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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85화 (85/510)

00085 인류의 번견  =========================================================================

*  *  *

적색 산성에 무혈입성한 지 사흘이 지났다.

멀찍이서 기사단이 몰려와 있었다. 붉은 산돼지 기사단. 합스부르크 제국의 북방군을 총괄하는 두 명의 변경백, 그중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가 거느린 기사단이었다. 폰 로젠베르크 백작은 꽤나 성가시다. 게임에서는 시시각각 주인공 용사와 대립각을 내세웠다.

‘마왕을 섬멸하는 것은 국가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사명이다. 결코 개인의 공훈이 아니다.’

폰 로젠베르크의 주장이었다. 그는 용사 한 명에 기대어 마왕들을 격파해버리면 인간들이 더 이상 전쟁을 자기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게 되리라 염려했다. 대륙의 만민이 용사 일행에 환호할 때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위험성을 경고했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이 그 대표주자였다.

‘제국은 현재 지나치게 영웅주의에 심취해 있다.’

모난 소리를 하는 사람은 돌을 맞기 마련.

용사 일행이 착실히 마왕들을 단독 격파해나가는 사이, 제국 변경백 군대는 한 명의 마왕조차 죽이지 못했다. 군대는 대체 뭘 하고 있느냐. 용사의 눈부신 위업에 질투를 품고 영웅주의 운운하는 것 아니냐. 그같은 비난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오백 년 가까이 대륙의 북방을 수호해온 백작가 입장에선 더없는 모욕이겠지.

결국 변경백들은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켰다. 방어적인 전략을 버리고 도리어 검은 산맥 너머로 원정을 감행한 것이었다.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여 과거의 명성과 위엄을 되찾는가 싶었으나,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와 서열 제4위의 마왕 가미긴을 주축으로 한 동맹군에 의해 싸그리 전멸당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인간계는 더더욱 혼란에 휩싸였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 제국과 인류를 지킨다는 사명감, 실질적인 군세……여러모로 벅찬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저 자와 격돌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아가레스와 가미긴한테 전멸당하긴 했어도, 달리 말해 저 자를 전멸하려면 서열 제2위와 서열 제4위 정도가 공동전선을 펼쳐야 한다는 얘기였다. 우리 마왕군은 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성문 밖으로 출격하지 않았다.

“기사단이라 해봤자 고작 백 명 아닙니까. 한판 붙어볼 만합니다.”

유일하게 아미가 한소리 했다. 아무래도 작전이 대성공하자 실력에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귀염둥이에게 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기사는 한 명이 오우거에 버금갑니다.”

“하, 한 명이?”

“저기엔 오우거가 백 마리 있는 셈이지요. 뭐, 저중 절반은 견습기사일 테니까 오우거 일흔 마리라고 해둘까요. 놈들이 저기서 알짱거리는 이유는 우리를 유인해내기 위해서입니다. 평야에서 오우거 일흔 마리와 회전을 벌이고 싶다면 얼마든지 응원하겠습니다, 아미 동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의 뼈는 제가 주워드리지요.”

아미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기사단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기사단은 이해하겠는데 왜 날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걸까. 세상에는 불가사의가 참 많다.

불평불만은 그걸로 끝이었다. 백 명의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도 월맹군 선봉군은 산성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고작 이천의 군세로 녹색-청색-황색-적색을 닷새만에 점령했다. 월맹군 역사상 최고의 진군속도였다. 그 무공에 신출내기 마왕들은 얌전히 제파르 대장의 명령에 따랐다. 평원파 수뇌부들에게 눈도장 찍을 만한 공을 충분히 세웠으니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 계산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기사단과 신경전을 벌인 게 이 날로 사흘째.

제파르 대장이 말했다.

“오늘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왕림하신다.”

우리는 다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여라도 기사단이 공성전의 불리를 무릅쓰고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탓이었다. 그날 오후, 일만칠천의 몬스터 본대가 산성에 입성했다. 일만칠천 마리의 몬스터가 대열을 맞추어 진군하는 광경은 과연 장관이었다.

우리는 모두 성문 바깥까지 나가서 본대를 마중나갔다. 그러자 본대의 수뇌부가 다가왔다. 검은 망토를 나부끼면서 척척 걸어오는 모습이 마피아 패밀리를 연상시켰다.

가운데에 신장이 4미터에 이르는 거한이 있었다. 그가 바르바토스 다음으로 평원파에서 순위가 높은 서열 제13위의 마왕 벨레드였다. 꼭 화난 것처럼 인상을 구겼는데 원래 표정이 그랬다. 본인이 말하기로는 인간계나 너무 싫어서 발자국만 들여놓아도 저절로 인상을 쓰게 된다는데, 달리 말해 자기가 천하의 또라이 새끼임을 은연 중에 밝히는 것이었다.

“수고했네, 제파르 선봉장.”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면서 거인 벨레드가 말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와주었군.”

“경이 앞길을 닦아주어서 유람이라도 나온 기분이었지. 군단장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지. 기뻐하게. 자네는 명실공히 군단장 각하의 부하 제2호이니까.”

“……제2호?”

제파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귀가 잘못됐거나 아니면 자네의 입이 삐뚫어진 모양이로군. 나 제파르는 분명히 군단장 각하의 부하 제1호이다.”

“웃기는 소리. 바르바토스 님의 부하 제1호는 자네가 아니라 본인이지. 자네는 이제 이천 살이 될까말까한 꼬맹이지만 본인은 이천사백 살이 넘었어. 자네가 태어나기 사백 년 전부터 나는 바르바토스 님을 추종했지. 크흥.”

거인 벨레드가 코웃음을 쳤다.

“부하 제1호를 자처하기에는 사백 년이 일러, 꼬맹이 제파르.”

“무슨 쉰소리를 지껄이는가 싶었더니 나이 자랑인가. 자고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이다. 군단장 각하를 향한 내 충심은 사백 년 따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일만 년 하고도 이천 년은 초월할 마음이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왼손으로. 손등에 혈관이 부릅 튀어나왔다.

“이 겉늙은이 꼬맹이가――.”

“덩치만 산만한 돼지 놈이――.”

다른 마왕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인지 다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얼른 산성에 들어가서 쉬고나 싶다. 그런 의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 감상을 말하자면, 글쎄. 저 치들이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숨쉬는지 약간 이해하기 어려웠다. 월맹군이 왜 일곱 차례나 망했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서열이야 어떻든 간에 외양이 열두 살짜리 소녀였다. 요컨대 저 두 마왕은 누가 열두 살짜리 소녀의 충실한 팬이냐를 두고 열렬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로리콘들이었다. 평원파의 최고 수뇌부가 로리콘 집단이라니. 인간들이 들으면 그거 대단한 농담이라고 폭소하지 않을까.

……마음 어디에선가 정작 그 로리와 떡을 친 사람은 누구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했다. 그걸 인정해버리면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품격이 한참 떨어져버릴 것 같았다. 뭐, 이미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지.

제파르가 말했다.

“됐다. 우리는 자네 같은 산멧돼지를 마중하러 나온 게 아니다. 군단장 각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흐음.”

벨레드가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얼굴을 더더욱 구겼다. 이쯤되면 저것이 면상인지 알루미늄 김밥 포장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바르바토스 님께서는 십팔 초 뒤에 도착하신다.”

“십팔 초?”

“이제는 십육 초이지.”

“……아아. 그렇게 왕림하시는 것인가.”

무언가 알아들었다는 듯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중에 벨베드의 말을 이해한 것은 제파르뿐이었다. 아미가 물었다.

“각하. 십팔 초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음, 그대는 신입이라 모르겠군. 이제 십 초 남았다네.”

하고 제파르가 손가락으로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손짓에 이끌려 마왕 전원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푸른 하늘에 까만 점이 생겼다. 점은 순식간에 입체적으로 커졌다. 아니, 거대해졌다. 그것은 뼈로 이루어진 드래곤이었다.

“뼈, 뼈의 군주!”

아미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소리만 내지 않았을 따름이지 깜짝 놀랐다. 본 드래곤이라니, A급을 뛰어넘어 S급 몬스터였다! 녀석은 웬만한 하위 마왕쯤은 점심 끼니로 때울 만큼 강력했다. 몬스터들이 공포에 떨어대는 감정이 내게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심지어 오우거도 전신을 부들거렸다.

드래곤이 우리 바로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먼지 폭풍이 휘몰아쳤다. 나는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칫 발에서 힘을 뺐다가 당장 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마왕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갔다. 그렇게 생겨난 맨땅에 드래곤이 천천히 착지했다.

날개짓이 멈추었다. 먼지구름이 사방을 뒤덮었다. 갈빛 먼지 너머로 드래곤의 거대한 그림자만이 어렴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위에서 누군가가 드래곤의 뼈를 밟으면서 내려왔다.

바르바토스.

서열 제8위의 마왕이었다.

“아아. 미안, 미안.”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그녀가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내가 약간 늦었지? 분명히 한 시에 깨워달랬는데 말이야, 시발. 그 멍청한 집사 새끼가 한 시간이나 늦게 깨우지 뭐야. 늦을까봐 존나 후달렸다니까.”

어디까지나 가벼운 말투. 그러나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열여덟 명의 마왕, 일만팔천오백의 몬스터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땅이 진동했다.

“군단장을 뵈옵니다!”

열여덟 명의 마왕이 소리쳤다. 바르바토스가 고운 이마에 눈썹을 찌푸렸다.

“생지랄을 해요. 일어나. 너희가 그러면 조금이라도 예뻐 보일 줄 아냐? 아, 물론.”

바르바토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쳐다봤다. 그녀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주아주 가끔이지만 예쁜 녀석이 있긴 하지. 야, 제파르. 너 임마 한 건 했다? 응?”

“황송하옵니다. 각하.”

“짜식. 너 제6차 월맹군에서 존나 무식하게 돌격할 때가 어제 같은데! 깔깔깔!”

바르바토스가 웃으면서 제파르의 등을 세게 두들겼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때릴 때마다 제파르가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여기서 제6차 월맹군 기억하는 년놈? 야아, 그때 장관이었지. 웬 애송이가 인간놈들 기사단을 향해 닥돌하는데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 새끼가 얘야, 얘. 서열 제16위,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봉대장 제파르!”

마왕 여럿이 낄낄 웃었다. 본 드래곤의 등장에 적막해진 분위기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기사단도 어디 보통 기사단이어야지. 브르타뉴 왕국의 초록장미 기사단이었어요, 그게 또. 천하의 나도 그 돌격을 보고는 입이 떠억 벌어졌거든. 그리고 깨달았지. 와, 존나 저 새끼 또라이 중에 상또라 새끼구나. 시발, 병신 같지만 졸라 멋있다.”

마왕들의 웃음소리가 한층 거세졌다. 졸지에 놀림거리가 된 제파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파르의 근엄한 모습만 봐온 나로서도 거기엔 폭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벨레드가 험상궂게 물었다.

“그래서 돌격은 성공적이었습니까?”

“내가 말했잖아, 병신 같지만 멋있다고. 깔깔! 멋있긴 해도 병신은 결국 병신이거든. 아 완전 대차게 말아먹었지 뭐야. 너희 그거 아냐? 이 새끼가 그때 거기서 병력을 죄다 꼴아박아서 지금까지도 오우거가 스무 마리밖에 없어요. 서열 제16위 새끼가 오우거 스무 마리리야!”

바르바토스가 장난스럽게 제파르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하, 내가 쪽팔려서 어디 이 놈이 우리 평원파에서 세 번째로 강한 놈입니다 하고 자랑이나 할 수 있겠냐. 응? 으이구, 병신 또라이야. 그때 왜 그랬어? 이제 말해봐, 짜샤. 오백 년 동안의 수수께끼를 오늘 한번 풀어보자.”

제파르가 대역죄인처럼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딸도 아니고 손녀뻘의 소녀가 장난을 치는데 영락없이 당하는 모양새였다. 주변에서 또 다시 폭소가 터진 것은 물론이었다.

웃음기가 잦아들자, 바르바토스가 품에서 부채를 꺼내들어 부쳤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제파르, 서열 제16위의 마왕은 단연코 우리 평원파에서 자랑하는 전사라고. 닷새만에 검은 산맥을 돌파하는 위업을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이 제파르가 이루어냈다고.”

“……각하.”

제파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너는 작게는 개인의 영광을. 크게는 월맹군의 위엄을 바로세웠다. 이번과 같은 대업에서 첫 출발을,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잘 끊어주었어. 나의 동지들이여. 여기 제파르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거인 벨레드마저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제파르가 군례를 올림으로써 답례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바르바토스는 제파르에게 공훈에 대해 마땅히 보상을 내릴지니. 천이백 년 간 나와 함께한 동지, 뼈의 군주를 제파르에게 하사하노라.”

“……! 가, 각하!”

제파르가 경악했다. 그만 놀란 게 아니었다. 마왕 전원이 헛숨을 들이켰다. 벨레드에 이르러서는 턱이 빠질 기세로 입이 벌어졌다. S급 몬스터의 가치는 감히 값을 매길 수가 없었다. 그것이 보상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소인의 미약한 군공에 반해 지나치게 과한 보상입니다!”

“이론은 받지 않겠어.”

바르바토스가 엄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이번 전투에 참여한 베파르, 발람, 무르무르, 아미에게도 각기 일만 골드를 하사한다. 이외에도 월맹군이 끝나는 그날 공훈에 따라 적절하게 보상 받을지어다.”

“화, 황공하옵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불린 마왕들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과연 바르바토스였다. 그녀는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군령을 세우고 있었다. 군령의 기본은 신상필벌. 마왕들의 자존심이 제아무리 태산을 우습게 여긴다한들 눈앞에서 S급 몬스터가 하사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 없었다. 욕심 때문에라도 바르바토스의 명령에 따르겠지.

저번에 우리는 과거의 월맹군이 패배한 이유를 논했다. 월맹군이 성공하고 난 이후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한 걱정, 그것 때문에 월맹군은 내부에서 분열했다. 그런데 여기서 S급 몬스터를 취할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설령 인간계가 정복되더라도 충분히 살아남을 여력이 생긴다. 실리적인 목적이 부여되는 것이다. 마왕들은 필사적으로 바르바토스의 은혜에 구애하게 되리라.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지.”

바르바토스가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단탈리안. 내 친애하는 친구.”

주변에 선 마왕들이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친구. 바르바토스가 누군가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본 드래곤이 하사되었을 때보다 더한 경악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이렇게 주목을 받는 것은 딱히 달갑지 않은데.

“제파르가 실행자이고 그대는 계획자였지. 천 년 동안 우리 월맹군을 지독히도 괴롭힌 검은 산맥이 그대의 손안에 놀아났어. 어떤 찬사를 그대한테 바칠까? 어떤 보상이 그대에게 어울릴까?”

저 녀석, 일부러 말투를 저 따구로 쓰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다른 마왕이 경악하면 경악할수록 녀석의 가학심이 충족되겠지. 심술궂은 로리 년! 네 녀석은 새디스트에 싸이코다.

내가 침을 삼키면서 미소 지었다.

“……과찬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깔깔. 마왕들이 너처럼 자기 할 일을 했으면 인간계가 진즉에 다섯 번은 정복됐을걸. 자, 가까이 와봐. 가까이.”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별 수 없이 녀석한테 다가갔다.

“본래대로라면 훌륭한 병사를 하사하거나 거금을 내려줘야 마땅하나, 어쩌나. 내가 그러기가 싫은데. 단탈리안 얘가 요새 너무 잘 나간다 이 말이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아주 내가 샘이 날 지경이야.”

“…….”

바르바토스가 예의 성격 나빠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더더욱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내리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아. 어쩐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 그리고 역시 내 머리는 천재적이라고 할까, 딱 좋은 상이 떠올랐지 뭐야. 단탈리안.”

“어?”

그녀의 양손이 내 머리를 잡았다. 어째서인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기기 어려울 정도의 힘이 내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여린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두 번째.

두 번째였다! 또 당했다!

이번에도 혼란에 빠질 내가 아니었다. 입술이 닿은 상황에서 내가 눈을 확 부라렸다. 바르바토스도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확신범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순식간에 말없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 너 이걸 어떻게 감당할 거야!

─ 왜? 싫냐?

─ 이 여파를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 몰라. 대충 살아. 입맞추고 싶으면 맞추는 거지.

─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야!

─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혓바닥이나 좀 내밀어.

죽음과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적당히 입술을 떼고 싶었으나 도저히 바르바토스의 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전세계 키스대회가 열린다면 볼 것도 없이 그녀가 우승후보였다. 장담해도 좋았다. 제기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한테서 풀려났다.

바르바토스가 개운하다는 듯 숨을 쉬었다.

“후우. 내 입맞춤이 보상이야. 시발 어때, 죽이지?”

그래. 죽여준다. 진짜 낱말 그대로 죽여줘.

내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의 종말을 마주한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근엄은 어디 팔아먹었는지 십수 명의 마왕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충격을 먹으면 말도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 싱글벙글 떠들어댔다.

“아, 동지들. 보다시피 내가 얘 찜했거든? 미리 침 발라뒀다. 혹시라도 누가 뺏으려 들면 내가 친절하고 자상하게 두들겨패줄 테니, 나랑 다이다이깔 자신 있는 새끼만 등판해. 오늘부로 단탈리안은 내 첩이야.”

누가 누구 마음대로 첩이냐!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겨우 미소를 지었다.

문득 어디선가 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파르와 벨레드가 실로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누구 한 명 비틀어버릴 기세였다. 아무래도 난 로리콘 양반들에게 단단히 찍힌 것 같았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한숨이나 쉬는 수밖에.

============================ 작품 후기 ============================

─ 챕터 <인류의 번견>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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