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79화 (79/510)

00079 인류의 번견  =========================================================================

“변경백 각하.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초로의 남성이 서류작업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프리츠 폰 로젠베르크.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이었다. 검은 산맥 일대를 관장하는 두 명의 변경백(邊境伯)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는 강력한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초록의 산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호오.”

폰 로젠베르크가 외알 안경을 벗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적의 병력은?”

“보고에 따르면 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라고 합니다. 세 명의 마왕이 연합했으며, 그중 적어도 서열 30위 이내의 마왕은 없습니다. 다만 오우거가 다섯 마리 포함되었습니다.”

“오우거 다섯 마리.”

변경백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위협적이군. 하지만 산성들이 자체적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산성의 지휘관들은 뭐라고 말했는가?”

“우리가 막을 테니 변경백 각하는 안심하시오.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군공을 세울 기회이다. 그들의 공을 가로채서야 산성 지휘관들과 사이가 나빠질 뿐. 그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변경백 군대는 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들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 그리 전하라. 붉은 산돼지 기사단장에게도 기사단을 모으라고 전해두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집사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에서 떠났다.

폰 로젠베르크 변경백은 잠시간 천 명의 몬스터 부대가 나머지 세 개의 산성, 청색-황색-적색을 위협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 마리로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자기가 할 일은 이번 전투가 끝나고, 산성의 수비군이 입었을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다.

변경백이 다시 서류작업에 몰두했다. 검은 산맥은 안전했다. 문제는 외적이 아니라 내적이었다. 제도(帝都)의 정쟁이 최근 들어 더더욱 가열되고 있다고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과연 승리하실지 어떨지, 변경백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책략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오백인대가 녹색 산성을 우회하여, 산성의 후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진지를 구축하자마자 또 다른 오백인대로 산성 전방을 공격. 앞뒤로 관문을 공략했다. 손아귀로 토마토를 찌부러트리는 느낌이라 할까. 녹색 산성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보통 공성전에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세 배 이상 병력이 많아야 한다지만 그건 인간 군대끼리 싸울 경우였다. 고블린이라면 모를까 오크는 인간보다 기본적으로 체격이 월등했다. 잘하면 똑같은 숫자의 공격군으로 공성전이 가능했다.

오우거 다섯 마리를 포함하여 천 마리의 몬스터 부대. 마왕들이 직접 지휘하여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게다가 앞뒤로 공격해들어왔다. 아무리 수비군이 정예였다 해도 오백의 인간 군대가 지키는 성벽 따위 큰 피해 없이 점령했다.

“전쟁이란 의외로 허무하군요.”

“소수의 모험대를 격파하는 것과 다르니 말이다.”

내 감상 섞인 토로에 라우라가 성실히 대답했다.

“군주는 최전선이 아니라 중진(中陣)에서 지휘한다. 전쟁의 참상을 지휘관이 눈앞에서 직접 목격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와 라우라가 나란히 군마를 타고 진중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작전안에 개입했으나 전술적인 차원에서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다. 공개적으로 월맹군에 참가한 나의 군대는 골렘 서른두 마리에 요정 열 마리, 총 마흔두 마리에 불과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열외되었다.

내가 쓰게 웃었다.

“전쟁의 참상입니까. 저희가 지금 지켜보는 것도 충분히 끔찍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몬스터, 그러니까 아군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군대운용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병참이다. 어떻게 아군에게 식량을 포함하여 배급품을 지급할 것이냐, 이에 따라 전쟁의 흐름이 정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와 달리 제대로 된 병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이 시대, 군대의 병참전략은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조달한다'였다. 인간의 경우 현지조달은 구입이나 약탈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몬스터의 경우 어떠할까.

─ 크르릅, 크츠읍.

불과 수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크가 고깃덩어리를 물어뜯었다. 그는 먹는 데 방해되는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마치 생선가시 발라내듯 세심하게 벗겨냈다. 그리고 한입 물었다. 군침 튀기는 소리가 성대히도 들렸다.

고깃덩어리는 인간의 다리 한쪽이었다.

마왕군이 취하는 현지조달이란 폭력적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생겨난 시체를 식량으로 제공한다. 인간의 시체뿐만 아니라 고블린이나 오크의 시체까지 식량으로 취급되었다. 지금도 진지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수십 자락이나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부 시체를 훈제구이로 만드는 연기였다……인간들 입장에서 이곳은 그야말로 지옥이겠지.

세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땅바닥에 구역질을 쏟아내고 있었다. 인간의 고약한 내장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콧구멍을 타고 올라와 두개골에 진득하게 눌러붙었다. 그런데도 나에게 전달되는 감정, 즉 몬스터들이 느끼는 감정은 식욕이었다. 제기랄!

감각은 저주스러우리 만치 끔찍한 냄새를 맡고 있는데 마음속으로는 식욕이 피어났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상황이 아니고 뭔가. 자신 있게 단언하겠다. 타인의 감정을 읽어낸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인육에 식욕을 느끼는 것 따위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주군의 말이 옳다. 저것 역시 전쟁의 참상이다. 그러나 군주가 짊어져야 할 멍에는 따로 있다고 소녀는 생각한다.”

“군주한테만 내려지는 멍에…….”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병사라면 참혹한 전쟁터를 보고 울부짖어도 좋다. 민초라면 세상의 부조리에 한탄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좋겠지. 그러나 군주는 다르다.”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나 또한 멈추었다.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은 마상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라우라의 시선이 아무런 망설임을 담지 않고 곧장 이쪽으로 향했다.

“지휘관은 참상의 원인을 다른 누군가한테 떠맡길 수 없다. 세상한테 떠맡길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자, 지휘관이 전쟁을 책임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주군. 이곳에 널린 시체들을 보라. 인간, 고블린, 오크, 종족을 가릴 것 없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그들에게 전쟁터를 강요한 자는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내가 그들에게 전쟁터를 선사했다. 제파르, 아미, 그외에 마왕들도 전투의 주범이긴 했다. 그러나 공범이 많아진다 해서 내가 장본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특히 이번 작전은 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만일 전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지금 죽은 누군가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라우라가 강철과 같은 눈길로 말했다.

“괴로울 것이다. 힘들 것이다. 괴롭고 힘들어해도 좋다. 그러나 다른 무언가를 탓하는 일만큼은, 군주에게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제가.”

내가 입을 열고 놀랐다. 목소리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슬퍼하는 것인가? 라우라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지금에도 나는 슬픔을 느꼈다. 우습게도 그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지금 수백 마리의 오크가 풍겨대는 식욕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내 감정이 아니었다. 이 지옥의 도가니와 같은 감정들 속에서 나는 무엇에 안주해야 하는가? 오로지 슬픔, 이것만이 나의 감정이었다. 나는 나로 성립하고 있었다……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자아였다.

언제까지 타인들이 쏟아내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지금은 조울증을 겪는 데 그쳤다. 그러나 언젠가는 라피스가 알려준 마왕증후군, 인격의 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라우라 말이 맞다. 군주는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 당사자가, 당사자의 인격이 부서지면 어찌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제가 지나치게 괴로우면 어떻게 될까요? 도저히 멍에를 짊어질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면 말입니다. 아니, 제가 더 이상 단탈리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다면…….”

“소녀가 있다.”

라우라가 말했다.

“소녀는 결코 주군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 잊었는가? 나는 주군한테 내 모든 것을 바쳤다. 그것은 나의 성공과 실패가 온전히 주군의 성공과 실패로 이어진다는 맹약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주군의 성공과 실패는 똑같이 나의 성공이요 실패이다.”

일말의 미혹도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멍하게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주군이 천 명을 살해했다. 나는 그런 주군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천 명을 살해한 책임은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주군이 겪을 괴로움을 나 또한 괴로워하겠다. 주군이 느낄 고통을 나 또한 고통스러워하겠다.”

“…….”

“소녀가 노예일 적 주인이었던 자를 기억하는가?”

당연하다.

잭 올란드. 어리석기에 아름다운 노예상인이었다.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다.

“그때 주군은 노예상인을 죽일 수 있었고, 당연히 죽여야 했다. 상인을 살려두면 장차 주군의 생명에 위협을 가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내 질문에 주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에게 삶이란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기억한다. 어찌 기억하지 않겠는가.

“주군은 어째서인지 노예상인을 살리고 싶었다, 그렇기에 훗날 어떤 위협이 되어 돌아오든 상관없이 살리고자 했다. 주군, 만약 노예상인이 나중에 복수하기 위해 나타났다면 후회했을 텐가?”

“……아니요.”

라우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원했기에 노예상인을 살리려 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오든, 주군은 후회없이 받아들였겠지. 소녀는 그 삶의 방식에 매혹되어 주군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만이 아니다……그것을 주군은 보여주었다.”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소녀는 주군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너무하는군요, 라우라.”

내가 다소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식으로라도 장난 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라우라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책임져야 할 것은 비단 이번 전투뿐만이 아닙니다. 제8차 월맹군은 제가 추동한 것입니다. 선봉대, 제6군단, 월맹군 전체, 이들이 일으킬 수많은 전쟁……따지고보면 결국 제가 일으켰습니다. 라우라는 지금 그것들을 전부 멍에로 짊어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수십 만의 목숨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수십 만의 생명을 짊어지라는 얘기입니까?”

“그렇다.”

그녀가 주저없이 말했다.

아니, 심지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보통 한 사람은 하나의 목숨을 짊어지기에도 버겁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보고 수십만의 목숨을 책임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주군은 성군이 아니다. 마왕이지 않은가. 마왕이라면 응당 그런 방식으로 삶을 책임지는 것이겠지. 주군, 마왕의 길을 걸어라.”

“마왕의 길입니까……지옥이군요.”

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라우라가 옳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란 그런 것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막사에서 구역질에 시달리는 나를 왜 라우라가 끌고나왔는지, 왜 지금처럼 말을 타고 진중을 둘러보게 했는지 깨달았다. 도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체가 널린 들판, 그것이 구워지면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수십 개의 검은 연기들. 그것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누구보다 네가 두 눈으로 직접 받아들여야만 한다――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 광경을 감당할 것임을. 나에게 다가오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라우라는 맹세했다.

나는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군주를 지옥에 떨어트리는 신하라니. 저는 아무래도 터무니없이 불충한 신하를 가져버린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저와 같이 지옥에 떨어져주겠습니까, 라우라?”

“물론이다.”

즉답이었다. 나는 그것이 가벼운 대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소녀에게 이 살육의 현장은 끔찍하게 비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느끼면서도 라우라는 대답한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보다 한참 어른스러웠다.

우리는 다시 말을 몰았다. 시체를 태우는 연기와 고깃덩어리를 뜯어먹는 몬스터 사이로 나아갔다. 월맹군 원정이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이번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살육이 일어나리라. 지금의 광경조차 짊어지지 못해서야 앞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되도록 천천히 말을 몰았다. 라우라가 보조를 맞추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눈앞의 광경을 망막과 뇌에 새겨넣기 위해서. 불이 타닥이는 소리와 고기가 씹히는 소리가 한동안 나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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