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왕과 장군 =========================================================================
“흐응.”
바르바토스가 이쪽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콧소리까지 곁들이면서. 꼬맹이 주제에 눈동자에 묘하게 색기가 있어 곤란했다. 부디 공적인 자리에서는 섹스 어필을 자제해줬으면 한다마는……봐라. 벨레드 형님도 제파르 형님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애가 어른들을 놀리면 못 써요.
“우리의 꾀주머니 족제비 마왕, 단탈리안. 이번에는 얼마나 질 나쁜 수작을 생각해왔길래 그리 당당하게 손을 드실까?”
내가 멋쩍게 웃었다.
“인간을 앞세웁니다.”
“인간을 앞세워? 무슨 뜻이냐?”
“변경백의 군대는 크게 기사단과 징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징집병은 우리 마왕군이 두려워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촌민입니다. 이 촌민들을 설득합니다. 우리 마왕군은 항복하는 인간에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가도록 허용하겠다. 다만 우리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라. 안전만 보장되면 그들로서도 전쟁은 피하고 싶겠지요. 변경백의 군세는 크게 약화될 것입니다.”
농민들이라고 영지에게 대단한 충성심이 있어서 군대로 집합한 게 아니다. 마왕군에 마을단위로 대항하느니 한곳에 모여서 집단적으로 대항하는 편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철저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조직된 군대, 그렇기에 강한 결집력을 발휘하는 군대.……만약 이쪽에서 더 큰 이득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기도 한 군대이다.
“인간놈들이 우리를 쉽게 믿을 리가 없는데.”
“그렇기에 같은 인간을 앞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동족이 설득하면 인간들도 귀를 기울이겠지요. 마침 저에게 적당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합니다.”
내 던전 주변에 사는 마을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파르시를 위시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일종의 사신단을 꾸리게 만든다. 그들이 변경백 영지의 마을들을 순회하면서 투항을 권고하는 것이다.
“대체로 촌민들은 반신반의할 겁니다. 설득에 호의적인 마을이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마을이 있겠지요. 그때 별동대를 동원합니다. 투항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보인 마을들을 본보기 삼아 쓸어버리지요.”
“인간종이 자네의 말처럼 쉽게 협력하겠는가.”
제파르 대장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증오한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인간종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인간종은 기꺼이 우리에게 복속하겠지요.”
“그게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
내 말이 별로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는지 마왕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단지 시도해봐도 손해볼 게 없었으므로 일단 채택되었다. 결과는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항복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친 마을이 무사한 반면, 권고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마을이 초토화되자 많은 촌민이 앞다투어 항복해왔다.
닷새가 지나자 변경백의 군세 3만 5천 중에 2천 명 가량이 탈영했다. 변경백들은 깜짝 놀라서 탈영한 마을――탈영은 마을 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서너 개를 인류를 배신했다는 명목으로 쓸어버렸다. 이것이 실책이었다. 그들이 마을을 공격할 때 도리어 우리 제6군단에서 마을의 원군을 파견했다.
우리는 마을들과 약속한 바를 실제로 지켜보였다. 반면에 명목상으로라도 영지민 보호의 책무가 있는 변경백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마을을 공격했다. 징집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대규모로 탈영했다. 최종적으로 변경백들의 군대는 1만 7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제대로 된 결전을 펼치기도 전에 군대가 반쪼가리 나버린 것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피를 토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불쌍하게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것은 마왕군도 마찬가지였다. 마왕군은 정말로 별 대단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다만 사신단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항복문서에 적힌 바에 따라 마을을 보호해주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적군이 붕괴되자 마왕들은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무슨 요술사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미소 지으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여러분은 두 가지 사항을 간과했습니다. 첫 번째는 편견에서 기인합니다.”
“편견?”
벨레드가 다른 마왕의 대표자가 되어 내게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인간군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의 집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허나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저 많은 숫자의 인간이 하나로 똘똘 뭉치겠습니까? 저들에게도 계급이 있고, 지역이 있으며,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로 뭉친 까닭은 오로지 우리 마왕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음이 밝혀진 바에야, 굳이 민초까지 우리한테 대항할 이유는 없습니다.”
인간한테도 똑같이 편견이 있다. 마왕들이 이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마왕군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하겠지. 그러나 이쪽에는 평원파니 산악파니 서로 대립하는 내부집단이 당연히 있다. 어찌 없겠는가. 마왕들도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인간들을 하나의 인간종으로 여겼고, 인간들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편견은 검은 산맥 수비군에서 기인했다. 검은 산맥의 산성 수비군들은 특이하게도 인류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마왕은 무조건 인류의 적이며, 그런 자들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는 자들만이 산성 수비군에 지원했다……마왕들이 대륙을 침공할 때 항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인간군은 산성 수비군이었고, 그것이 선입견을 제공했다.
<던전 어택>에는 인간계가 분열하는 시나리오가 있다. 원래 스토리에서도 저러한 선입견이 무너지면서 인간계가 두 갈래로 나뉜다. 적당히 마왕에 협력하면서 생존을 추구하자는 쪽, 그리고 마왕을 몰살해버리자는 쪽. 나는 본래 예정된 시나리오를 조금 앞당겼을 따름이다.
“두 번째로 여러분이 간과한 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여러분은 '월맹군'이라는 단어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안겨주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보통 길어봤자 60년입니다. 제7차 월맹군이 200년 전에 있었습니다. 저들에게 월맹군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과거의 악몽과 같습니다. 그 악몽이 재래한 것입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겠지요.”
마왕은 수명이 무한하다. 어디가 다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살아간다. 마왕에게 이번 월맹군이 '어이구, 또 월맹군이네' 정도의 인식으로 다가온다면, 인간들에게는 '세상에! 마왕들이 연합해서 침공한다고?' 정도의 인식으로 느껴진다. 몬스터 스무 마리만 몰려와도 인간의 마을에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런데 몬스터 수만 마리가 침략한다는 것이다. 공포 이외에 무엇도 아니다.
검은 산맥에서 산성 수비군이 보인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녀석들은 우리가 월맹군의 선봉대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최후에 가서야 알아차렸다…….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촌민 입장에선 인간 영주나 마왕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편견과 인식인가……제국군이 불쌍해지는군. 전투 한 판 없이 군대를 절반 가까이 잃어버렸으니 말일세. 전술이란 모략일지니. 자네와 같은 모략가가 있음은 우리 마왕군에는 축복이요, 인간군에는 저주로군.”
제6군단은 거침없이 진군했다.
이제 제국군은 병력 면에서도 제6군단에 뒤쳐졌다. 제국군 일만칠천, 마왕군 일만팔천. 원래부터 병사의 질에서 몬스터가 압도적이었다. 이래서야 공성전을 벌여도 마왕군에 필패할 수밖에 없었다.
변경백들은 분루를 흘리며 후퇴했다. 그들은 성하 마을까지 포기했다. 제도의 중앙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내륙 깊숙한 곳까지 달아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탈영병이 대규모로 발생한 것은 물론이었다. 대충 탈영병의 정보를 종합해보니 변경백들을 끝까지 따라간 군대는 도합 8천 명도 안 되었다. 대승이었다.
“씨발, 이게 뭐야.”
자신이 거둔 승리에 바르바토스가 욕을 내뱉었다. 현재 우리는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머물던 영주성에 모여 있었다. 값비싼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접견실. 바르바토스는 변경백의 옥좌에 앉아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존나 뭐냐고! 변경백이 이렇게 쉬운 새끼들이었어!?”
바르바토스의 포효에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마왕들도 바르바토스와 심정이 똑같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혈입성입니다. 조금 더 기뻐하셔도 좋을 텐데요.”
나는 바르바토스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자타를 불문하고 제6군단의 최고 작전참모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부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시켰으니 당연했다.
“아니, 지난 이천 년 동안 우리가 개고생한 건……? 여기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게 세 번밖에 없었고, 그것도 좆빠지라 전투해서 겨우겨우 얻은 거였는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지요.”
바르바토스는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실시간으로 멘탈이 붕괴하고 있었다. 사실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여기 접견실에 모인 대다수의 마왕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뭐야? 우리가 이천 년 동안 개지랄한 게 전부 삽질이었다고……?”
“삽질이란 표현은 다소 경거망동하군요, 백작 각하.”
“……백작 각하? 그건 또 뭐야?”
내가 품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이 땅의 신민들은 각하를 정당하고도 유일한 변경백 영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백작 각하께는 이제부터 영지민을 굽어살필 의무가 뒤따르며, 영지민에겐 백작 각하의 소집령에 부응할 의무가 생깁니다.”
“어, 어……?”
“경하드립니다. 마왕으로서 최초로 마인과 인간, 양 종족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셨군요. 지난 역사를 통틀어서 이만한 업적을 달성하신 분은 바르바토스 님뿐입니다. 오늘부로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서열 제8위의 마왕이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서 군림하십니다.”
내가 깍뜻하게 허리를 숙였다.
“잠깐만! 시발, 무슨 개소리야. 내가 인간놈들을 왜 보살펴!”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나는 은근한 어조로 바르바토스에게 말했다.
“영지민을 다스리는 자가 귀족인 것은 당연하겠지요.”
“야, 단탈리안 너 개새끼야. 솔직히 불어. 너 새끼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냐?”
“백작 각하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파이몬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폰 로젠베르크를 물리치길 원한다고. 저는 각하의 요구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륙 정복이 끝나는 그날까지 임시로 인간을 다스릴 뿐입니다. 온 대륙을 마인의 세상으로 만들고난 다음에 인간종을 팽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인간종을 이용해먹죠.”
“하아. 이상하다. 뭔가 이상한데, 시발. 이긴 건 맞는데 왜 이리 찜찜하지.”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이런 의미없고 귀찮은 일을 하기는 싫다고, 영지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몽땅 나한테 떠넘겼다.
내가 첫 번째로 시행한 정책은 부대를 동원하여 영지의 야산에 서식하는 야생 몬스터를 싸그리 토벌하는 것이었다. 인간군과 전투하여 인육을 얻지 못한 이상, 대용책으로 몬스터 고기가 필요했다. 몬스터가 몬스터를 토벌하는 광경에 영지민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새로운 영주의 과감하고 자비로운 정책에 만세 삼창을 연호했다. 군대 식량도 공급하고 민심도 얻고 일거양득이었다.
일만팔천의 몬스터 부대는 성하 마을에 주둔케 했다. 성하 마을 출신의 인간들은 변경백을 따라갔기에 마침 주둔지로 적당했다.
“주군은 음험하다.”
탁자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날 보고 라우라가 말했다.
“결국 이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과찬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저 <던전 어택>에서 벌어질 일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세간에서는 그걸 치트라고 부르겠지만, 뭐 어떤가.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