이 생겨난다. 제국군 5만이 고작 월맹군의 일개 군단에 패배할 리 없으리라 낙관하겠지. 일단 승리에 확신이 들면 군지휘권에 있어 황녀를 철저히 배격할 것이다. 당연하다. 황태자는 홀로 군공을 독식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음. 단독으로 마왕군을 섬멸한다면 그 위명이 천하를 흔들겠군요.”

“그렇다. 귀족과 민중은 하나가 되어 황태자를 지지하게 된다. 황위경쟁에서 단숨에 제3황녀를 제치고 선두에 올라서는 것이다. 황태자에게 이번 월맹군의 침공은 위기가 아니라 천금 같은 기회로 보일 터.”

내가 흐음, 하고 일부러 간을 봤다.

“재미있는 추측입니다. 그럴듯하군요. 하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그럴듯한 추측만으로 우리 제6군단의 방침을 정할 수는 없지요.”

“주군이 그렇게 말하리라 예상했다.”

라우라가 품안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변경군과 합류하는 합스부르크 중앙군의 장군 목록이다. 어디에도 제3황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언제 이런 정보를 입수했습니까?”

“지난 번, 주군이 바르바토스 군단장한테 인간을 앞세우라 간언했을 때부터.”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때 이미 주군이 수상쩍게 행동함을 느꼈다. 민초들이 우리 마왕군에 복속할지라도 당장의 위험을 넘기려 할 따름이지, 진심으로 마왕을 섬기진 않는다. 약간의 위기만 들이닥쳐도 민초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배신할 터. 실로 이상했다! 소녀는 주군이 사악하고 음험하며 겁쟁이에다 약자 중의 약자임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쓰게 웃었다.

“충신이 입에 담았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악담이네요.”

“아니, 칭찬이다. 약자이니까, 약자이기에, 무엇이 위험으로 다가오는지 누구보다 철저하게 감지한다. 언제든지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세력 따위, 주군이 방치해둘 리 만무하다. 주군은 위험에 한하여 짐승과 같은 후각을 지녔으며,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방을 처저하리 만치 물어뜯는다. 주군이 바르바토스 군단장한테 건넨 조언은 단적으로 말해 주군답지 않다.”

어이쿠야. 라우라는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해서 사람을 멋쩍게 만들었다.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소녀의 생각은 이러하다. 황태자는 황위계승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군권을 독점했다. 반면에 파이몬 군단장은 제3황녀와 손을 잡았다. 목적은 단 한 가지. 황태자의 원정군이 우리 제6군단에 의해 섬멸될 경우, 제3황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내가 다시 위스키를 머금었다. 맛있었다. 음, 확실히 비싼 술은 달랐다. 바르바토스한테 졸라서 몇 병 더 얻어놔야겠다.

“제3황녀는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선언할 것이다. 신생 합스부르크 제국은 월맹군에 어떠한 적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전쟁에 신음하는 민초를 위하여 당장 휴전할 것을 제안하노라고. 대륙의 모든 인간과 마인이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파이몬 군단장이 응답한다.――나 파이몬, 서열 제9위의 마왕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여 신생 합스부르크 제국의 휴전 요청을 승락한다.”

라우라가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제법 어울렸다.

“주군. 우리 제6군단은 어떻게 되겠는가?”

“제1군단과 합스부르크 제국군, 양쪽에 포위되는 꼴이 되겠지요.”

내 입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라우라, 훌륭합니다. 제 추론을 따라잡았군요. 맞습니다. 파이몬 제1군단 군단장이 여태까지 출병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게을러서도, 멍청해서도 아닙니다. 승냥이처럼 천천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1군단의 목적지는 튜튼 왕국 방면이 아니겠군.”

“예.”

내가 유리잔을 치켜들었다.

“제1군단의 목적지는 바로 이곳. 합스부르크 제국입니다. 파이몬은 제국군과 연합하여 우리 군단을 포위할 속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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