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왕과 장군 =========================================================================
“……대단하군요. 한 명의 남자로서 존경합니다.”
“크흐흠. 뭐 이런 걸로 존경씩이나.”
벨레드가 헛기침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구릿빛 뺨에 홍조가 옅게 떠올랐다.
맙소사. 고작 칭찬 한번 했다고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던전 어택>에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전사로만 등장하던 벨레드가 사실은 세기의 로맨티스트, 아니 밀레니엄의 로맨티스트인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로맨티스트라는 단어를 멍청한 순둥이로 이해했다.
“아무튼 그 뭐냐. 그래서 바르바토스 님과 한 거냐?”
벨레드가 초조하게 날 보았다. 눈망울이 참으로 똘망똘망했다. 눈동자만 얼굴에서 따로 편집하면 강아지 시츄의 눈으로 보이겠지. 오우거 몸집에 멧돼지 얼굴, 여기에 시츄의 눈동자……나는 자꾸 헛구역질이 나오려 하는 것을 참아냈다.
“그럴 리가요. 벨레드 님도 알지 않습니까, 군단장 각하의 취향을. 그분은 여자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다시피 저는 남자지요.”
“하지만 말이다.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너를 애첩이라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건 무슨 뜻이냐?”
벨레드가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뇌근육도 의심이라는 걸 할 수 있는가. 곤란했다. 애첩이니 뭐니 웃기지도 않은 말 때문에 고위 서열의 마왕한테 반감을 사다니, 결단코 사양하고 싶었다.
‘연기 스킬 발동.’
알리미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책상 모퉁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춥니다! 당신의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의심할 확률이 '제법' 낮아집니다.」
스킬 성공을 확인하고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른바 장난감입니다.”
“장난감?”
“예. 알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대단히 귀중한 정보라는 듯한 몸짓으로 내가 벨레드한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벨레드가 자연스럽게 귀를 이쪽으로 기울였다.
“군단장 각하께선 어마어마한 사드입니다.”
“그, 그래?”
“아무렴요. 군단장 각하께서 여인들과 놀아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 없습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이요, 밧줄로 꽁꽁 묶는 것은 전채 요리에 불과하지요. 삼각목마에 태운 다음 세 시간 내리 고문하는 게 기본이고, 촛농 떨구기는 디저트입니다.”
벨레드가 침을 삼켰다. 꿀꺽 소리가 무슨 꿀꺽이 아니라 꿀꺼어억 수준이었다. 멧돼지 혼혈아는 뭐든지 스케일이 컸다. 녀석은 내 말에 따라 생생하게 상상하고 있는지 입가에 침까지 흘렸다. 이놈의 뇌내망상에서는 바르바토스가 현재진행형으로 발가벗은 채 채찍을 휘두르고 있겠지. 변태 자식.
“거기서 저는 소위 관람객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요리에 각별한 맛을 더하기 위한 조미료라고나 할까요. 군단장 각하께서 여인들과 즐기시는 동안 저는 계속 벽에 묶여 있습니다.”
“벽에 묶여?”
이해하지 못했는가. 과연 천사백 년의 동정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동정은 아니었지만 세상만사 유통기한이 있는 법이었다. 섹스 유경험자라는 타이틀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도 아무리 길어도 천 년보다는 짧으리라. 전차원적 유통기한법에 따라서 벨레드 네놈은 동정이다.
“생각해보십시오. 군단장 각하가 얼마나 아름다우십니까.”
“음.”
“또 각하의 애인들은 또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그런 여인들이 눈앞에서 난잡하게 뒤엉키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발딱 흥분한 저를 군단장 각하께선 놀림감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군!”
벨레드가 돌연 진리를 깨달은 달마 대사마냥 탄성을 질렀다.
“애첩이라는 말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줄이야.”
“물론 군단장 각하의 대리석 조각과 같은 몸매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행운아일지도 모릅니다.”
대리석처럼 몸매가 평평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대리석 조각과 같은 맨살을 코앞에 두고서 저는 무력하게도 아무 짓도 못합니다. 박고 싶어도 못 박습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그거 참……천국 같은 지옥이로군.”
벨레드는 나의 처지를 부러워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아리까리한 얼굴이었다.
“치욕적이며, 무기력하고, 절망적이지요. 벨레드 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같은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양손으로 벨레드의 오른손을 덥썩 붙잡았다.
“겨우 제71위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저 역시 한 명의 마왕입니다. 한낱 노리개로 취급당하다니요. 벨레드 님처럼 전사의 명예를 아는 분이라면 저의 심정을 이해하겠지요!”
“으음? 물론이다. 나야말로 진정한 전사이니까.”
“제가 지옥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군단장 각하께서 진정한 반려자를 찾는 것입니다. 군단장 각하께서도 한 남자를 진정토록 사랑하게 되신다면 저를 놀림감으로 삼지 않으시게 되겠지요!”
내가 울먹거렸다. 실로 열연기였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보았다면 당장 대회규정을 뜯어고쳐서라도 나한테 남우주연상을 안겨줄 것이었다. 오우거 혼혈아 한 마리 속이는 것쯤이야 일거리도 되지 못했다.
“크흠, 아마도 그러하지 않겠느냐? 바르바토스 님이 바람 따위를 피울 리가 없고.”
놀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결혼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만에 하나 결혼한다손 치더라도 신혼여행에서 남자를 서른 명 정도 꼬셔서 남편과 함께 섹스 파티를 벌일 거다. 심지어 남편을 고깃구멍으로 만들어버린 다음 남자들한테 돌림빵 당하도록 만들겠지. 장담해도 좋다. 벨레드가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바르바토스 여신과 내가 아는 바르바토스 년 사이에는 250만 광년의 거리가 놓여 있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벨레드 님, 저는 당신을 본 순간부터 직감했습니다. 벨레드 님이야말로 군단장 각하께 어울리는 천생연분이라고!”
“뭐, 뭐시라?”
“벨레드 님은 우리 평원파에서 둘째가는 분입니다. 군단장 각하와 함께 평원파를 이끌어나가기에 이보다 더 적합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무려 천사백오십육 년 동안 군단장 각하를 사모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느 한 사람이 천사백오십육 년 동안 짝사랑을 지켜왔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조차 벨레드 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항복할 게 분명합니다.”
내가 침을 튀겨가며 설파했다.
“지위와 마음. 두 가지 면에서 벨레드 님을 당해낼 만한 후보자가 없습니다. 단언컨대 벨레드 님이야말로 군단장 각하의 반려자가 되셔야 합니다. 이는 분명히 수천 년 전부처 운명적으로 결정된 사항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벨레드 님을 남몰래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도와주다니……무엇을 말이냐?”
“뭐긴 뭐겠습니까. 벨레드 님의 짝사랑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드린다는 말씀이지요. 노리개에 불과하다 해도 저는 군단장 각하의 애첩입니다. 군단장 각하가 어떤 남자가 취향인지,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모든 정보를 캐내서 당신한테 전달하겠습니다.”
벨레드의 두 눈동자가 수박처럼 커졌다.
“진심이냐? 진심으로 그렇게 해주겠다고?”
“저 단탈리안. 이래봬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거짓을 입에 담은 적 없습니다. 저만큼 거짓말과 거리가 먼 작자는 세상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겁니다.”
단지 그 세상은 나 혼자만 존재하는 세상일 뿐이다.
“믿어주십시오. 제 진심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면, 저의 불행을 믿어주십시오. 박고 싶은데도 결코 박지 못하고 여섯 시간 내내 벽에 묶여서 바르바토스 님의 맨살을 지켜봐야만 하는, 저의 불행을 믿어주십시오. 벨레드 님! 당신이 군단장 각하와 결혼하는 것만이 저를 무간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줄 해법입니다!”
“너……너, 진정…….”
벨레드가 부르르 떨었다.
“너 진정 좋은 놈이로구나!”
그리고 두 팔을 활짝 벌려서 나를 안았다. 우득, 하고 뼈가 아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팔뼈가 약간 부서진 것 같았다.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약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얼굴에 스마일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안하네. 내 여태 자네를 오해했어!”
“군단장 각하께서는 꽤 짓궂으시니까요……크읏, 여러 사람을 골려먹으려고 일부러 오해를 사게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그렇지. 그렇고 말고. 바르바토스 님께는 짓궂은 구석이 있지!”
짓궂은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 짓궂음 그 자체이다.
“단탈리안. 아니, 형제여! 자네가 나의 연애사업을 도와준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어. 설령 우리의 진심을 여신께서 굽어살피지 아니하시어 천사백 년의 진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나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 결코 형제의 조력을 잊지 않겠네.”
“실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팔뚝에서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입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앞으로 벨레드 님을 형님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호형호제의 연을 받아주십시오.”
“아아, 그러하지. 동생! 잘 부탁함세! 우리가 비록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나기를 구할 수는 없을지언정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죽기를 맹세하지!”
우리는 뜨겁게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뼈가 삐걱이는 소리가 다시금 느껴졌다. 오우거 혼혈아의 악력을 버텨내기엔 내 팔뚝이 지나치게 섬세했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운데 귓가에 효과음이 울렸다.
「마왕 벨레드의 호감도가 20 오릅니다.」
「마왕 벨레드와 특수관계 의형제가 됩니다! 위대한 존재와 특수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신의 명성(악명)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리하여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벨레드와 나, 여기에 나중에 제파르 대장까지 가세하여, 우리 세 명은 평원파의 삼형제라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는 왜곡되어 또 왜곡되어서 '한 명의 무인, 한 명의 장군, 한 명의 책사가 대의를 위해 결의하였다'라고 퍼지기에 이르렀다. 실상은 두 명의 로리콘과 한 명의 범인이 있을 따름이었다.
삶이란, 참.
* * *
적색 산성 앞마당에 군진을 차린 지 나흘이 흘렀다. 그동안 변경백들은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우리가 기다려준 것이었다. 여기에는 마왕군과 인간군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마왕군에게 식량이란 우선 인육이다. 긴 시간 동안 소규모 전투들을 거치는 것보다 짧은 시간 안에 대규모 전투를 겪는 게 이롭다. 그래야 손쉽게 식량을 조달하기 때문이다.
인간군에게도 소규모 게릴라보다 대규모 회전이 좋다. 소규모 게릴라전을 강요할 시에 마왕군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군을 해산하여 사방으로 퍼트리는데, 이렇게 사방팔방으로 몬스터가 뻗어나가면 인간의 마을들이 초토화 되어버린다. 설령 전투에서 이길지라도 촌구석의 백성까지 씨가 말라버려서야 도저히 영지를 재건할 수 없다.
영주한테 마을은 단순히 세금을 징집할 단위가 아니다. 각 마을은 몬스터에 대항하는 최전선이기도 하다. 딱히 마왕군이 이끄는 몬스터 부대가 아니어도 대륙에는 몬스터가 넘쳐난다. 하다못해 마을 뒷산에도 고블린이 산다. 이처럼 작게 무리를 지어사는 몬스터들을 억제하는 것이 다름아니라 마을이다.
마을은 자경단을 육성하여 자체적으로 주변의 몬스터를 소탕한다. 만일 많은 숫자의 마을이 일거에 사라진다면, 몬스터들은 자기네를 억제하는 마을 자경단이 사라진 틈을 타서 순식간에 세력을 불릴 것이다. 영주 입장에서 마을이란 세금을 얻는 재원일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몬스터의 확장을 제어해주는 군사적 단위. 손쉽게 버림패로 쓸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원래 세계와 다르게 이곳에서는 평민들의 발언권이 꽤 강하다. 중앙집권력이 어마무지하게 강한 국가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평민을 억압할 수 없다.
다만 반작용이라고 할까.
영주 또한 '마을에 문제가 생겼다고?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지 그래' 하고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잦다. 복지정책이 상당히 약하다. 흑사병이 좋은 예시이다. 대륙에 흑사병이 창궐하기 시작하자 인간 영주들은 곧바로 자기 식구부터 챙겼다. 평민층에 보급해도 기껏해봤자 직속의 성하(城下) 마을에 뿌리는 정도였다.
소문에 따르면 흑사병을 도리어 기회로 여긴 영주마저 있다던가. 블랙허브를 얻기 바란다면 마을의 자치권을 상당 부분 넘기라면서 협박하는 영주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상황이 이럴진대 하나의 국가에서 살아갈지라도 지역과 지역, 귀족과 평민, 도시와 시골 사이에 어떤 유대감 따위가 생기기란 요원했다.
어디 평민한테 물어봐도 자기 자신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민'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보다 '어디 마을 출신'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리라. 이들이 다함께 연합하는 경우는 월맹군처럼 몬스터의 대규모 침공이 있을 때였다. 검은 산맥을 지키던 수비군들은 극히 드문 반례에 속했다.
여하간, 마왕군이나 인간군이나 대규모 회전을 바라고 있었다. 우리는 변경백들이 군대를 집합시켰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병력은 약 3만 5천. 그중 기사가 물경 천오백 명에 달한다니 매우 비정상적인 군대였다. 이에 월맹군 제6군단에서 군의가 열렸다.
“건방진 가축 새끼들이 슬슬 한자리에 모이고 있다.”
바르바토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거대한 군막이었다. 열여덟 명의 마왕이 각탁 양옆에 앉아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상석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래봤자 돼지가 갑자기 오크가 되는 것도 아니지.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줄 때가 다가왔어. 하지만 불쾌한 소식이 하나 있군.”
그녀의 입끝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파이몬, 제1군단의 창녀가 아직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거지. 그 허벌보지 년은 보나마나 인간과 우리가 서로 자멸하기를 바라고 있다. 여전히 음흉하기 그지없는 창녀야. 인간군을 싸그리 전멸시키는 것은 이쪽에서 바라던 바이나, 그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은걸.”
바르바토스가 주위를 스윽 바라보았다.
“인간군을 섬멸하면서 동시에 파이몬 년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고 싶다. 이에 대해 어디 좋은 의견 없어? 사양치 말고 말해봐.”
막사에 적막이 찾아들었다. 당연했다. 바르바토스의 저 말은, 일절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변경백을 물리칠 방도가 있느냐고 질문한 셈이니까.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바르바토스도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다른 마왕들이 멋쩍은 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손을 들어올린 마왕이 있었다.
내 오른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