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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86화 (86/510)
  • 00086 모략의 시대  =========================================================================

    “후퇴한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말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본 드래곤이 비추었다. 붉은 산돼지 기사단 백 명이 폰 로젠베르크의 한 마디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아무런 의문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부관이 말했다.

    “각하, 바르바토스입니다. 월맹군이 거의 확실하군요.”

    “효율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뼈의 군주를 이끌고 왔다.”

    백작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말발굽 소리에 묻힐 만큼 목소리가 작았으나, 일반적인 인간에 비해 오감이 월등하게 발달한 기사단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효율이 아니라 명분을 노린다. 명분이 필요한 전쟁에 바르바토스가 끼어들었다.”

    “과연. 그렇기에 월맹군이라는 말씀입니까.”

    “황제 폐하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부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서 제대로 대응하시겠습니까?”

    “중앙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허나 제도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지. 그분께서 군권을 장악하실 필요가 있다.”

    부관이 눈을 크게 떴다.

    “폐하께 보고하기 전에 황태자 전하한테 보고하라는 말씀입니까?”

    “세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고한다. 세 시간이면 황태자 전하께서 중앙군 사령부와 접촉하시기에 충분해.”

    변경백. 국경을 수호하는 대가로 변경백 가문에는 막대한 자유가 허락되었다. 그들은 국법이 허락하는 수준 이상으로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고, 각종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한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제국 중앙에서는 변경백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경백이 지난 오백 년 동안 반란의 혐의를 입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변경백은 언제나 정통 후계자를 지지했다. 황태자가 인성이 아무리 쓰레기 같아도, 무능력의 극치일지라도, 변경백들은 황태자를 제1계승권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지했다. 이렇게 시종일관 처신함으로써 변경백은 중앙의 정치 싸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제3황녀 전하가 실각하겠군요.”

    “황녀 전하가 아니다. 에바트리에 백작이지.”

    로젠베르크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1황자, 제국의 황태자는 제 아비를 닮아서 무능했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인격이 글러먹었다. 극소수의 고위 귀족들끼리 공유하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제1황자가 동생들과 함께 자신의 누나를 강간했다는 것이었다. 연이은 강간 끝에 황태자의 누이, 제1황녀는 자살하고 말았다. 세간에는 병들어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부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 합스부르크 제국은 멸망할까요?”

    “멸망할 수도 있겠지.”

    중앙의 문벌귀족이 대화를 엿들었다면 경악했으리라. 당장 황족모욕죄와 국가모반죄가 적용되어 삼대가 멸문해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관도 로젠베르크 백작도, 백 명의 기사 중 어느 누구도 눈썹을 찌푸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제국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제국이 살아남는 길이다. 에바트리에 백작이 황태자 전하를 추월하여 황위를 찬탈한다. 제국은 혼란에 빠지겠지만 어렵사리 재생할 것이다. 단, 이 경우 우리 변경백은 멸문한다.”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제국이 멸하는 길이다.”

    로젠베르크 백작이 어디까지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황위를 이어받는다. 제국은 내부에서 썩어 문드러져 이윽고 쓰러지겠지. 그러나 우리 변경백은 끝까지 국가에 반역하지 않았다는 명분, 오로지 인류의 수호에만 주력한다는 명분을 얻는다. 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어도 우리의 진심은 인정받겠지.”

    제국의 미래인가. 아니면 가문의 미래인가. 혹은 인류의 미래인가……부관이 고민하면서 말했다.

    “만에 하나 에바트리에 백작이 정권을 잡으면, 각하께선 어쩌실 생각입니까?”

    “반역자의 가문으로 취급될 바에야 차라리 장대한 최후를 연출하는 편이 좋겠지.”

    백작의 회색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다른 변경백과 연합하여 검은 산맥 너머를 공격한다. 꼼짝없이 포위되어 섬멸할 것이다. 하지만 변경백 가문은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인류의 수호자로 남는다. 그때는 그대들에게도 신세를 지게 되겠지. 멸문해도 좋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어차피 단 한 번의 인생이다. 화려하게 멸문하는 것이다.”

    *  *  *

    금발의 청년. 일찍히 적색 산성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낡은 마구간에 들어갔다. 도시 외곽에 있는 마구간은 다 낡아서 누구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위장이었다. 그곳은 한 단체의 회원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 거점이었다.

    청년이 건물 구석에 숨겨진 수정구를 꺼냈다. 주문을 외우자 수정구가 밝아졌다. 잠시 후, 수정구에서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빛은 얕은 장막을 형성하면서 그곳에 한 명의 여인을 투영했다.

    청년이 말했다.

    “누님. 폰 로젠베르크가 귀환했어요.”

    “지금 방금?”

    “어,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대충 이십 분은 지났죠.”

    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황녀 전하께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 결국 폰 로젠베르크는 망나니를 섬기기로 작정한 모양이네. 구시대의 유물다운 행동이야.”

    “어, 음……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요.”

    여인이 찌릿 하고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이 곤란하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그.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하아……. 황녀 전하께선 일단 기마대와 함께 행동하라고 명하셨어.”

    “서, 설마 월맹군이랑 싸우라는 명령은 아니겠죠?”

    청년이 그건 제발 좀 봐주라면서 애원조로 말했다.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고작 기마병 백 명으로 뭘 하겠니. 월맹군은 적색 산성을 넘어서 대륙 북방을 휘저을 거야. 당연히 유민이 발생하겠지. 그 유민을 규합해서 의용군을 만들어. 너는 이제부터 의병장이 되어 활동해야 돼. 거기에 필요한 자금은 일주일 안에 준비해주겠어.”

    “아니, 누님. 어디 의병장이 아무나 하나요?”

    청년이 울상을 지었다.

    “민초를 이끌려면 어느 정도 명성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명성이라고는 동네 암캐보다 없는걸요. 게다가 패장이에요, 패장. 적색 산성을 잃어버린 패장.”

    “신분을 위장하면 간단해.”

    “예?”

    여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너랑 기마대 빼고 산성 수비군이 모조리 몰살되었다면서. 그러면 신분 하나 위장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거기 수비군에서 대충 유명했었던 사람 이름을 빌려서 활동해. 적색 산성에서 유일하게 부하를 이끌고 생존한 역전의 명장. 그런 인상으로 밀고나가면 되겠네.”

    “…….”

    청년이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러게요. 그러면 되겠군요. 음, 기마대한테는 의용병을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인의 이름을 빌린다고 설명하면 되겠고요. 이게 결국 수비군의 복수로 이어질 거라고 덧붙여주면 어렵지 않게 설득되겠네요.”

    “그래. 누구 마음이 동하는 이름이 있어?”

    “쿠르츠.”

    청년이 멋쩍게 웃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로 할게요.”

    “적색 산성 지휘관-대리? 뭐, 적당하네. 자금 전달할 때 신분증도 같이 줄게. 네 성격에 비해 이름이 조금 너무 귀엽긴 하지만.”

    “너무해요. 제 성격이 뭐 어떻다고…….”

    여인과 청년. 두 사람은 황녀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제국의 존립과 황녀의 패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에게는 이름과 신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상인이 되었고 연금술사가 되었으며 암살자가 되었다.

    “가증스럽게 순진한 척하지 마. 어차피 적당한 때에 처리할 생각이었잖아?”

    “그야 그렇지만요……아까웠어요.”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황녀 전하에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제국의 주인에 충성하지 않는 군인은 안타깝지만 배제할 수밖에 없지요.”

    그가 중얼거렸다.

    “마침 월맹군이 적절하게 움직여줘서 다행이지 뭐예요. 덕분에 제가 움직이기도 전에 수비군이 전멸했어요. 음, 자칫 잘못했으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혼자만 후미에 남아서 희생할 뻔했지만요. 적이 월맹군 선봉이라는 사실을 슬쩍 알려주니까 글쎄……다들 남아서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여인이 질린 눈빛으로 청년을 쳐다봤다.

    “결국 말 한 마디로 수비군을 다 죽인 거잖아. 하여간 음흉하기 짝이 없어요.”

    “그,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그들이 죽음을 자처한 거죠.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가지 말아주세요…….”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보기에 청년은 겉은 멀쩡해도 근본부터 썩어 있었다. 하지만 유능했다. 황녀 전하에게 진심으로 충성했다. 능력과 충성심만 있다면 인성의 하자쯤이야 봐줄 수 있었다.

    “아무튼 수고했어. 앞으로도 조금만 더 수고해. 폰 로젠베르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변경백의 군대가 월맹군에 의해 난전을 면치 못하고, 군권을 장악한 황녀 전하께서 등장하여 일거에 사태를 해결한다라……변함없이 황녀 전하께서는 능숙하시네요. 난세의 간웅이란 황녀 전하를 위한 단어예요.”

    “뭐, 그렇고 그런 거지. 괜히 어디서 칼빵 맞지 말고 잘 지내려무나.”

    여인이 수정구에서 사라지려는 것을 청년이 붙잡았다.

    “아, 누님. 잠깐만요.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황녀 전하 말이예요. 어떻게 월맹군이 침공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일찍 아셨어요?”

    청년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상해요.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요. 저희 그림자가 유능하긴 해도 마왕군에 첩자가 있지는 않은데.”

    “쿠르츠.”

    “네?”

    여인이 싱긋 미소 지었다.

    “신경 꺼. 알면 다쳐.”

    수정구에서 빛이 꺼졌다. 마구간이 적막해졌다.

    청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월맹군 제6군단이 검은 산맥의 통로를 점령.――소식은 빠르게 마왕군 전체를 강타했다.

    아직 절반도 넘는 군단이 출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제6군단이 일찌감치 대륙 침공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자존심 드높은 마왕들에게 썩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늦장을 부리던 마왕들도 서둘러 군대를 준비했다.

    제2군단과 제3군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병식을 치렀다. 제4군단은 후방 지원이 임무였기에 조용했다. 제5군단은 단 두 명의 마왕으로 이루어졌기에 요란한 출병식 없이 출진했다. 바알이 단독으로 구성한 제7군단을 제외하고, 이제 남은 것은 제1군단.

    파이몬이 이끄는 산악파의 군단이었다.

    그녀는 유심히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서는 산악파에서 파이몬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서열 제12위 시트리가 쫑알쫑알 떠들고 있었다.

    “아, 언니. 진짜 애들이 열받게 한다니까. 산악파는 쪽수만 많아서 움직임이 둔하나느니, 마계의 자존심은 어디 갖다 팔았냐느니. 녀석들 후장을 쪽쪽 뚫어주고 싶더라.”

    시트리는 성욕이 괴상하기로 유명했다. 우선 그녀는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를 전부 가졌다. 본래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정교한 수술을 거쳐서 남성의 생식기까지 가지게 되었다. 여기까진 크게 흠 잡힐 일이 없었다. 시트리처럼 일부러 양성이 된 경우는 마계에서 꽤나 비일비재했다. 문제는 그녀가 고블린이고 오크고 종족을 가리지 않고 성교하길 즐긴다는 것이었다. 환락에 너그러운 마인들도 여기에는 질색했다.

    마계에도 몬스터에게 박히기를 좋아하는 마인은 남녀를 불구하고 많았다. 그러나 몬스터에 박는 것을 좋아하는 마인은 과연 극소수였다. 여기에 대해 시트리는 ‘박히는 자, 응당 박기 또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것’이라고 발언함으로써 현재 마계의 세태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물론 시트리의 비판은 마인 사회를 경악시키는 것 이외에 어떠한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언니! 내 얘기 듣고 있어?”

    “그럼요. 제가 시트리를 왜 무시하겠사와요.”

    시트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난 가끔 언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월맹군이 결성됐다는 얘기를 인간들한테 몰래 알려줘서 얻을 게 뭐야?”

    “얻을 거라.”

    파이몬이 방긋 웃었다.

    “많죠. 아주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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