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왕과 장군 =========================================================================
새벽이었다. 눈꺼풀 너머로 어렴풋하게 푸른 어스름이 비추었다.
이때쯤 일어나야 옳았다. 하지만 나는 모포를 뒤집어쓰고 침대에 파고들었다. 무언가가 옳다는 것은 달리 말해, 내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는 소리이므로……궤변인가? 아니다. 무언가가 그릇될 수 없다면 옳을 수도 없다……요컨대 더 자고 싶었다. 나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무얼, 선봉대에서 제일 높은 공로를 세운 이가 누구인가. 이 정도 게으름이야 다들 눈 감아줄 거다.
“주군.”
언젠가 쇼펜하우어는 국적과 신분을 불문하고 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탐구했다. 답은 간결했다. 게으름,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요 본질이며 이데아였다.모든 인간은 게으르다는 점에서 똑같았다. 즉, 새벽임에도 모포를 뒤집어쓴 나의 현재 행위는 쇼펜하우어적으로 정당화되어 있었다…….
“주군, 일어나라.”
거짓말이 거짓말로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게 정말로 거짓말인가. 뉴턴이 콧수염을 벌렁거리면서 소리쳤다. 사과가 거꾸로 올라가버렸다! 사과는 떨어지는 데 지쳐 이따금씩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다……새로운 진리에 뉴턴이 흥분하면서 사정했다. 파트너는 놀랍게도 제파르 대장이었다. 그런가. 제파르와 뉴턴이 파트너였는가. 내 무의식은 제파르와 뉴턴을 파트너로 인식했는는가. 나의 창의력에 감탄할 도리밖에 없었다.
“허. 주군은 오늘 늦잠쟁이가 될 모양새로군.”
“어째서 제파르 대장이 수(守)……으흠냐.”
“일어나지 않으면 야한 짓을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애첩인가……훌륭한 케미…….”
“알았다.”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불이었다. 이불은 때때로 움직이기도 했다. 사과가 하늘로 올라가는 세상에서 이불이 다소 꿈틀거리는 거야 이상하지 않았다.
“으응……으읍…….”
따뜻한 것이 하반신을 감쌌다. 그리고.
“끄아아아아아악!?”
두개골이 저릿했다. 강렬한 쾌감이 올라왔다. 등골이 섬칫했고, 허리가 강제로 붕 떴다. 아직 뇌가 신체에 명령을 내릴 만큼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몸은 갑작스럽게 둑방을 뚫고 몰아친 쾌감의 급류에 그대로 휩쓸렸다.
“쭈우웁……츄릅, 으응.”
“뭐, 뭐, 대체, 으으으윽!”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이불을 들추었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내 하반신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발기도 되지 않은 나의 그곳을 핥고 있었다. 펠라티오 방식이 무척 특이했는데 자지의 껍질을 양손 손가락으로 벌렸다. 껍질이 꽃잎처럼 활짝 벌려지자 그 속을 혓바닥으로 핥았다.――이런 오랄 섹스는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이만한 쾌감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라, 라우라. 잠깐만요. 침착하세요. 우리 대화로, 잠깐!”
“으읍, 응, 으으응, 으으읍……츄읍.”
“끄이이이이잇!?”
또 다시 쾌락이 폭발했다. 내 등이 새우처럼 팔짝 튀어올랐다. 나는 정신이 어벙해져 침대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였다. 마치 허리가 꺾이고 땅바닥에 내버려진 한 떨기 꽃처럼. 어째서인지 머릿속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의식이 새하얘진 나를 향해 라우라가 말했다.
“꿀꺽.……좋은 아침이다, 주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평한 목소리였다.
“간밤에 편하게 잤는지 모르겠다.”
“누구 덕분에 무, 무척 편하게 잤네요.”
안 되겠다. 발음이 떨렸다. 혀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건 뭡니까?”
“그거라니. 그게 무엇인가.”
“방금 그거요.”
라우라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침 말고도 하얗고 탁한 액체가 라우라의 얼굴에 묻어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깨끗하게 단장했다.
“음, 펠라티오 아닌가.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닌데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 그저께도 막사 뒤에서 한 걸로 기억한다마는.”
“보통 펠라티오가 아니니까 그렇죠!”
“아하. 과연.”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은 처음이었나보군. 아까 그건 소녀가 개인적으로 껍질 펠라티오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꺼, 껍질 펠라.”
나도 모르게 따라했다. 공작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귀족 영애가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니었다. 내가 아연실색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우라가 껍질 펠라가 무엇인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일단 껍질 펠라티오는 남성이 발기되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다. 껍질을 이렇게 벗겨내서 속을 핥는 것이 껍질 펠라티오인데, 발기해버리면 육봉과 함께 껍질이 탱탱해지므로 따로 껍질을 벗겨낼 수가 없다. 즉 껍질이 군살처럼 늘어져 있어야만 가능한 펠라티오이다.”
“자지, 육봉, 껍질…….”
소름이 끼쳤다. 누구냐. 어떤 녀석이 열일곱 살 소녀가 주저없이 저딴 단어를 내뱉게 만든 것이냐. 열일곱 살은커녕 서른일곱 살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어법을 지금 라우라가 쓰고 있었다.
“이 펠라티오는 여타 펠라티오와 다르게 특별한 쾌감을 선사한다 들었다. 그래서 오늘 시험해봤다. 주군이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기쁘군.”
“지나치게 쾌감이 강해요. 게다가 자지 껍질이라니. 불결하지도 않습니까? 소녀로서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체통을.”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은 대소변을 보지 않고 땀도 흘리지 않는다. 불결할 게 어디 있겠는가.”
“아.”
확실히 그랬다.
마왕이 된 이후로 웬만큼 많이 먹거나 하지 않고서야 대소변을 볼 일이 없었다. 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죽을 지경이 될 때까지 뛰어야 겨우 몇 방울 땀이 흘렀다. 하도 신기하여 왜 이러는가 찾아보았더니 마왕의 신체는 절반 이상이 마나로 이루어져서 그렇다나 뭐라나. 즉 펠라티오할 때 불쾌감을 유발하는 지린내와 때가 나에게는 없었다.
쾌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눈앞의 상황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중에 무언가가 떠 있었다. 홀로그램이었다. 파란 홀로그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직업 레벨(성노예)이 올라갑니다!」
“…….”
망연자실하게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성노예 직업레벨이 레벨D에서 레벨C로 상승해 있었다. 그러니까, 껍질 펠라인가 뭔가를 했더니 라우라의 직업레벨이 올라갔다는 얘기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무척이나 포스트모던적인 레벨 올리기 방식이었다.
“어서 일어나라. 닭이 운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들고,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생활습관에서 비롯하는 법이다.”
“으으. 알겠어요.”
내가 일어났다. 사실 마왕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자도 괜찮았다. 나흘 연속으로 밤을 새도 쌩쌩했다. 요새 며칠이고 밤을 새버렸는지라 오늘 조금 많이 자고 싶을 따름이었다. 채근에 떠밀려서 옷을 갈아입자니, 등 뒤에서 라우라가 섬뜩한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음, 효과가 좋군.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깨워야겠다.”
“…….”
광렙하시겠어요, 라우라.
몸단장을 끝마치고 막사에서 나왔다. 막사 입구에 놓인 세숫대야로 얼굴을 가볍게 씻었다. 새벽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기지개를 쭈욱 핀 다음,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넓은 평원. 수천 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몬스터 부대에는 따로 천막이나 막사가 필요없었다. 모닥불만으로 충분하고 넘쳤다. 몇몇 몬스터는 모닥불조차 너무 덥다고 싫어했다. 그들은 종족마다 구획을 나누어서 자신의 가족과 동료끼리 살갗을 맞대고 잠들었다. 수만 마리의 흐리멍덩한 감정이 내 마음을 적셨다.
나는 몬스터들의 감정을 잠시간 느끼다가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최근 들어서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능숙해졌다. 읽기 싫으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흥분과 같이 지나치게 강렬한 감정은 외면하기 어려웠지만. 뭐든지 익숙해지려면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때 건너편 공터에서 거한이 걸어왔다. 누구인지 따로 짐작할 필요가 없었다. 4미터가 넘는 거인은 오우거를 제외하고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거인이 짐짓 반가워하며 나에게 왼손을 흔들었다.
“아니, 이게 누구인지. 바르바토스 님께서 총애하시는 애첩 아니신가.”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였다. 내가 속으로 으겍 질색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정말 좋은 아침이지. 자네의 얼굴을 보니까 안 그래도 좋았던 아침이 더더욱 좋아지려는 것 같군. 카악! 퉤엣.”
벨레드가 땅에 가래침을 뱉었다. 정말 알기 쉬운 태도였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공개적으로 나를 애첩으로 삼겠다고 선언해버린 그날 이후, 벨레드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해왔다. 세상에서 제일 쪼잔한 로리콘 새끼였다.
“어이.”
벨레드가 허리를 잔뜩 숙이고 얼굴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오우거 멧돼지야. 네 녀석의 로리콘 냄새가 내 몸에 배어버리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
“예. 무슨 일입니까?”
“크흠.”
산멧돼지가 코로 숨을 뱉었다. 뭐지, 이 녀석? 배고픈가? 지금 나한테 밥을 달라고 애교를 떨고 있는 건가? 저기 천막에 훈제인육이 수백 구 있으니까 그거라도 집어먹어라. 이제 와서 나한테 애교를 떨어봤자 곤란할 뿐이다.
“큼. 둘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여기 있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제 심복입니다. 아무쪼록 사양하지 마십시오.”
“아니, 크흠. 여성이 들어서 좋을 게 없어서 그렇다.”
벨레드가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그 정도는 눈치껏 알아차려!”
내가 깜짝 놀랐다. 머릿속이 절반은 근육으로 된 것처럼 보이는 벨레드에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할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니! 논문으로 발표하면 학계가 한바탕 뒤집어질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이 멧돼지는 '눈치'라는 고급 어휘를 사용했다……어쩌면 녀석은 자기 스스로를 하나의 인격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학계에서는 멧돼지를 과연 아인종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심각하게 토의하겠지.
“라우라, 잠깐 벨레드 님과 얘기를 나누겠다.”
“알겠습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우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멀찍이 공터 너머로 걸어가자 벨레드가 얼굴을 더 가까이 갖다댔다. 참고로 녀석의 콧구멍은 내 머리만큼 거대했다. 거기서 뜨거운 숨이 쉴 새 없이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다. 무슨 선풍기 바람이 나오는 줄 알았다.
“야, 너. 그거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큼. 크흐흠, 그게 말이다. 그거다. 그거냐?”
내가 미친 놈 보는 눈빛으로 벨레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눈앞의 오우거-멧돼지 혼혈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특수한 언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지시대명사로 이루어진 언어 말이다. 녀석은 '그거'라는 한 마디로 의사소통을 전부 해내는 것이었다. 하긴 머릿속을 뇌 대신 근육으로 채운 양반이니까 '그거'라는 단어 이상의 언어를 창조하기도 어려울 만했다.
“똑바로 말씀해주세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르바토스 님이랑 잤냐는 말이다!”
아이구야. 두통이 몰려왔다.
천오백 살 넘게 나이를 처먹은 녀석이 누가 누구랑 잤는가 자지 않았는가 물어보려고 말까지 더듬거렸다. 알 거 다 알 양반이 뭐 이렇게 쑥맥처럼 나오시나. 너 참 한심하구나 하는 목소리로 내가 쏘아붙였다.
“그렇게 궁금합니까? 어제도 똑같이 질문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면 벨레드 님이 동정인 줄 알겠습니다.”
“누, 누가 동정이라는 거냐!”
벨레드가 펄쩍 뛰었다. 4미터짜리 거한이 발을 구르니까 순간 땅이 약하게 흔들렸다. 멧돼지도 보통 멧돼지가 아니었다. 얘 하나를 구워잡으면 이만 대군이 사흘은 배부르게 먹겠지.
벨레드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단지 지난 천사백 년 동안 금욕해왔을 뿐이야.”
“……예?”
“바르바토스 님을 영접한 이래로 나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안지 않았다. 그건 바르바토스 님을 향한 내 마음을 모욕하는 짓이기 때문이지.”
벨레드는 몹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씨부리는 것인가, 이 오우거 혼혈아는?
“나는 천사백오십육 년 사십육 일 전에 맹세했다. 바르바토스 님과 내가 만난, 진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지. 바르바토스 님에 대한 나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그날까지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겠노라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벨레드 님, 제가 잘 이해가 안 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뭐냐? 내가 얼마나 남자다운지 막 얘기해주려는 참이거늘.”
벨레드가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내밀었다. 솔직히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말했다.
“요컨대 벨레드 님은……천사백 년 동안 성교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게다가 바르바토스 님과 만난 시간을 년 단위가 아니라 하루 단위로 기억하고 있고요?”
“그래.”
벨레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만큼 나의 마음은 진짜인 것이야.”
“…….”
확신했다. 이 자식은 진짜 또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