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82화 (82/510)
  • 00082 인류의 번견  =========================================================================

    *  *  *

    쿠르츠가 야습 보고를 받은 것이 새벽 두 시였다.

    “지, 지휘관-대리. 큰일입니다.”

    “그래. 네 뛰어오는 꼴딱서니를 보니까 어지간히 큰일인 모양이다.”

    쿠르츠가 귀족 상관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달리 영 삐딱하게 말했다. 이것이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의 본래 모습이었다.

    귀족 상관을 대접할 때는 성실하게 마음에 없는 말을 토해냈으나 자기 부대원만 있는 군중에선 동네의 편한 아저씨처럼 돌아다녔다. 산성 수비군의 특성 때문이었다. 십 년이 넘도록 동고동락하는 사이다보니 단순히 군인으로서만 생활할 수는 없었다.

    부사관은 억울했다. 확실히 전령에게 보고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꼴딱서니가 가관인 걸로 치자면 자기보다 쿠르츠가 더하지 않은가. 쿠르츠는 책상에 두 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입으로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인간이란 게 어디까지 불량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가 어디 마음껏 시험해보겠다는 식이었다.

    다만 잔뜩 인상 쓰고 서류를 보는 것이 아마 군무를 처리하는 듯했다. 늦은 시각에도 촛불을 켜놓고 말이다. 부사관은 상사가 성실한 것인지 불성실한 것인지 아리까리해하면서 보고했다.

    “적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청색 산성에서 거화가 피어올랐습니다.”

    “야습인가!”

    쿠르츠가 벌떡 일어섰다. 언제 한량처럼 지냈냐는 듯 대번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풀어헤친 군복을 여미었고 사슬갑옷을 챙겨입었다. 부지런히 무장을 하면서 쿠르츠는 적군이 야습해온 까닭을 헤아리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 전부 깨워. 황색 산성 놈들도.”

    “알겠습니다.”

    “막사를 거둘 필요가 없다고 말해둬라. 이건 시간싸움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수비군이 신속하게 반응했다. 밤중에 출격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오 분이 안 되어 도열했다. 단순히 정예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혹시 야습을 할지도 모른다고 쿠르츠가 미리 부사관들에게 말해둔 덕분이었다. 가장 늦게 준비를 끝마치고 온 사람은 다름아니라 귀족 상관이었다.

    “슐라이어마허 부관! 오밤 중에 이게 무슨 난리야.”

    “야습입니다. 각하, 마왕군 놈들은 우리가 합류하기 전에 전광석화로 청색 산성을 함락할 속셈입니다.”

    “뭐, 뭐라고! 큰일이잖아!”

    귀족 상관이 와락 눈을 떴다. 눈곱이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얼른 지적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틈이 없었다. 쿠르츠가 상관은 물론이고 주변에 도열해 있는 장병들도 똑똑이 들으라는 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성을 나와서 각개격파할 생각이라는 것을 적이 알아차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하기 전에 청색 산성을 공격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적은 조바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홰가 타오르는 군중에서 쿠르츠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말에는 조리가 있었고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내용에 타인을 설득하는 데 충분한 논리가 뼈대로 심어졌다. 장병들은 예기를 불태우며 자신이 어째서 싸워야 하는지, 왜 이 전투에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새겨들었다.

    “우리의 작전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적들의 두 부대가 지금쯤 청색 산성을 압박하고 있겠지요. 그중 한 부대가 바로 우리 앞에, 저 어둠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놈들의 후장을 후려갈겨 줍니다!”

    병사들이 웃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앞으로 맞서게 될 몬스터 부대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약 오백 마리, 그중에 오우거가 다섯 마리나 포함되었다. 그런데도 장졸들이 웃었다. 한 마리만 나타나도 소규모 영지에서는 전쟁규모의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몬스터를 앞에 두고서도 그들은 배짱을 부릴 줄 알았다.

    쿠르츠는 새삼스럽게 제국군이 자랑스러웠다.

    ‘정치는 언제든지 개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제국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킨다. 그렇다면 언제고 나라는 안에서 바뀔 수 있다. 우리의 분전이 제국의 찬란한 미래로,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외쳤다.

    “오늘밤, 우리는 막사를 거두지 않고 출격합니다. 이번 전투의 핵심은 속전속결입니다. 청색 산성이 적의 양동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적을 압살합니다. 빠른 진군을 위하여 식량도 챙기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몬스터를 전멸시키고 청색 산성에서 보급을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귀족 상관도 쿠르츠의 의지를 느꼈다.

    “……슐라이어마허 부관.”

    “이 전투에 두 번은 없습니다! 성공하면 적을 전멸시키고, 실패하면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습니다. 궁수는 정확하게 몬스터의 눈을 찌를 것이고, 창수는 단 한 번의 전열이탈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각하!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귀족 상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깨어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사라지고 귀족적인 위엄이 얼굴에 자리잡았다. 과연,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망각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는가. 쿠르츠가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애송이는 머저리였으나 괜찮은 머저리였다.

    귀족 상관이 울부짖었다.

    “진군하라!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병사들이 포효했다.

    “지크 카이저 합스부르크!”

    “지크 합스부르크――!”

    황제 폐하 만세, 합스부르크 만세! 전군이 하나된 의지로 소리쳤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산성 수비군 전통의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십 년 동안 훈련한 그대로 병사들이 열을 맞추어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어둠은 행군에 전혀 지장을 주지 못했다. 이곳은 검은 산맥, 그들이 주인인 땅이요 앞마당이었다.――패배하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뼈를 묻으리!

    “슐라이어마허 부관. 혹시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청색 산성이 함락되면…….”

    쿠르츠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귀족 상관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 말고 없었다. 부사관들은 정찰병을 파견하는 것과 부대전열을 맞추는 일로 분주했다. 쿠르츠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보 녀석! 사령관이 마음 약한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제아무리 허수아비 지휘관이라 해도 사령관은 사령관. 군 지휘부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병사들 사이로 퍼지면 안 되었다. 설령 패배를 눈앞에 두고서라도 지휘부는 굳건해야 했다. 다행히 귀족 상관은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아주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다, 하고 쿠르츠가 생각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정찰병을 파견하여 적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전방의 몬스터 부대가 영채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양동작전을 위하여 녀석들이 움직인 것은 길어봤자 한 시간 전입니다. 한 시간이면 녀석들은 아직 청색 산성에 도착하지 못했을 겁니다.”

    쿠르츠는 철두철미했다. 마왕군의 참모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이쪽이 각개격파를 노리고 진출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그쪽에서는 어떤 방법을 취할 수 있는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전격적으로 후퇴하든가, 아니면 이쪽이 각개격파를 위해 움직이기 전에 청색 산성을 기습한다.……적은 후퇴하지 않았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쿠르츠가 조소했다. 전쟁이란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상대편은 먼저 패배했는데도 전술적인 역량으로 이를 극복하려 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오우거가 다섯 마리나 있다고 해서 자만했는가. 어찌되었든 어리석은 작자였다.

    물론 그도 인정했다. 전쟁이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며, 전략적 패배를 전술적 승리로 뒤엎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러나 도박과 똑같다. 평범한 도박이 아니라 병사의 목숨을 배팅칩으로 삼아 벌이는, 지독히 이기적인 도박.

    마왕군이란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몬스터를 부하가 아니라 한낱 내기거리로 취급한다. 이기면 좋고 지면 그만이다. 그렇게 여기는 것 아닐련지. 그 따위 놈들에게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패배할 리 없다고 쿠르츠는 확신했다. 강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군대로서 격이 달랐다.

    “아군을 믿으십시오, 각하. 청색 산성 수비군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예입니다. 적어도 여섯 시간은 적의 파상공세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여섯 시간. 여섯 시간인가.”

    귀족 상관이 중얼거렸다.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었다. 쿠르츠는 만족했다. 귀족 상관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대규모 전투이다. 불안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이천오백의 장병을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위엄을 보여야 할 순간에는 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애송이에게 전술적인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은 쿠르츠를 비롯해서 아무도 없었다.

    “전방에 몬스터 부대 발견!”

    정찰병이 보고했다. 진군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약간 안 된 시점이었다.

    “몬스터 부대가 청색 산성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쿠르츠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산성은 버텨주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한 사실이 어긋나기도 하는 게 전쟁터였다. 이로써 불안정한 요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

    “육안으로 확인했는가.”

    “시야가 어둡기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함성과 병장기 소리가 확연히 들렸습니다.”

    좋다, 하고 쿠르츠가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귀족 상관은 형식적으로 쿠르츠의 지휘를 승인할 뿐이었다. 지금 제국군 이천오백 명을 통솔하는 남자는 잡졸 출신의 쿠르츠 슐라이어마허였다. 각 산성의 수뇌부가 모여들어 상의했다.

    “기습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몬스터의 밤눈이 우리보다 좋습니다. 우리가 당도하기 전에 알아차리겠지요.”

    “몬스터를 이끄는 마왕에게 혼란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판단할 시간을 주지 않고…….”

    “거화를 해서 우리가 도착했음을 산성에 알리겠습니다.”

    적색이든 황색이든 사령관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피와 땀으로 검은 산맥을 사수해온 지휘관-대리 및 부사관들이 얘기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쿠르츠가 말했다.

    “적은 오백입니다. 우리의 양익이 적을 압박하는 동안, 중앙이 적의 전열을 일도양단합니다. 두 조각으로 내는 것입니다. 그때 양익이 단숨에 기세를 올려서 한 조각씩 섬멸하십시오.”

    “중앙의 돌파력이 요체입니다. 누가 중앙을 맡습니까?”

    “소장이 기대대를 이끌고 중앙을 돌파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정교한 지휘보다 제장과 장병의 분전이 중요합니다. 적을 전멸한 후에 그대로 청색 산성에 합류합니다.”

    작전은 그뿐이었다. 어차피 청색 산성이 모루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강력한 망치가 되어 후갈기면 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게 틀림없었다.

    “공격하라!”

    지휘관들이 말을 몰고 최선두에 섰다. 야간전투에서는 지휘관이 전선에 위치할 필요가 있었다. 낮보다 병력을 통솔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장수가 앞장서니 병사들이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뒤따랐다. 어느새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고 있었다. 기습의 효과가 다소 사라지겠지만 전투력은 상승할 터였다.

    “각하! 소장이 지휘를 맡겠습니다! 각하께서는 후방으로 물러나주십시오!”

    “나 역시 제국의 군인이야! 부관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수는 없지! 이래봬도 제4급의 무사이다! 내 한몸은 지킬 수 있어!”

    귀족 상관이 소리치면서 거세게 말을 몰았다. 쿠르츠가 큰소리로 웃었다. 괜찮은 머저리를 뛰어넘어 용감한 머저리이기까지 했는가! 나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인맥이 얽혀 산성에 부임해온 상관이었으나 적어도 겁쟁이는 아니라는 점에서 쿠르츠가 합격을 주었다.

    순식간에 몬스터 부대와 거리가 좁혀졌다. 밤인데도 시야로 적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우리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오크 방패병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전장의 흥분이 삽시간 쿠르츠를 휘감았다. 눈이 불타올랐다. 어리석다! 그걸로 제국군의 돌격을 막아내리라 보았는가! 주인의 분노를 느꼈는지 말이 더욱 힘차게 앞발을 내딛었다. 쿠르츠가 창을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찢어발겨라아아아!”

    병사들이 늑대떼처럼 포효했다. 이백의 기마병이 오크 방패병과 격돌했다. 잘 훈련된 방패병도 그러나 기마돌격을 막기엔 무리수였다. 오크 한 마리를 방패째로 짓밟아버리자 쿠르츠는 예의 야성이 폭발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쟁의 야성이었다. 입에서 연신 짐승의 고함이 터져나왔다.

    쿠르츠는 창에 오러를 실었다. 그리고 기마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이루려는 제2선의 오크 방패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오러에 감싸인 강철창이 방패를 두 쪽으로 가르면서 오크의 가슴을 양단했다. 그렇게 쓰러지는 몬스터의 시체를 군마가 밟고 지나갔다. 찰나에 방패병의 전열이 뚫렸다. 그 틈으로 나머지 기마병들이 쓰나미처럼 쏟아졌다. 쿠르츠는 알았다. 자기가 홀로 적의 전열을 돌파해버린 것이었다.

    “크하하하하!”

    지휘관으로서의 쿠르츠가 사라지고 제국군 제3급 무사로서의 쿠르츠가 전장에 나타났다. 강철창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의 팔다리가 밤하늘로 치솟았다. 고블린은 상대할 필요조차 없었다. 군마가 알아서 고블린의 가슴을 으깨버렸다.

    오우거, 오우거는 어디 있는가! 쿠르츠가 본능적으로 적수를 찾아나섰다. 어둠에 시야가 제한된 탓인지 오우거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앙이 아니라 양익이 오우거를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문제없었다. 병력면에서 이쪽이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각 천일백 명으로 이루어진 양익의 군대가 두 조각 나버린 몬스터 부대에 짐승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쿠르츠는 전투에 이겼음을 직감했다. 마왕군은 속전속결로 산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무산되었다. 오히려 오백인대가 속절없이 격파당하게 생겼다. 이제 마왕군에게 남은 병력은 청색 산성 너머에서 공성전을 벌이고 있을 오백 마리의 몬스터, 그것도 오우거와 같은 고위 몬스터가 없는 부대였다. 끝났다! 제국군 이천오백을 막아낼 방법 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쿠르츠가 주변의 기마병과 함께 몬스터 소탕에 나서려는 때였다. 귀족 상관이 그에게 다가와서 소리쳤다. 그가 든 검에도 피가 흥건했다. 쿠르츠는 처음으로 상관에게 호감이 느껴졌다. 전쟁터에서 함께 뒹구는 것만큼 전우애를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크흐흐, 사령관 각하도 제법이십니다!”

    “부관! 아무래도 이상해! 이놈들은 정말로 산성을 공략하고 있었던 거냐!?”

    무슨 소리인가. 쿠르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생겨난 호감이 도로 꺼졌다. 그가 오크를 한 마리 더 해치우면서 소리쳤다.

    “성벽에 사다리도 놓여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정작 성벽 근처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몬스터는 한 마리도 없다!”

    “우리가 후방에 접근한 것을 알고 성벽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제기랄!”

    쿠르츠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는 그러나 멍청이라고 소리지르지 않은 것만으로 용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와는 달랐다. 지금 그는 전쟁터의 흥분에 마비되어 있었다. 상관에 대해 깍뜻하게 예의를 취할 정신머리는 진즉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봐봐! 성벽 위에도 아군이 없다! 우리가 온 것을 알면 적어도 함성으로 맞이하는 게 정상이잖아!”

    “아군이?”

    쿠르츠가 성벽을 바라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 위로 드문드문 밝혀진 횃불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아니, 횃불 자체가 지나치게 적었다. 야밤에 벌어지는 공성전이었다. 최대한 횃불을 많이 밝혀놓아야 했다……쿠르츠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애송이 상관이 말한 그대로였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함성으로써 우리에게 호응해주어야 하는데……어째서인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가.

    멀리 사방에서 몬스터의 함성이 퍼졌다. 쿠르츠가 깜짝 놀랐다. 고작 몇 백 마리의 몬스터가 내지를 수 있는 함성 수준이 아니었다! 적어도 천 마리! 천 마리가 한꺼번에 포효하고 있었다!

    “부관!”

    귀족 상관이 새하얘진 얼굴로 쿠르츠를 바라보았다. 쿠르츠는 등골이 쩌릿쩌릿하게 울렸다.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쿠르츠의 본능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이곳은 곧 지옥으로 변모한다!

    “각하!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졌습니다! 당장 후퇴해야만 합니다!”

    그때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산성에서 성문이 열렸다. 쿠르츠가 고개를 홱 돌아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일단의 병력이 쏟아져 오고 있음을 보았다. 인간이 아니었다.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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