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80화 (80/510)
  • 00080 인류의 번견  =========================================================================

    *  *  *

    정치는 질색이다! 귀족은 더더욱 질색이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절실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금 상관의 투덜거림을 듣고 있었다. 쿠르츠의 상관은 귀족 군인이었다. 금발이 아름답다는 것 빼고는 장점 따위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봐봐. 자고로 병법에서 요지는 먼저 이겨놓고 상대방과 싸우는 거잖아.”

    애송이 귀족이 떠들었다.

    ‘이 녀석은 단 하루라도 굶어본 적이 있을까.’

    언젠가 쿠르츠는 부대원과 함께 적군의 포위에 둘러싸여 배고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군인이란 그런 것이다. 병법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그것을 눈앞의 도련님은 머리로라도 이해하고 있을까……쿠르츠는 마음속으로 깊이 한숨을 쉬었다.

    “몬스터 놈들은 필사적으로 산성을 함락하려 발버둥치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 제국군에게는.”

    꽝, 하고 귀족 상관이 탁자를 쳤다.

    “아직 세 개의 산성이 있지! 천 년 전부터 안배해놓은 관문이야. 말하자면 우리 제국은 이미 천 년 전부터 이기고 있었다는 얘기야. 제3황녀 전하께서도 이를 가리켜서 실로 병법의 극치라고 극찬하셨어.”

    “그렇군요. 소인, 각하와 전하의 혜안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쿠르츠가 말했다. 여기서 대놓고 불평해봤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쿠르츠는 그러나 지금 이 삐뚫어진 심정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각하의 혜안에 감복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투가 승리 요인이 천 년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눈앞의 상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저 말은 아부를 위장한 비아냥이다.

    “무얼. 나 또한 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야. 이 정도도 못해서야 부끄러워.”

    상관이 웃었다. 역시나, 하고 쿠르츠가 비웃음을 감추었다.

    애송이 각하께서는 자기가 비아냥거렸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아, 질 높은 부대를 지휘한다. 그것이 귀족 상관이 걸어온 인생의 전부겠지. 평민인 쿠르츠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쿠르츠는 질투심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부러웠다. 인간들 중에는 두개골에 뇌를 들고다니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족속이 있다. 그 사실이 놀라웠다.

    쿠르츠가 생각했다. 만약 사람이 마음대로 두개골에다 뇌수를 비웠다가 채워넣을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이야말로 잠깐 뇌수를 빼놓을 순간이라고. 애송이 귀족 상관의 병법론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되었다.

    “급보입니다, 각하!”

    그때 막사로 전령이 뛰어왔다. 쿠르츠는 기뻐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고급 군인으로 지내온 경력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에 위엄을 불어넣었다. 덧붙여서, 즐거운 대화 도중에 방해받았다는 느낌이 풍기도록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관에게 잘 보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소란 떨지 마라. 여긴 사령관 각하의 막사이다. 무슨 일인가?”

    “예, 예. 청색 산성에서 봉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봉화는 삼 거! 3단계입니다!”

    시작했는가! 쿠르츠가 가슴이 떨려왔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하여 여러 왕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봉화 체계를 선택했다.

    제1단계. 열 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제2단계. 백 명에서 오백 명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제3단계. 오백 명에서 천 명 이하의 외적이 변경에 출현 혹은 진입.

    제4단계. 천 명 이상의 외적이 봉화대를 공격.

    전령은 봉화가 세 개 피어올랐다고 보고했다. 오백 명 가량의 적군이 시야에 포착되었다는 얘기였다. 쿠르츠를 비롯해서 각 산성의 지휘관-대리들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번 마왕군의 총 병력은 약 천 명에 이르렀다. 고작 천 명으로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 두 난관을 점령하기 위하여 양동작전까지 동원했다……적군의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확실히 녹색 산성은 힘없이 함락되었다.

    ‘마왕군 녀석들 중에도 제법 머리를 쓰는 작자가 있군. 그러나 이제부터는 네 녀석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쿠르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마왕군은 산성들 간의 연계를 우습게 여긴 듯했다.

    기본적으로 녹색-청색-황색-적색은 각각 따로 움직인다. 산성들의 목적은 마왕군을 격퇴하는 것이기보다 마왕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군 속도를 지연시키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보다 적에게 여러 방해물을 강요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적군의 목적이 내륙 침공이 아니라는 걸 알아낸 이상, 굳이 산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지.’

    이번 마왕군은 겨우 천 명에 불과했다. 일단 병력 면에서 내륙 침공을 노린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 진군 속도가 무척 느렸다. 적군은 녹색 산성을 점령하고도 자그마치 사흘이나 머뭇거렸다.

    만약 마왕군이 내륙 침공을 목적으로 했다면 무엇보다 속전속결을 노렸을 것이다. 제국의 변경백들이 원군을 보내오기 전에 산성을 함락한다, 그것이 지난 천 년 동안 마왕들이 취해온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쿠르츠는 고심 끝에 결론 지었다.

    적군의 목적은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쿠르츠가 판단했다. 적군이 청색 산성을 점령하기 전에 전멸시켜버린다. 때마침 적군은 양동작전을 펼치기 위하여 천 명의 부대를 두 개로 나누었다. 각개격파의 기회였다. 청색 산성이 적군의 부대 하나를 막고 있는 사이, 황색-적색 수비군이 연합하여 단숨에 나머지 부대 하나를 때려부순다.

    “각하. 아무래도 출격할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으음. 전군에 출격 명령을.”

    “예. 우리 적색 산성 수비군은 이대로 쾌속 진군하겠습니다.”

    귀족 상관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였지만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다. 자기가 열심히 설명하면 전략의 요지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부관.”

    귀족 상관이 어딘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산성에서 적을 맞이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굳이 산성 바깥으로 나가서 몬스터 부대와 격돌할 필요는 없잖아. 난 아무래도 불안해.”

    “……각하.”

    또 그 소리인가. 쿠르츠가 진절머리를 쳤다. 이미 작전이 정해졌는데도 저 애송이는 자꾸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 같기는! 쿠르츠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몬스터 부대가 두렵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대로 적군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으음.”

    “적군은 산성을 점령하고 그대로 엉덩이를 깔고 앉을 것입니다. 검은 산맥의 산성이 점령되어버립니다. 우리 제국군은 다시 그것을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면 안 됩니다.”

    즉, 이번에는 제국군이 마왕군을 향하여 공성전을 벌이게 된다……통상 공성전에선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세 배의 병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물며 이때 수비군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의 병력을 쏟아부을 필요가 생긴다.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 상상하기 힘들다.

    이십 년 전에도 그런 사태가 일어났다. 그때는 녹색 산성이 점령된 채로 남아버렸다. 결국 산성 수비군은 변경백들과 연합하여 산성을 공략했다. 몬스터 퇴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때는 변경백의 손을 빌린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괜찮지 않아? 본래 변경백들의 임무는 우리를 지원하는 거야. 아군이 아군을 돕는 거다. 어디에 마뜩치 않은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어.”

    쿠르츠는 결국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귀족 상관은 지나치게 멍청했다. 아군이 아군을 돕는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군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부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돈이 든다. 하물며 공성전을 준비하는 데 얼마만한 재원과 식량이 필요할지. 산성 수비군에는 따로 영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 가난하다. 결국 재원을 준비하는 쪽은 변경백들이 되어버린다.

    변경백들만 돈을 쓰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산성 수비군은 그들에게 빚을 지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전투에서 산성 수비군은 주도권을 변경백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다. 군지휘권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것이다. 그것을 저 애송이는 인지하고 있을까……쿠르츠가 속앓이를 하며 말했다.

    “산성을 잃어버리면 우리 수비군의 실책이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산성을 탈환하는 것은 변경백의 공훈이 됩니다. 각하, 저는 두렵습니다. 제국군 상부에서 산성 수비군의 지휘관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귀족 상관이 탄성을 질렀다. 쿠르츠가 속으로 비웃었다. 이제야 깨달았는가.

    “실례하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산성 수비군의 지휘관들은 승진이 막혀버립니다. 실제로, 이십 년 전에 녹색 산성을 잃어버린 지휘관들은 결국 은퇴할 때까지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네. 회전에서 결판을 낼 수밖에 없겠어. 변경백들에게 공훈을 넘겨서는 안 돼……녀석들은 황자파니까.”

    귀족 상관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쿠르츠는 상관이 설득되었다고 직감했다. 그는 더욱 더 상관이 한심스러웠다. 전략적인 이점을 들어서 설득할 때는 아득바득 반항하더니, 정치적인 결점을 꺼내서 설득하자 간단하게 납득했다. 병법이니 뭐니 떠들어도 결국 눈앞의 애송이는 출세에 눈이 먼 전형적 귀족이었다.

    쿠르츠는 이런 인물들에 익숙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최고급 엘리트 군인을 꼭 이곳 검은 산맥의 산성들에 파견시켰다. 산성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꼴로 몬스터와 격전을 치룬다. 자연스럽게 지휘관도 군공을 세우게 된다. 군공을 세우면 승진한다…….

    검은 산맥의 산성들은 결국 엘리트 귀족 군인들이 출세하는 데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쿠르츠가 자문했다.

    십 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산성 지휘관에는 가장 유망한 인재가 배속되었다. 인류의 최전선을 지킨다. 그런 사명감에 걸맞는 자가 발탁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황자와 황녀가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고, 어떻게든 자기 파벌을 군부에 꽂아넣기 위해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여전히 강력하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쯧쯧.’

    쿠르츠는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군인이 지나치게 정치에 밝아서야 좋지 않았다. 군인은 황제폐하와 제국신민을 지키고, 마왕이라는 악을 전멸시킨다. 그것이 임무의 전부였다. 쿠르츠는 자랑스러운 제국군으로서 자신에게 내려진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먼저 이 애송이를 구슬러야겠네.’

    쿠르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적군이 천 명인데 반하여 아군은 이천오백에 이릅니다. 게다가 적은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 제국군이 패배할 요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으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냥, 이상하게 불안해서.”

    정말인가? 쿠르츠가 속으로 비웃었다. 목소리가 떨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무래도 눈앞의 애송이는 전략적인 요소에서 안심을 찾을 만큼 군인정신이 뛰어나지 않은 듯했다. 이럴 때는 전략 외에 다른 요소를 미끼로 꺼내들어야 했다.

    “적에게 회전을 걸어서 각개격파하는 것입니다. 무려 천 명의 몬스터 부대를 섬멸하게 됩니다. 각하의 명성은 제국 전체를 요동칠 것입니다.”

    “부관의 말이 옳아.”

    귀족 상관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명성을 떨친다는 것이 젊은 애송이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라고, 쿠르츠가 확신했다. 귀족 상관은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 나이의 군인은 무엇보다 명성과 명예에 배가 고프기 마련이었다.

    쿠르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애송이들 뒷바라지를 해줘야 하다니……으이구.’

    무능한 귀족은 하여간 골치 아팠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귀족 상관이 자기 주제를 알아서 쿠르츠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실질적으로 적색-황색 수비군을 이끄는 사람은 쿠르츠였다.

    쿠르츠가 이름 모를 적군의 참모에게 동정심을 보냈다. 양동작전은 꽤나 훌륭했다. 하지만 산성 수비군이 오로지 산성을 수비하기만 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 선입견에 사로잡힌 것이 네 녀석의 패착이다, 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제국군 이천오백의 정예병에 얌전히 찌부러져라, 마왕 녀석들.’

    쿠르츠가 수비군 전체에 진군 명령을 하달했다.

    *  *  *

    “각하. 제국군이 움직였다는 보고입니다.”

    내가 제파르에게 말했다.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걸려 들었군. 단탈리안, 봉화를 올려라.”

    “예. 후방의 부대에 진격 명령을 내리도록 하죠.”

    라우라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라우라가 군례를 표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청색 산성을 바라보았다. 한참 공성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간군이 우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사실은 달랐다. 우리가 소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적극적인 공세는 후방의 부대가 합류하고 나서 이루어진다. 총합 천오백의 몬스터 부대로 단숨에 밀어붙인다. 적군은 이쪽에 오우거가 없다고 안심하고 있겠지. 우리에게는 오우거가 다섯 마리밖에 없고, 그놈들을 전부 전방 부대로 보냈다고 생각할 거다. 불쌍하게도.

    우리에겐 오우거가 무려 열 마리나 있다. 나머지 다섯 마리가 후방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 녹색 산성과 마찬가지로 청색 산성도 손쉽게 함락될 것이다.

    이번 작전의 승패는 후방에 숨겨둔 부대를 들키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나는 들키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아니, 적으로 하여금 정찰부대를 파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인간군 입장에서는 청색 산성에 최대한 많은 숫자의 병력을 배치하여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정찰병력도 모조리 수비병력으로 돌렸다.

    그들이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겠지만……불쌍하군. 적들은 우리의 의도를 완전히 착각했다.

    “자네도 지독한 사내이다.”

    “무슨 뜻인지, 소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크흐흐.”

    제파르가 약하게 웃었다. 거의 언제나 무표정인 양반이었으나, 저번 회의 이후로 자주 웃게 되었다. 내 앞에서 유독 자주 웃는 듯했다. 호감도도 20이 넘었다. 심리상태를 읽어본 결과, 제파르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자네를 맡으라고 할 때만 해도 약간 귀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생 전사이다. 모략가에게 전술을 가르치는 과외수업은 다소 귀찮았다……하지만 모략가라 생각했더니 이런 인물이었는가. 단순히 모략가가 아니라 모장(謀將)이라 불러야 마땅하겠지, 자네는.”

    “과찬입니다.”

    제파르가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 아니다. 군단장께서 자네를 총애하시는 이유를 알겠다. 인간 놈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자네가 역사서에 어떤 전투들을 기록해나갈지, 본인은 실로 궁금하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멋쩍게 웃기만 했다. 제파르도 더 이상 잡담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지만 결코 느리지 않게 군령을 내렸다. 그가 지휘한 덕분에 현재 공성전에서는 큰 피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견실한 지휘였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나저나 적군의 수뇌부에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있다는 정보를 캐내고 놀랐다. 포로로 잡힌 인간을 심문해서 알아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던전 어택> 플레이어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 남자는 노련한 숙장으로서 훗날 용사 일행에 우호적인 군부 인사로 활동한다. 평민에서 시작하여 장군까지 출세한 군인이다. 같은 평민 출신인 용사에게 호감을 품는 것이다.

    십 년 후에 활약할 인사. 지금은 적색 산성에서 지휘관-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소속된 선봉대와 맞붙게 되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저 자는 미래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급갈등을 약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장군, 그런 이미지가 이용되는 것이다. 엘리자베트 황녀는 그를 이끌어들임으로써 평민 세력의 지지도를 한층 높인다.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둘까보냐.

    엘리자베트 황녀는 극히 위험하다. 그녀는 <던전 어택>에서 최강의 우군이었다. 마왕들을 죽인 것은 용사이지만, 용사를 뒤에서 도와준 것은 황녀이다. 황녀가 없었다면 용사는 진즉에 정쟁에 휘말려 사형당했을 것이다. 마왕 입장에서 황녀는 최악의 적군이다……. 조금이라도 황녀의 세력을 깎아야 한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죽이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문득 그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하필 적색 산성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니 지독하게도 운이 없지 않은가.

    ‘안타깝지만 쿠르츠,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

    미래에 명장으로 이름 날리게 될 군인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죽는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오히려 게임 플레이어 시절 나는 쿠르츠를 좋아했다. 멋진 캐릭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용사도 뭣도 아니다. 지옥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한 마왕이다. 라우라가 내 결심을 도와주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 장군.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희생당해라. 게임에서 자주 말했지. 본인은 합스부르크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라고.

    마왕군과 맞서다가 전사한다. 군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다. 당신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곧 마련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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