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87화 (87/510)
  • 00087 모략의 시대  =========================================================================

    파이몬이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시트리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트리는 방금 전까지 켄타우로스 세 마리와 질펀하게 놀아재끼다가 슬슬 질려서 파이몬을 찾아온 참이었다. 색욕의 대명사인 시트리였으나 파이몬도 어디 가서 꿀릴 위인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파이몬 언니와 함께 음란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볼까 했더니, 웬걸. 파이몬은 조용히 지도만 관찰하고 있었다.

    시트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언니 생각쯤이야 간단하지.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어머나.”

    파이몬이 키득거렸다.

    ‘놀아주지 않으니까 삐진 모양이와요. 귀여워라.’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간이라도 봐볼까, 하고 파이몬이 시트리를 쳐다보았다. 시트리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딴 놈들이 멍청하다 멍청하다 그러지만 내가 이래봬도 서열 제12위의 마왕이라 이거야. 남들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거든.”

    “어머나, 어머나. 우리 시트리가 그렇게 똑똑한 줄 미처 몰랐사와요.”

    “흐흥―. 언니는 그러니까, 그 뭐지? 차두살인을 하려는 거지?”

    파이몬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차두살인이 아니라 차도살인(借刀殺人)이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충분히 전달되었다. 파이몬이 대답하지 않자 시트리는 그걸 말없는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신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그 재수탱이 꼬맹이 년이 인간들이랑 치고박고 싸우느라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우리 산악파는 편하게 진군한다. 그런 거잖아. 그치? 내 말이 맞지?”

    꼭 주인의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네요. 파이몬이 그렇게 생각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사와요.”

    “으, 으응?”

    시트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 해달과 같은 표정이었다.

    “반은 맞고……반은 틀려? 맞으면 맞은 거고, 틀리면 틀린 거 아니야? 으으. 어떻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릴 수 있지?”

    시트리는 일신의 무력과 통솔력으로 고위 마왕까지 오른 자였다. 그런데 고강한 무위에 비하여 지략은 아무래도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일단 전쟁터에 들어가면 언제 멍청했냐는 듯 완벽히 본능적으로 전투를 지배하였으나, 전장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두개골에 혹시 뇌수가 살짝 부족한 것 아닌지 의심을 받기 일쑤였다.

    바르바토스가 지략과 모략을 총동원하여 전쟁터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전사였다면, 시트리는 무력과 본능으로 전쟁터를 지배하는 전사였다. 어느 쪽이든 전쟁보다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한테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라고 파이몬이 생각했다.

    파이몬이 생각하기에 그녀 자신은 군주(軍主)가 아니라 군주(君主)였다.

    “우리 마왕군이 대륙을 정복하고 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응? 마인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파이몬이 웃었다. 순진무구한 대답이 싱그러웠다. 시트리가 뺨을 부풀리면서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파이몬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붉은 눈으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을 고른 다음 부드러우면서도 뚜렷하게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요. 시트리처럼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간직하는 경우는 참 드물어서, 무심코 웃고 말았사와요. 말 그대로 막 피어나는 아가씨는 오랜만에 보는걸요.”

    “…….”

    그것이 진심이 담긴 칭찬임을 알고 시트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얼굴이 화악 빨개졌다. 이런 면에서 언니는 반칙적이야, 하고 시트리가 생각했다. 파이몬은 언제나 성실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같은 성실함은 적어도 마왕의 세계에서 극히 드물었다.

    배신과 모략이 횡횡하는 가운데 파이몬만은 아군과 적군을 분명하게 갈랐다. 아군을 아군으로 적군을 적군으로 대했다. 자기가 인간과 아인종을 사랑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파이몬은 바르바토스와 구분되었다. 바르바토스 역시 아군과 적군이 명확한 인물이었으나, 그녀는 아군의 주인으로 군림하고자 했다. 반면에 파이몬은 아군을 동포로 받아들였다. 그런 차이 때문에 평원파보다 산악파의 인원이 훨씬 많은 것이리라.

    “아, 아무튼! 반 틀렸고 반 맞았다는 게 뭔데!”

    “마인이 살기 좋은 세상. 맞사와요.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인간종에는 그만큼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겠지요.”

    파이몬이 대륙 지도를 손바닥으로 스윽 쓰다듬었다.

    “그렇지만, 봐요. 인간은 이렇게 많사와요. 마왕군이 대륙을 정벌해도 인간을 전부 멸종시키진 못할 거예요. 아마도 인간은 노예로 전락하여 마인의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계층으로 전락하겠지요.”

    “흐음. 그게 뭐 어때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잖아.”

    파이몬이 쓸쓸한 눈동자로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마인을 위한 세상일까요? 시트리.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와요. 그건 마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마왕을 위한 세상이예요.”

    “어?”

    “마왕은 모든 마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사와요. 즉 마왕에게 마인이란 단순한 타자가 아니와요. 타인을 자신처럼 대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마왕……그렇기에 마왕이야말로 마인의 위에 군림하기 적절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마왕도 마인도, 심지어 아인종조차 그것을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설령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마왕이 절대국가를 건설하지 못할지라도, 마왕이 다스리는 절대국가가 만인의 이상향임은 틀림없다고. 이상을 받아들이건 말건 그것이 올바른 방향임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파이몬 또한 그러했다. 사실 누구보다 이상을 신봉했다. 제1차 월맹군에 그녀보다 열성적으로 참군한 마왕이 드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이몬과 바르바토스는 하나의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동지였으며, 거의 모든 마왕이 그러했다. 그러나 제2차 월맹군을 거치면서 파이몬은 의문이 생겼다.

    정말로 그럴까?

    마왕이 다스리는 세계야말로 가장 올바른 형태의 세계일까?

    그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단지 인간종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왕들은 인간 국가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완전무결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인간종은 방해물에 불과했으므로. 그러나 파이몬은 몇 번의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 또한 마인과 그리 다를 바 없음을 목격했다.

    제3차 월맹군에서 이윽고 파이몬은 바르바토스와 충돌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가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뿐이와요. 인간과 마인이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거죠? 바르바토스, 저들도 피를 흘려요. 저들도 괴로워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아요.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와 대화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시발,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바르바토스의 살벌한 눈길에도 파이몬이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관철했다.

    ‘생각해보세요……만약 세상에 우리 마왕과 같은 존재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마왕이 감정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유일하게 인간과 마인을 구분시키는 기준이라면……마왕이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이나 마인이나 똑같지 않을까요? 바르바토스. 이 세계에서 이질적인 존재는 인간종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마왕이 아닐까요?’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날 이래로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결별했다. 마왕의 존재의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파이몬은, 바르바토스 입장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계는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마계에서 살아가는 마인들은 풍요로운 대지에서 평등하게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그 꿈을 짊어지는 자가 바로 마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마계의 염원을 대신하고자 열망했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종이 지워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마왕은 만 백성의 감정을 굽어살펴 정당한 통치자로서 군림한다…….

    반면에 파이몬은 의문스러웠다. 만일 인간종과 마인이 다를 바가 없다면, 이상사회를 세우겠답시고 인간종을 멸망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 진정한 이상사회란 오히려 인간과 마인 그리고 아인종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 아닐까? 현재 세계 간의 갈등에는 마왕이 있었다. 마왕이 있기에 마인과 인간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종으로 여겼다. 진정으로 이상적인 세계란 '마왕이 없이도'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마왕 아래 평등한 세상. 듣기에는 정말로 좋사와요. 하지만 진실은 이러해요. 마왕이 만인 위에 제왕으로 군림하고, 만인 아래 인간종이 노예로 봉사하는 거예요. 그게 정말로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인지, 소녀로서는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

    시트리는 파이몬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가 파이몬의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이번 월맹군에서 우리 산악파는 튜튼 왕국와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맡게 되었사와요. 다행이지요. 바알 님께서 소녀를 일부러 신경 써주신 거예요……바타비아 공화국과 협력할 기회를 주겠다……바알 님께는 항상 신세만 지네요. 이번엔 그분의 배려를 쓸모없게 만들게 되어버렸네요.”

    파이몬이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시트리가 잔뜩 울상을 짓고 파이몬을 바라봤다.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 나 언니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간과 마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려면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사와요. 시트리, 마왕을 중심으로 한 절대군주정이 아니와요. 만인이 주권을 가진 인민으로서 활동하는 국가. 즉 민주공화정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예요.”

    바타비아 공화국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공화국을 채택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도 공화주의 사상은 널리 퍼져 있었다. 파이몬은 공화파와 협력하고 왕정파와 적대할 속셈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인간국가를 이끄는 수뇌부는 왕정파였다. 이번 월맹군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자도 역시 왕정파였다. 마인 쪽도 마찬가지. 전쟁에 가장 적극적인 평원파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군주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파이몬이 내심 비웃었다.

    ‘군주정을 신봉하는 이들끼리 제 살을 갉아먹으면서 싸우는 거죠.’

    마왕군과 왕정파가 신나게 치고박는다. 그 사이에 산악파는 공화파들과 협력한다. 전쟁이 끝난 직후, 마왕군이든 인간계든 군주정 지지 세력은 크게 약화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겨난 틈을 노린다. 마계의 산악파와 인간계의 공화파가 협력하여 단번에 정세를 역전시킨다!

    차도살인지계.

    시트리의 추측은 그렇기에 반만 맞았다. 인간과 평원파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만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왕정파와 평원파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3황녀에게 월맹군에 대한 정보를 넘겨준 이유도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이상, 제3황녀는 정통 후계자인 제1황자에게 군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군권을 잡은 황태자가 경쟁자인 황녀를 가만히 두고볼 리 없었다. 그렇다면 황녀는 어떤 수단을 취할 것인가……파이몬은 대략적으로 그녀의 선택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바로 그 선택을 황녀가 취하도록 파이몬은 유도할 계획이었다.

    파이몬이 양피지 지도를 돌돌 말았다.

    “어려운 얘기는 이쯤으로 해두겠사와요. 시트리, 오랜만에 저희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볼까요?”

    “응? 아, 응. 히히. 오늘은 나한테 맡겨, 언니. 내가 언니 천국으로 보내줄게.”

    시트리가 그 말만 기다렸다는 기세로 파이몬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침대에 파이몬을 눕혔다. 파이몬이 웃었다.

    “어머나. 소녀는 난폭한 건 싫은데…….”

    “언니가 난폭함의 진면모를 몰라서 그래. 지금부터는 날 주인님이라고 불러.”

    “역할극인가요? 그것도 좋죠. 주인님. 부디 소녀를 상냥하게 대해주시와요.”

    “어허. 어디서 감히 미천한 하녀가 상냥함을 바라는 것이냐! 고귀한 육봉을 네 년의 더러운 보지에 박아주는 것만으로도 황공히 여기거라.”

    시트리가 옷을 제대로 벗지도 않고 애무를 시작했다.

    절묘한 손길을 느끼면서 파이몬이 생각했다. 인간군과 마왕군이 조금 더 치열하게 싸우기를 바랐는데, 단탈리안, 그 남자가 기묘한 수작을 부렸다. 설마 이천 정도의 병력으로 검은 산맥을 완전히 돌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단탈리안이라는 마왕을 조심하라고 인간군에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정보를 흘릴지 고민하면서, 그녀가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자, 잠깐만요. 흐윽, 너무 강해요! 주인님, 조금만, 읏, 약하게……!”

    “닥쳐. 후우. 아랫입은 이렇게 젖었으면서 정직하지 못하군 그래.”

    “으읏, 흐아아앙!”

    ……일단 이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고민해야겠다. 파이몬은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소설 설정란에 대륙 지도를 올려두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