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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84화 (84/510)
  • 00084 인류의 번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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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당초 이천 명이었던 인간군은 이제 천 명 정도가 남아서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병력을 놓고 보면 5할이 전멸했다. 궤멸이라 표현해도 좋았다. 여기에 더해서 적군은 사방이 포위된 상태. 저들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럴 터인데…….

    “끈질기군.”

    제파르가 재미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이었다. 인간군은 사냥개처럼 끈질겼다. 이쯤 되어서야 자기네가 된통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헌데도 절망적인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사태가 호전되리라 기대하는 걸까요?”

    서열 제58위의 아미가 불만을 이어받았다. 그는 전방의 오백인대를 이끌다가 우리와 합류했다. 제국군을 여기까지 유인해내는 미끼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이번 전쟁의 공로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어서 무훈을 올려야 한다는 조바심이 사라진 것일까. 아미는 예전에 비해 성질이 많이 죽었다. 다만 가끔씩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무섭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나쁜 남자로군, 아미. 그렇게 노골적으로 두려워하면 오히려 내가 상처받는다. 이래봬도 나는 마계 제일의 상냥남이다. 너무 피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내가 말했다.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겠지요.”

    “의도를 간파했다고?”

    제파르가 반문했다. 반면에 아미는 어깨를 움찔거리면서 살살 시선을 피했다. 또 그런다. 정말로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별 수 없다. 신출내기 마왕 전하들과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진득하게 얘기를 나눌 수밖에.

    “우리가 월맹군 선봉대임을 짐작한 것 아니겠습니까. 적색 산성을 넘겨줄지언정 조금이라도 발목을 붙잡겠다, 그런 의지를 불태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절망적이나 희망은 남았다는 것인가.”

    제파르가 예의 무표정하고 위엄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는 그들에게 제파르 나름대로 호감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인가…….

    “마치 판도라의 항아리 같군요.”

    마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이 세계에는 판도라 신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 전쟁도 슬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시간이나 때울 겸 이야기라도 풀어볼까.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삶을 버틴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다. 고대의 신화 작가는 되레 그것을 비꼬아서 <판도라의 항아리>라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사실 희망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신이 장난 삼아 만든 항아리에 꼭꼭 숨겨져 있다. 그것도 모른 채 인간들은 희망을 희구하며 마치 희망이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삶의 먼지를 기꺼이 들이마신다고…….

    “희망 그 자체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재앙이라는 얘기로군.”

    제파르가 약간 감탄한 어조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희망에 대한 찬가 따위가 아니었다. 희망 자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재앙임을 경고하는, 적잖게 시니컬한 신화 작가의 비웃음이었다.

    마왕들의 감수성에 잘 들어맞았는지 다른 이들도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웃고 있었다. 아이구야, 역시 마왕들은 하나같이 삐뚫어진 싸이코 새끼들이었다. 이런 작자들과 아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련지. '나의 착한 아들이, 이렇게 질 나쁜 깡패들이랑……' 하고 눈물을 흘리실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곤란했다. 근묵자흑이라 그랬다. 혹시라도 이 작자들에게 순진무구한 내가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들에게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가지는 것이 허락될 정도로 허약한 재앙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내가 키득거렸다.

    “마왕이야말로 재앙 중의 재앙이 되어야 하는 법, 희망 따위에게 뒤져서야 군단장 각하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호오. 단탈리안, 자네에게 좋은 수가 있는가?”

    제파르가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 양반, 얼굴에 위엄이 깃들어 있어서 알아차리긴 어려워도 상당한 변태였다. 어머니가 한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별 수 없었다. 그는 내 상사였고 나는 가련한 부하직원이었다. 얌전하게 명령을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

    “송구하오나 이런 때가 있을까봐 숨겨둔 한 수가 있습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용서해주신다면 그 한 수를 드러내볼까 합니다.”

    “좋다. 이번에 한하여 무엇이든 용서하겠다. 자네의 한 수가 무엇일지 흥미 깊다. 제군도 궁금하지 않은가?”

    제파르가 주변에 동의를 구했다. 발람과 아미 등 다른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나의 행동을 용납하는 것은 제파르 개인이 아니라 선봉대 사령부 전원이 되어버렸다. 능숙하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신출내기 마왕들은 알고 있을까? 방금 고개를 한 번 끄덕임으로써 제파르의 약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겠지. 영원히 모를 거다.

    이빨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아미가 또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 태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게 재밌었다. 점점 중독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불효자는 벌써 나쁜 물에 아주 약간 물들었습니다…….

    비장의 한 수란 물론 바르바토스에게 건네받은 <죽음의 기사>였다. 이들은 평상시에 영체(靈體)가 되어 나의 주변을 맴돌다가 내가 지시하면 곧바로 몸을 드러냈다. 열두 명의 흑기사가 등장하자 마왕들이 자그맣게 탄성을 내질렀다. 죽음의 기사는 오우거에 버금가는 무력을 자랑했다. 그런데도 체구는 인간만큼 작고 은신이 자유로우니 오우거보다 뛰어난 병종임에 분명했다.

    “훌륭하다! 사자는 전력을 다할지라도 발톱 하나를 숨겨둠인가.”

    제파르가 손뼉을 쳤다. 그런데 목소리가 열띤 것에 반하여 눈이 매서웠다. 아군에게 전력을 감추어 보존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죽음의 기사를 내보였다면 산성을 보다 쉽게 공략했으리라. 약간 과장하면 이적행위나 진배없었다.

    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적의 마지막 발악을 감히 제가 끝장내고자 합니다.”

    “좋겠지. 허락한다.”

    나는 곧바로 라우라를 시켜서 적의 지휘부를 일격에 섬멸할 것을 주문했다. 죽음의 기사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굳이 라우라를 거친 까닭은, 이래야 경험치가 라우라한테 몰빵되기 때문이었다.

    E급 모험대를 격퇴할 때부터 이런 식으로 라우라한테 경험치를 몰아주고 있었다. 덕분에 라우라는 현재 눈부신 능력치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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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31    명성: 512

    직업: 책사(B), 학자(D), 성노예(D)

    통솔: 81  무력: 11  지력: 84

    정치: 10  매력: 57  기술: 1

    호감도: 76

    충성도: 99

    *칭호: 1.공작 영애(廢) 2.천재 3.충신

    *능력: 승마술B+, 수사학B, 음악C, 전술B+, 기하학D, 작전술C

    *스킬: -

    현재심리: ‘흐음, 닭 모가지 비트는 것보다 약간 쉬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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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레벨이 24에 머물고 있는 나와 대조적이었다. 언제 봐도 든든했다. 나는 라우라에게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라는 지휘관은 반드시 생포해올 것'이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듬직하게 군례를 올리고 열두 명의 기사와 함께 나섰다.

    뭐, 그후로는 간단했다.

    전방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더니 순간 전열에 빈틈이 생겼다. 말이 열두 명이지 몸집만 작은 오우거가 군집을 이루어서 돌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죽음의 기사에겐 물리 내성(-80%)이 붙어 있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오우거와 똑같은데 날붙이로 공격해봤자 20%의 피해밖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마법사 부대가 없는 적군 입장에서는 사신이 강림한 셈이었다.

    죽음의 기사가 만든 틈으로 몬스터 대부대가 공격해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포위섬멸에도 사십 분 가까이 버틴 인간군이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잠시 후, 라우라의 레벨이 올랐다는 홀로그램이 연달아 다섯 개 떠올랐다. 전열을 붕괴시킨 공로와 지휘관들을 몰살시킨 공로가 인정되어 레벨이 오른 듯했다.

    “이 자가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입니다, 주군.”

    기사들을 대동하고 라우라가 돌아왔다.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에 샛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그것마저 아름답다고 느끼니 내 눈에 콩깍지가 씐 것 같았다.

    “저주받을 문둥병 새끼들!”

    죽음의 기사 두 명이 인간종의 남자를 양옆에서 붙잡고 있었다. 그가 입에서 피를 흘려대며 쌍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보니까 이 녀석, 오른쪽 팔이 잘렸다. 라우라가 송구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반항이 격심하여…….”

    “아아, 괜찮다. 어차피 팔 따위 자르면 또 난다.”

    “…….”

    신출내기 마왕들이 혀를 내두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팔이 무슨 머리카락이냐, 하고 그들의 시선이 말해오고 있었다. 섭섭했다. 가벼운 블랙 조크였는데. 방금 전까지 문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울부짖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도 벙찐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귀관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은 나일세,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나는 예전부터 그대에게 관심이 많았지.”

    “……예전부터?”

    “그래. 꽤나 오래 전부터.”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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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5/65   4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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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고.

    내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본인이 맞았다. 게임 일러스트와 다르게 얼굴이 다소 투박했지만 그 정도 차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지. 다만 이상한 것은 그의 옷차림이었다. 분명 지휘관-대리라고 들었는데 복장을 보면 꼭 귀족 같았다. 흉갑에 가문 문양까지 그려져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대는 평민이었던 걸로 아는데.”

    “……사령관 각하께서 난전 중에 전사하셨다.”

    “아하, 일개 평민 부관이 사령관 흉내를 낸 것인가.”

    사정을 파악했다. 난전에 사망한 사령관, 지휘부는 둘째치고 장병들이 혼란에 빠지겠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하여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사령관의 갑주를 훔쳐 입었다. 과연 <던전 어택>에서 장병들에 대한 책임감이 높기로 유명한 장군다웠다.

    “그렇다면 귀관이 현재 인간군의 사령관인 셈이로군. 이미 패배가 결정된 군대이지만.”

    “퉤에!”

    쿠르츠가 침을 뱉었다. 툭, 하고 내 왼쪽 눈에 명중했다.

    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으로 스윽 침을 닦았다. 핏물이 가득 섞인 침이었다. 끈적끈적했다.……뭐, 되었다. 본인임을 확인한 이상에야 그에게 흥미를 가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단검을 빼들어서 쿠르츠의 이마에 꽂아넣었다. 두개골이 아스라지는 감촉이 손바닥에 전달되었다.

    쿠르츠의 몸뚱어리가 힘을 잃고 갸우뚱거리다 땅바닥에 콧대부터 처박았다. 먼지가 그의 눈을 덮었다. 결국 그의 마지막 유언은 퉤에! 였다. 거 참 멋진 최후가 아니고 뭔가. 주변에서 보는 눈만 없었다면 손뼉이라도 쳐줬을 거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던전 어택>에서 제법 중요한 시나리오를 몇 개 맡고 있었다. 그를 죽임으로써 내게는 막대한 경험치 보상이 주어지리라.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

    수십 초를 기다려도 홀로그램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죽지 않았나 싶어서 쿠르츠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이마가 관통되어서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데 저게 죽지 않았다면 쿠르츠는 인간이 아니라 좀비일 것이었다. 이상했다.

    ‘뭐야? 왜지? 왜 퀘스트 브레이크가 안 떠?’

    내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는 게 이상해보였을까. 제파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별 일 아니라고 대답했다. 달리 답할 방도가 없었다. 퀘스트를 깨트렸는데 보상이 나오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각하, 승리 선언을 하시지요.”

    전투는 끝났다.

    <개미지옥>이라고 이름붙은 작전은 대성공했다. 이쪽은 고작 오우거 세 마리와 기타 몬스터 오백여 마리가 죽은 반면, 인간군은 녹색-청색-황색-적색 수비군을 전부 합쳐서 약 삼천 명이 전멸했다.

    새벽이 다가왔다.

    어스름이 땅을, 인간의 시체로 뒤덮인 땅을 비추었다. 몬스터들은 밤새 시체들을 훈제구이로 만드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새벽빛에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로 검은 연기 수십 개가 피어올랐다. 어찌보면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자문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냐.”

    당연하게도 대답해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결국 전쟁에 이긴 것에 족하면서 막사로 돌아갔다. 제파르도 신출내기 마왕들도 대승에 기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나만 뚱해서야 분위기만 망칠 뿐이다. 하지만, 겉으로 기쁨을 표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예상치 못한 찝찝함이 그림자처럼 진득하게 내 뒤를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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