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83화 (83/510)
  • 00083 인류의 번견  =========================================================================

    “어째서냐! 왜 청색 산성에서 몬스터가 나오는 거냐!”

    쿠르츠가 경악했다. 성문에서 빠져나오는 몬스터 중에는 오우거가 있었다. 어둠 때문에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어도 틀림없이 오우거였다. 4미터가 넘어가는 몬스터 따위, 쿠르츠는 오우거 외에 보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해야 한다. 설령 매복에 당했을지라도 '매복인가, 그 정도는 예상했다'라는 투로 혼란에 빠진 부대를 지휘할 필요가 있다. 지휘부가 허둥지둥대서야 장병들이 안심하고 싸울 리 없다.

    그런데도 쿠르츠는 경악했다. 경악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청색 산성이 두세 시간조차 버티지 못했다는 것인가. 전방에는 불과 오백 마리의 몬스터밖에 없었을 터다. 높이가 15m가 간단하게 넘어가는 성벽이다. 그 성벽이 두세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고?……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크윽! 사령관 각하, 소장을 따르십시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쿠르츠가 이빨을 질끈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생각 따위 없다! 그는 당장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과 기마대가 적진에 고립되어 있었다.

    “일단 빠져나갑니다! 기마대! 전원 반전한다! 사령부까지 길을 뚫는 거다!”

    기마대는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쿠르츠의 명령이 즉시 하달되었다. 각 산성에 백 명밖에 없는 기마대는 각각 제7급 무사 이상으로 이루어진 명실상부 최고급 부대였다. 그들이 당황하지 않고 소리쳤다.

    “황색 산성 기마대 지휘관 라켄베르크입니다! 제가 전열을 뚫겠습니다!”

    “적색 산성 기마대 지휘관 루브르크, 후위를 맡습니다!”

    명령은 재빨랐으며 실행은 거침없었다. 기마대가 반전하여 뒤쪽으로 달려나갔다. 전열이 무너졌지만 살아남은 오크와 고블린이 기마대를 막아섰다. 이쪽의 창칼을 몬스터가 막아내진 못했지만,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잃어버리는 시간만큼 사방에서 착실히 포위진을 형성해왔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오, 오우거가 따라잡았습니다!”

    오우거! 쿠르츠가 말을 몰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바위처럼 무언가 거대한 것이 기마대를 뒤에서부터 잡아먹고 있었다. 도끼였다. 사람보다 큰 도끼가 밤공기를 찢어발기면서 기마병을 군마째로 양단했다. 격류와 같은 기세였다. 도끼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병사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후위가 먹혔습니다!”

    “루브르크, 전사!”

    철퇴전의 악몽이었다. 오크 방패병의 전열을 뚫을 때 기마대는 스무 명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오우거 한 마리가 들러붙자 순식간에 부대의 일부분이 궤멸당했다.

    쿠르츠가 분노에 떨었다. 한 명의 기마병을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던가.

    정면에서 상대할 수만 있다면 오우거 한 마리쯤이야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빨리 적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양익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지금, 적진에서 고립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돌파하라!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다!”

    삼 분. 겨우 삼 분이었다. 기마대는 조금 전에 돌파한 곳을 다시금 돌파했다. 그러나 악몽과 같은 삼 분이었다. 오우거가 사냥개처럼 후위를 물어버렸고, 그것을 내팽개치기 위하여 서른 명에 이르는 기마병이 자진하여 멈춰섰다. 덕분에 기마대가 적의 전열에서 빠져나와 아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귀족 상관이 말했다.

    “부관. 성공했네! 우리가 빠져나왔어!”

    “성공이 아닙니다. 희생양을 바친 것뿐입니다!”

    쿠르츠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삼 분 동안 기마대의 사분지일이 전멸했다. 이때쯤에 쿠르츠는 대강 전황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마왕군은 두 개의 오백인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아마 이천 마리 정도의 병력을 가졌다. 자신은 철저히 기만당한 것이었다.

    기마대가 인간군의 중진에 복귀했다. 쿠르츠가 예상한 대로 사령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예상보다 두 배나 많은 적군이 튀어나왔다. 당황해하지 않는 편이 이상했다. 그나마 쿠르츠가 돌아오자 사령부는 한결 안정되었다.

    “상황을 보고해주십시오.”

    쿠르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말에서 내리고 군의에 참여했다. 쉴 틈이 없었다. 사령부의 참모들이 앞다투어 대답했다.

    “적이 우리의 삼면을 포위했습니다.”

    “양익이 서로 고립된 채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당장 구원해야 합니다.”

    “파악된 오우거 숫자만 해도 일곱 마리에 이릅니다. 가증스러운 어둠 너머로 몇 마리가 더 있을지 모릅니다.”

    쿠르츠가 이를 갈았다.

    “한 마리 더 추가하십시오. 지금 막 그 새끼한테 쫓겨온 참이니.”

    “오우거 여덟 마리…….”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무형의 압박이 사령부를 짓눌렀다. 현재도 사방에서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 인간과 몬스터가 내지르는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군은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기습적인 공격으로부터 언제까지 저항할 수 있을지, 사령부는 이미 절망적인 결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쿠르츠가 말했다.

    “철퇴합시다.”

    “슐라이어마허 지휘관-대리. 그대도 알지 않습니까? 야밤에 후퇴라니,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다 죽을 셈입니까? 소수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지휘관들이 신음했다. 아군을 버리고 도망가라, 쿠르츠는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지휘관은 하나같이 군인정신과 전우애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철퇴가 유일한 해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당초 철퇴할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소관이 후미를 맡겠습니다.”

    “슈, 슐라이어마허 지휘관-대리!”

    쿠르츠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작전은 소관이 입안했습니다.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차라리 끝까지 맞서싸웁시다.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도…….”

    “산성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쿠르츠가 버럭 소리쳤다.

    “여기서 전멸당하면 적색 산성까지 적에게 내주게 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변경백의 군대가 원군으로 올 때까지 적색 산성에서 농성합니다. 최대한 병력을 많이 살려보내야만 합니다. 소관이 후미를 맡는 동안 후퇴하십시오!”

    지휘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 어쩌면 철퇴가 불가능할지도 몰라.”

    그때 귀족 상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지휘관 한 명이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각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자신은 없지만……지금 상황에서 짐작해보면 마왕군은 총합 이천 마리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어. 그런데 녹색 산성을 공략할 때도, 청색 산성을 공략할 때도 우리에게 천 마리만 내보였지. 우리를 속여서 이끌어들일 생각이었다는 얘기야.”

    금발의 귀족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우리에게 각개격파를 노리도록 만들었어. 적의 계략대로 우리가 움직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둔 나머지 병력으로 급습했다. 그, 경들도 무슨 뜻인지 알겠지.”

    “처음부터 우리가 놈들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그런 말씀입니까, 각하!”

    “안타깝지만 그래.”

    그가 양손으로 눈가를 꾸욱 문질렀다. 눈에 피로가 몰려 있었다. 야간작전은 인간에게 심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몬스터는 그 정도가 덜했다. 녀석들은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전에서도, 그러한 인간종과 몬스터의 차이가 점점 더 부각될 게 분명했다.

    귀족 청년은 머릿속에서 인간군의 패배를 단정짓고 있었다. 문제는 언제까지 버티느냐는 것이었다. 앞으로 삼십 분, 잘하면 한 시간인가……그후에는 일방적인 소탕이 이루어지리라. 세 시간 안에 이천의 제국군 정예병은 문자 그대로 몰살되겠지. 그렇게 계산하면서 청년이 말했다.

    “으음……지금 소수의 병력이 철퇴한다고 해도 늦었어. 기껏해야 삼백 명 정도가 빠져나가겠지. 하지만 보병으로는 오우거의 추격을 당해내지 못해. 삼백 명은 전열도 유지하지 못하고 오우거들의 도끼에 희생될 거야. 내,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각하의 의견이 지당합니다.”

    “설령 삼백 명이 적색 산성에 돌아간다 해도 농성전을 벌이기엔 무리야. 몬스터들에게 간단히 함락당할 거야. 우리는 패배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적색 산성은 지키지 못해. 검은 산맥은 월맹군에 돌파당했어…….”

    한 지휘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워, 월맹군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으음. 적군의 의도를 생각해봐. 겨우 약 이천의 몬스터로 적색 산성까지 함락하려 들고 있어. 여기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면 글쎄, 아주 잘해서 몬스터를 천 마리 정도까지 줄일 수 있겠지……?”

    지휘관 전원이 숨을 죽이고 청년의 말을 들었다.

    “그, 그럼 공평하게 계산하여 천오백의 몬스터가 남았다고 해보자고. 적색 산성이 함락되면 당연히 변경백들이 대군을 일으키겠지. 그 대군을 천오백의 몬스터가 막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

    금발의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고. 그런데도 적들은 적색 산성을 먹어치우려 하고 있어. 왜 그럴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변경백들의 군대를 막을 자신이 있는 거야.”

    “――후속부대! 후속부대가 있습니다!”

    쿠르츠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질렀다.

    청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적들에겐 대규모의 후속부대가 있는 거야. 이천의 몬스터를 선봉대로 삼을 만한 본군이라면 규모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 어려워……월맹군, 혹은 월맹군에 버금가는 대군이야. 인류는 다시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겠지…….”

    쿠르츠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적은 장기결전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단기결전을, 단 한 순간의 섬멸전을 바랐다. 그렇기에 산성 수비군을 한 곳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자신은 이천의 병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소관은…….”

    억누른 목소리였다. 쿠르츠는 도저히 자기 입밖으로 나온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귀족 상관이 말했다.

    “자책하지 마, 부관. 귀관의 작전을 승인한 건 나야. 나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모두가 귀관의 작전이 최선이라고 인정했어. 제국군을 나락으로 빠트린 것은 귀관 혼자가 아니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지휘관이 쿠르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쿠르츠는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자책감, 분노, 병사들에 대한 끝없는 죄악감을 참아내면서, 쿠르츠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사령관 각하. 기마대를 이끌고 철퇴하십시오.”

    귀족 상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지금 후퇴해봤자 적색 산성은 끝났어. 소용없어.”

    쿠르츠가 자신을 책망했다. 눈앞의 애송이는 이곳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적색 산성을 지킬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끝까지 발악하는 것이 옳다, 마치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양 생각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생각 따위 파편조차 없다……그는 이미 완성된 군인이었다. 이런 사람을 머저리라고 생각했는가. 귀족에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인맥에 의해 출세했다고 판단했는가……아무래도 자기는 사람 보는 눈이 어지간히도 없는 것 같다고, 쿠르츠가 자책했다.

    “누군가는 이 사태를 변경백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건 초전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전쟁은 제국군 전체와 월맹군 사이에서 일어나겠지요. 변경백들이 먼저 군대를 조직하는가, 월맹군 본대가 먼저 적색 산성에 도달하느냐가 전쟁의 귀추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쿠르츠가 고개를 들어 귀족 상관을 바라보았다.

    “기마대와 함께 변경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그렇다면 소관이, 제국군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이 이곳에서 발악하는 것에도 의미가 생깁니다. 우리가 적의 발목을 길게 잡아둘수록 변경백들이 군대를 완비할 시간이 확보됩니다. 당장 패배할지언정 월맹군과의 전쟁에서는 유리하게 됩니다.”

    “잠깐만. 그건 이상해.”

    귀족 청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변경백들한테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굳이 나일 필요는 없어. 그, 기마대만 도망치게 해도 충분하겠지.”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주 어리석은 지휘관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를 어린애 다루듯이 농락했습니다. 마왕군에는 무시무시한 참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자가 오늘밤의 참변을 만들어냈습니다…….”

    쿠르츠는 정체모를 모략가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저 모략가는 오히려 병력을 줄임으로써 상대를 몰락시켰다. 평범한 모략가가 이루어낼 위업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마왕군이 이만한 계략을 짜낸 적은 없습니다. 단지 강력한 몬스터를 동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마왕군에 이제는 모략까지 더해졌습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저것이 월맹군의 선봉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오로지 각하만이 적의 의중을 간파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국에는 각하와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살아남아서 저 간악한 모략가와 맞서 싸워주십시오.”

    “슐라이어마허 부관…….”

    청년의 푸른 눈동자에 근심이 섞였다. 작전의 책임을 지고 부하들과 장렬하게 전사할 것인가, 앞으로 일어날 대전쟁을 위해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저도 똑같은 의견입니다.”

    한 지휘관이 나섰다.

    “사령관 각하, 이곳은 저희가 막을 테니 부디 살아남으시기를.”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라켄베르크 소위. 무슨 말인가. 그대도 도망치게. 후미를 맡는 사람은 나 혼자로 충분해.”

    “바보 같은 의견이로군요. 지휘관-대리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길게 몬스터 새끼들의 발목을 잡아두어야 한다고.”

    그러자 다른 지휘관들도 동조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슨 수로 이천을 한 명이 지휘합니까?”

    “보나마나 순식간에 궤멸되겠지요. 그래서야 본말전도입니다. 저도 남겠습니다.”

    “멍청이 같은 놈들!”

    쿠르츠가 소리쳤다. 어차피 여기 있는 지휘관들은 전부 쿠르츠의 아래에서 성장한 이들이었다. 사석에서는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에 쿠르츠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네놈들이 있어봤자 얼마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썩 꺼져!”

    “그러는 형님은 작전도 말아먹은 주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 거라고 난리입니까. 똥을 쌌으면 주변에서 도와줘야지요. 형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암요. 후미가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서 어디 도망이나 치겠는지 원.”

    지휘관들이 웃었다. 쿠르츠가 아연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시선이 확고했다. 죽음을 직시하는 자만이 보낼 수 있는 눈길이었다. 쿠르츠는 어떤 말로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머저리들이…….”

    “사령관 각하.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어서 기마대를 이끌고 가십시오.”

    청년이 침묵했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혼자 도망치다니, 그런 행위를 용납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희생을 자처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니, 제국의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에게 오욕을 뒤집어쓰라는 것이군.”

    “예, 죄송합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위하여 각하께서는 살아주셔야겠습니다.”

    “……좋아. 책임을 지는 방식이 꼭 죽음일 필요는 없겠지.”

    청년이 지휘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난 출세가 목적이었어. 그래서 내가 모시는 분을 돕고 싶었지. 이번 전투에서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첫 번째 전투라서, 귀관들이 나보다 더 전문가이니까 맡기면 되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책임이기도 해.”

    쿠르츠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산성에서 나가지 말자고 말한 것도 귀족 상관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몬스터에 겁을 먹어서 진군에 반대했다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작전에 동의한 것도 단순히 출세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아니었다. 청년에게는 그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겠지. 그걸 자기가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귀관들에게 맹세하겠어. 이천의 장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저 모략가를 반드시 죽이지. 녀석의 목을 귀관들의 무덤에 바치겠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지휘관들이 경례했다. 청년도 뒤따라서 경례했다. 평소보다 경례가 오래 이어졌다. 청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지크 합스부르크.”

    만약을 위해 쿠르츠와 청년은 투구와 옷을 바꿔 입었다. 최고 지휘관이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면 적이 끝까지 추격해갈 위험이 있었다. 쿠르츠가 최고 지휘관의 복장을 입음으로써 적을 기만하려는 것이었다.

    청년은 잔존한 기마병 백여 명을 이끌고 철퇴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 사령부에서 쿠르츠가 마음을 다잡고 외쳤다.

    “머저리 새끼들, 도망칠 수도 있는데 굳이 독배를 마셨겠다. 하지만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지금부터 오우거 한 마리 이상 해치우지 못한 새끼는 죽지 못한다!”

    “한 사람당 오우거 한 마리입니까. 그거 대단한 교환비율이군요.”

    지휘관들이 키득거렸다. 쿠르츠도 웃음을 머금었다.

    “아아. 살기는 쉬워도 죽기는 어려운 거다. 이제부터 그걸 적들한테도 각인시킨다. 몬스터를 한 마리라도 더 땅바닥에 처박아라! 우선 양익을 합치는 거다! 오우거는 제5급 이상의 무사들로 분대를 만들어서 해치운다! 뭐하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머저리 새끼들!”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사령부를 울렸다.

    쿠르츠가 생각했다. 그렇다.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인류의 번견이 얼마나 지독한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사령부 전원이 그렇게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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