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81화 (81/510)

00081 인류의 번견  =========================================================================

밤이 되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렸다.

공성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몬스터들을 마냥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 크르우우우, 그르르르.

─ 그라라라.

오크와 고블린이 박자를 맞추어 군가를 불렀다. 일찍이 E급 모험대를 궤멸할 때 동원했던 고블린 부락들의 노래와는 또 달랐다. 여기서는 뿔피리와 같은 악기가 사용되었다. 어두운 밤하늘로 긴 뿔피리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몬스터들이 쿠웅, 쿠웅, 쿠웅, 천천히 발을 굴렀다.

아군의 군중에서 횃불을 키지 않았다. 사방이 깜깜했다. 성벽 위의 인간들이 보기에는 저 멀리 어두운 너머로부터 몬스터들의 노래가 스멀스멀 기어오는 것이었다. 사기가 저하되는 것을 노린다, 적군의 지휘관은 그렇게 판단하겠지.

“각하, 발람이 이끄는 후견부대가 도착했습니다.”

“인간군은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제파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진중하게 느껴지니 세월의 연륜이란 얕볼 게 못 되었다.

“우리가 헛짓거리를 한다고 여기고 있겠지요.”

청색 산성을 지키는 인간군은 정예병이다. 일반 잡졸도 몬스터를 토벌한 경력이 있다. 밤새도록 군가를 불러봤자 인간들은 코웃음칠 것이다. 자장가로 삼아서 새근새근 졸지도 모른다. 우리쪽의 피로가 가중되고 있다고 기뻐하면서. 그만한 담력이 저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여유를 갖고 있었다. 여유를 가질 만한 희망도 품었다. 당장 내일이 되면 후방의 몬스터 부대를 격파하고 도착할 적색-황색의 원군. 그것 때문에 인간군은 시종일관 드높은 사기를 유지했다.

언제까지 희망이 이어질까. 희망을 잃고도 인간은 죽음에 맞서싸울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았다. 승리뿐만이 아니라 생존조차.

잠시 후.

후견부대를 이끄는 마왕이 다가왔다. 발람. 서열 제51위. 신출내기 마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잘해주었다. 우리 본군과 하루 이상의 거리를 두고 착실하게 쫓아왔다.

적군은 치열한 공성전을 대비하여 정찰부대까지 모조리 산성에 집합했다. 그게 실책이었다. 적은 우리의 후견부대를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월맹군의 선봉임을 미리 알았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정찰부대를 유지했겠지.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여느 때처럼 소규모의 침공이 재현되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제7차 월맹군이 조직된 지 어언 이백 년이 지났다. 이백 년의 세월이 인간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발람이 군례를 올렸다.

“명을 받들고자 도착했습니다. 사령관, 군대는 이미 도열하고 각하의 공격명령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수고했다. 군가를 멈추도록.”

제파르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나와 발람도 따라서 오른팔을 들었다. 순식간에 진중이 조용해졌다. 우리의 사념이 몬스터들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몬스터들은 언제 노래를 부르고 발을 굴렀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고요해진 탓일까. 성벽 위에서 인간군의 경비병들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아마도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들 또한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고요가 단순한 침묵이 아니며 지극히 불온하다는 사실을.

“아르테미스여. 그대의 찬란한 밤이 우리의 안식처일지니.”

제파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래와 같은 기도였다. 그가 선창하고 발람과 내가 뒤따라서 읊조렸다.

“아르테미스여. 그대의 찬란한 밤이 우리의 안식처일지니.”

목소리 자체는 미약했다. 우리가 인간이었다면 개전을 알리는 신호 치고 지나치게 허술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마왕이고 우리의 부하는 몬스터였다. 우리가 속삭이는 그대로 몬스터들이 상념을 느꼈다.

“고난에 마주쳐서는 우정을, 적 앞에서는 평등을,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유가 내려질지언저. 전쟁터에서 우리 맹세하나니. 우정의 맹세를. 평등의 맹세를. 죽음의 맹세를.”

제파르와 우리의 목소리가 땅바닥에 어스름처럼 깔린다.

“아르테미스여. 그대 앞에서 우리 붉은 피로 맹세하나니. 인간의 영원한 적이 될 것임을. 마인의 명예로운 미래를 위해 개처럼 충성할 것임을. 언제는 승리하고 언제는 패배할지라도, 오늘 이 순간이 이름할 언제란 패배의 시간이 아니게 하소서.”

제파르가 우리에게 유리잔을 나눠주었다. 거기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는 손수 자기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전투의 총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술을 따른 다음 자작(自酌)하는 것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다. 그러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들었다.

“정복을 위하여.”

“정복을 위하여, 제파르를 위하여!”

“바르바토스를 위하여!”

단숨에 술을 비우고 유리잔을 땅에 내리던졌다. 쨍그랑, 하고 세 개의 유리잔이 깨졌다. 제파르가 여태껏 조곤조곤 속삭인 것과 다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밤, 검은 산맥은 우리의 것이 된다! 전군, 공격!”

“공격하라!”

“전군, 공격하라――!”

몬스터들이 포효했다. 오우거, 오크, 고블린, 골렘이 울부짖었다. 밤공기를 찢어발기고 구름마저 헤집을 기세로. 신중한 진군 따위 필요없었다. 단 한 방에 기습적으로 성문을 깨부술 속셈이었다. 천오백 마리의 몬스터가 한 몸체를 이루어 진격했다. 오직, 자기 손발을 다루듯 몬스터를 부리는 마왕만이 내보일 수 있는 용병술이었다.

발람이 말했다.

“사령관! 부디 오우거 부대를 선두로!”

“각하한다. 인간 놈들이 기습에 대비해놓지 않았을 리 없다. 먼저 오크 방패병을 진군시킨다.”

제파르는 전세를 정확하게 읽었다. 멀리 성벽에서 꽹가리 소리가 들리더니,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횃불들 사이로 궁수들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궁수의 수효는 눈짐작하건대 삼백이 훌쩍 뛰어넘었다. 압도적이었다! 사실상 산성 수비군 전원이 활을 쏠 줄 아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궁수는 기사만큼은 아니어도 최정예 병종으로 취급되었다. 궁수를 육성하는 데 끔찍하게 많은 시간이 투자되기 때문이었다. 검은 산맥의 산성을 지키는 인간들이 평소부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오크 방패병들이 성벽에 가까워지자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들이 일제히 공중 높이 화살을 쏘았다.

“밀집대형으로!”

“방패병 전원, 밀집대형!”

제파르가 소리치고 발람이 따라 소리쳤다. 앞서 가던 오크 방패병들이 로마 군단병처럼 빽빽하게 귀갑진(testudo)을 형성했다. 방패들 위로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오크들은 인간용보다 두 배 정도 거대한 방패를 쓸 수 있었다. 그 거대한 우산들을 화살이 뚫기란 쉽지 않았다. 수백 궁수의 일제사격에도 아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이 마왕군이 강력한 이유였다.

인간군은 일일이 깃발이나 신호를 동원해가며 군대를 통솔해야 한다. 마왕군은 다르다. 부하 몬스터와 정신적으로 이어진 덕분에 명령이 중간단계를 생략하여 곧바로 전달된다. 마왕과 마왕이 서로 다투지 않는 이상에야 이론적으로 완벽한 통솔이 가능했다. 평범한 몬스터 떼거리와 마왕이 이끄는 몬스터 부대는 차원이 달랐다.

발람이 흥분해서 말했다.

“다시 일제사격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 틈에 방패병뿐만 아니라 전군을 진군시키지요.”

“아니다. 일부러 사격을 한 것이다.”

제파르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정거리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는데도 사격했다.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술책이다.”

“각하. 지금은 밤입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인은 밤에도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만, 인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시야가 확보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저놈들은 멍청이가 아니다. 야습을 대비하여 밤눈이 밝은 병사를 배치해두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사정거리 바깥으로 화살을 쏘았다. 계략이다. 전군, 귀갑진을 해제하고 최대한 넓게 퍼져라.”

발람은 불만 어린 기색이었으나 군말없이 제파르의 지휘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파르의 판단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투석기가 출현한 것이었다. 한꺼번에 열 개의 바위가 공중을 가르고 몬스터 부대에 격돌했다. 바위들은 보통 투석기가 날리는 것에 비해 월등하게 거대했다. 바위에 오크들이 속절없이 뭉개졌다. 거대한 방패도 과연 바위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제파르가 신음했다.

“사정거리를 포기하는 대신 위력을 높혔는가. 제법이로군.”

“……각하의 혜안이 놀랍습니다. 밀집대형을 이루었다면 피해가 더 커졌을 겁니다.”

“지금이 기회이다. 전군, 앞으로 나아가면서 귀갑진을 형성하라.”

제파르는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명령했다. 발람이 말한 그대로였다. 나 역시 진심으로 감탄했다.

작전대로 전투가 흘러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무리 작전을 잘 짜봤자 십 분이 흐르면 기존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겨버린다. 이번에는 인간군이 준비한 투석기가 그것이었다. 활보다도 사정거리가 짧은 공성병기를 준비했으리라 누가 상상했겠는가. 먼저 투석기를 활용하고 그 다음에 궁수를 운용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전술이었다.

제파르는 순간적으로 적의 실책이 기만임을 간파했다. 왜 사정거리 바깥으로 화살을 쏘았는가. 목적은 하나였다. 다시 일제사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어서 돌격하라고, 우리를 유혹한 것이었다. 적은 우리가 밀집한 채로 다가오기를 원했다……무엇 때문에? 제파르도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적이 원하는 것을 정반대로 뒤집으면 괜찮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적이 밀집대형을 원한다면 이쪽에선 부대를 산개시킨다. 그 결과, 공성병기의 집중적인 사격에도 몬스터 부대는 비교적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놀라웠다.

이것이 월맹군에 세 번이나 참가한 마왕의 실력인가.……만약 내가 지휘관이었으면 방금 제파르처럼 재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의문스러웠다. 못했겠지. 먼저 적군이 실수한 게 아니라 기만술을 펼친 거라고 알아차릴지 의문이었고, 설령 알아차리더라도 적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시간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제파르와 나는 장수로서 격이 달랐다…….

“인간 놈들은 다시 화살비를 쏘아댈 것이다. 소나기가 멎은 직후, 오우거를 전진시킨다.”

내가 고심하는 와중에도 전장의 시간은 가열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적군, 다시 일제사격을 가해옵니다.”

“지금이다! 오우거 전원을 돌격시킨다!”

아까 전처럼 화살이 오크 방패병들에게 쏟아졌다. 그 빗줄기가 채 멎기도 전에 거대한 무언가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다섯 마리의 오우거였다. 신장이 4미터에 달하는 오우거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바윗덩어리였다.

─ 크르하아아아아아아!

오우거들이 아군을 짓밟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내달렸다. 한 고블린이 오우거의 발에 짓눌려서 압살당했다. 오우거들은 도리어 속도를 더했다.

성벽까지는 오백 미터의 거리가 있었다. 오우거 다섯 마리가 포환처럼 오백 미터를 한 순간에 질주했다. 녀석들은 일렬을 이루었는데, 한 마리씩 옆구리에 송곳 모양의 어마무지한 나무를 끼고 있었다. 나무의 앞쪽은 강철로 마감되었다. 충차에 쓰이는 나무공이였다.

인간들은 오우거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겨우 다섯 마리의 오우거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다섯 마리가 전부 청색 산성을 우회하여 넘어갔다고 파악했기에. 우리는 애당초 열 마리의 오우거를 갖고 있었다. 너희는 완벽하게 속아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광경이 속아넘어간 것에 대한 대가이다!

─ 쿠우웅!

가장 맨 처음으로 달려간 오우거가 나무공이를 성문에 쑤셔박았다. 성문이 진동했다. 오우거는 곧바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두 번째 오우거가 나무공이로 성문을 때렸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마침내 다섯 번째 나무공이가 온몸이 근육질로 이루어진 오우거의 완력, 거기에 오백 미터를 달려오는 동안 붙은 가속도에 의해 내리꽂혔다.

─ 쿠우우웅!

틈새가 열렸다. 성문이 파괴되었다! 인간들로서는 오우거의 등장에 경악하자마자 난관이 돌파당한 것이었다. 천재지변이 아닐까 의심하겠지. 그러나 결국 너희는 기만당한 것에 불과했다!

제파르 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포효하라! 적을 살육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