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78화 (78/510)

00078 인류의 번견  =========================================================================

아미의 선동에 마왕들이 술렁거렸다. 군을 나누다니 비상식적이라는둥,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둥 말하고 있었다. 제파르가 어수선한 기류를 제지했다.

“잠깐만. 단탈리안, 자네의 의견을 계속 말해보게.”

“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선봉군을 두 부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다시 두 부대를 둘로 쪼개어, 총합 네 부대를 구성합니다.”

아미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노골적으로 주변에 어필했다. 다른 사람들도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두 부대도 모자라서 네 부대로 나눈다고요?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나는 단탈리안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말했네.”

제파르가 경고하자 아미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가 조용하게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한테 사과할 생각 따위는 눈꼽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보게.”

“우리는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총 네 개 보유하게 됩니다. 이중 한 개의 오백인대가 산성을 무시해버리고 진군합니다.”

제파르는 의아스러운 얼굴이었다. 감정을 읽지 않아도 속내가 훤했다. 산성을 무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본대가 최대한 손실을 입지 않고 무사히 관문들을 통과하도록 미리 길을 닦아놓는 것. 산성을 무시하고 넘어가봤자 작전 목표에 위배되었다.

내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다스렸다.

“각하. 소인이 지도를 통해 설명해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네.”

침착하자.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몇 번이고 라우라와 상의했다. 장래에 대륙 최고의 전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보장했고, 게임 플레이어로서 내가 작전이 성공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실패할 리 없었다.

“먼저 합스부르크 방면으로 통하는 이 네 개의 산성 말입니다만.”

내가 막대기로 산성들을 가리켰다.

“녹색-청색-황색-적색까지, 각 산성 간에 공조가 제법 훌륭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중에서 녹색의 산성은 대략 오백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청색의 산성 또한 오백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황색과 적색에는 각기 천 명이 주둔하고 있지요.”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산성의 병력쯤은 알고 있었다. 도합 삼천 명의 적군. 이천 명으로 이루어진 아군에 비해 1.5배 많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인간군은 여러 개의 산성을 만들어두고 병력을 분산시켰습니다. 만일 방어가 목적이라면 하나의 산성에 병력을 모조리 집중시키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오백이 지키는 산성과 이천오백이 지키는 산성, 어느 쪽이 난공불락의 요새일지는 명확합니다.”

네 개의 관문은 부대 배치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간군 오백 명이 지키는 관문을 뚫는 데엔 몬스터 정예부대 천 명이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만일 인간군이 방어를 목적으로 했다면 차라리 녹색의 산성에 주둔하는 오백 명과 청색의 산성에 주둔하는 오백 명을 하나로 합치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데도 인간군은 비효율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어째서인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인가. 아니면…….

제파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는 산성들의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바로 그렇습니다.”

단번에 내 의도를 파악해주었다. 과연 바르바토스가 선봉대장으로 임명할 법했다.

“산성들은 월맹군을 막기 위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월맹군을 고작 산성 하나로 방어해내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네 개의 관문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인간군이 대규모 병력을 조직할 때까지 마왕군의 발목을 잡아두는 것입니다.”

산성들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지연이다. 적당하게 마왕군의 진격 속도를 늦춘다, 그것만으로도 산성은 제 임무를 다한다.

녹색의 산성을 고작 오백 명의 수비군이 지킨다할지라도, 공성전을 위해서는 마왕군이 잠시나마 진군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하루가 소모되겠지. 그 하루 동안 마법 수정구를 통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보고가 날아간다. 제국의 변경백들은 즉시 군대를 조직한다.

“산성들은 희생양에 불과합니다. 녹색, 청색, 황색은 단적으로 말해서 적색의 산성을 위한 들러리입니다. 제국 변경백들이 적색의 산성에 원군을 보낼 때까지 우리 발목을 잡아두는 희생양.”

마왕군이 제아무리 쾌속으로 진경해본들 녹색의 산성까지 오는 데 하루, 녹색의 산성을 공략하고 마무리하는 데 하루, 황색의 산성까지 하루, 황색 산성을 공략하는 데 하루, 적색 산성까지 가는 데 하루……여기까지만 해도 최소 닷새가 걸린다. 닷새면 이미 변경백들의 강력한 기사단이 적색 산성에 도착해 있다. 어쩌면 징집병들까지 동원되어 있을지 모른다.

“각하, 저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성들에 주둔하는 군인은 자기가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왕군에 맞서 싸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애시당초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전원이 최후의 순간까지 분전하겠지요. 오직 우리의 진군을 하루 늦추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이들이 지키는 요새에 공성전을 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이해했다.”

제파르가 말했다.

“그러나 적이 용맹하다는 것이 싸움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각하. 저는 싸움을 피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성전을 피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제파르, 당신은 아무래도 전략가가 아니라 전술가인 모양이다. 전술이란 전략이 정해진 상태에서 승패를 정하는 전투. 반면에 전략적 겨루기에서 중요한 점은 상대방의 전략 자체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선봉대를 넷으로 나누고, 먼저 한 부대를 녹색 산성과 청색 산성의 중간에 위치시킵니다. 그 부대로 하여금 진지를 구축하게 하십시오. 산성의 수비군은 어리둥절해할 겁니다. 그때 전방에서는 또 다른 한 부대가 공격하게 합니다.”

“양동작전인가.”

후방에서 오백, 전방에서 오백, 도합 천 명의 부대가 산성을 앞뒤로 공략한다. 녹색의 산성쯤은 쉽게 공략된다.

“물론 전면을 공격하는 것보다야 효과적이다. 그렇지만 의문이군. 나머지 오백인대 두 개는 왜 동원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런, 제파르 대장. 양동작전은 책략의 목적이 아니라고. 수단이다.

“산성들에게 우리의 전력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양동작전에 의해 녹색 산성이 함락되면 나머지 산성에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에 침공해온 마왕군의 전력은 천 명이다. 그 천 명을 최대한 보존시키기 위해 양동작전이라는 수단을 썼다, 라고…….”

마왕들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는가. 내가 말했다.

“겨우 천 명의 부대입니다. 나머지 산성들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터. 제국 변경백들은 움직이지 않겠지요.”

“……!”

제파르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런가, 양동작전은 미끼인가!”

“예. 초록 산성 다음에는 청색 산성입니다. 똑같은 움직임을 반복합니다. 오백인대로 하여금 산성을 무시한 채 산지로 진군시키고, 청색 산성과 황색 산성 중간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명합니다. 서두를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틀 정도 걸쳐서 여유롭게 움직이면 딱 좋겠군요.”

내가 얕게 미소를 지었다.

“적들은 우리가 느긋하게 움직일수록 우리의 목적을 혼동할 것입니다. 이번 마왕군의 목적은 산성을 끝까지 돌파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황색 산성 정도까지만 만족하고 세력을 굳히는 게 목적일 수 있다. 그렇게 조바심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적들은 우리의 계책을 망치와 모루 전법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슬쩍 아미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인상이 험악했다. 이야기를 전혀 따라오고 있지 못했다. 기다려라. 너희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줄 테니. 오늘 나는 관대하거든.

“인간군 수뇌부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마왕군의 전력은 약 천 명. 그들의 목표는 무엇인가? 최대한 전력을 보존시키면서 산성을 함락하는 것.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산성에 병력이 밀집되어 난공불락이 형성되는 것.”

고로 인간들은 우리 마왕군이 무엇보다도 산성들 사이의 연계를 끊고자 노력한다고 파악하리라.

“천 명의 공격부대는 공성전에서 기껏해야 천 명의 수비부대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왕군은 수비부대가 천 명 이상으로 불어나는 것을 원천봉쇄했다, 혹여나 산성이 다른 산성으로 원군을 보낼까봐 오백인대로 하여금 통로를 막았다……인간들에게는 산성과 산성 사이에 위치한 오백인대가 모루로, 산성 정면에서 공격해오는 오백인대가 망치로 비출 겁니다.”

이제 인간들 입장에서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가.

내가 히죽 웃었다. 이런, 안 좋은 버릇이 또 튀어나왔다. 나는 무언가가 내 생각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예감하면 꼭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래서야 마왕의 위엄 따위는 찾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웃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각하. 천 명에 불과한 마왕군이 무리해서 산성들을 함락하려고 부대를 나누었습니다. 인간군이 어떻게 나오리라 예상하십니까.”

“우리를 각개격파하려고 산성에서 나오겠군……!”

제파르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는 명백히 흥분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색 산성에는 오백 명이 주둔한다. 후방에서 몬스터 오백, 전방에서 몬스터 오백이 공격해오면 버틸 수 없다. 그러면――인간군은 오히려 자기들 쪽에서 양동작전을 펼치자고 결심할 게 틀림없다.

황색 산성과 적색 산성의 주둔군, 도합 이천 명이 후방의 몬스터 오백인대를 덮친다. 전력 차이가 무려 네 배이다. 몬스터 부대는 빠른 시간 안에 전멸하겠지. 그 시간 동안에 청색 산맥이 전방의 몬스터 부대를 방어한다.

정리하자.

마왕군의 양동작전에 인간군은 각개격파로 대응할 것이다. 먼저 청색 산성이 전방의 몬스터 부대를 방어한다. 황색과 적색의 주둔군이 후방의 몬스터 부대를 급습, 전멸시킨다. 그리고 곧바로 청색 산성에 합류하여 압도적인 병력 차로 나머지 몬스터 부대를 밀어붙인다.

인간군은 필승의 전략이라고 자신할 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만일.

“만일 우리 선봉대의 전병력이 정말로 천 명에 불과하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숨겨둔 나머지 천 명까지 동원하여 청색 산성을 공략합니다. 인간들의 예상과 다르게 총 천오백의 몬스터 부대가 전방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

“각하. 이게 이번 작전의 백미입니다.”

제파르는 눈동자에 흥분감이 넘실거렸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웃어주었으면 했다. 꽤나 재미있는 기만작전이 아니고 뭐냐는 말이다.

적들은 이번 전투를 년 단위로 으레 일어나는 소규모 침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이것은 월맹군의 전초전이다. 월맹군 선봉대라면 저렇게 느긋하게 행동할 리 없다고, 장기전으로 나아갈 리 없다고 적군이 생각하게끔 만든다.

적들은 우리가 전략적으로 장기전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우리는 단기전을 꾀하고, 적들에게 단기전을 강요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투를 끝내지 않으면 청색 산성이 양동작전에 넘어간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어 그것을 이용한다.

적들은 우리가 양동작전을 펼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양동작전은 미끼에 불과하며, 산성 수비군이 이쪽의 병력을 착각하게 한다. 결국 제국 변경백들은 '겨우 천 명이라면 우리까지 동원될 필요는 없다'라고 오판하리라. 저들은 모든 산성의 병력을 동원하면 우리를 손쉽게 헤치울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적들은 우리를 각개격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저들은 청색 산성이 우리의 전방 부대를 붙들어둔다고, 또 적색과 황색이 우리의 후방 부대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로 우리의 후방 부대가 적들의 적색과 황색을 붙들어두고, 또 우리의 전방 부대가 청색 산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적은 우리를 진창으로 밀어넣는다 자신하겠으나 사실인즉 그들 스스로 진창에 발을 늘여놓는 것입니다. 산성 본연의 전략적 임무를 방폐한 순간, 우리 선봉대는 주둔군이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산성들을 피 한 방울 들이지 않고 함락하겠지요. 그리고, 프흡.”

“…….”

“시, 실례했습니다. 기껏해야 황색 산성까지 점령하리라 기대하셨을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막상 본대를 이끌고 와보시니, 짜잔! 적색 산성까지 점령해버렸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뭐라 반응하실까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와서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소리내어 웃었다. 막사에 내 웃음소리가 울렸다. 예전보다는 덜했지만 나는 조울증이 있었다. 아무래도 조증이 빵 터져버린 것 같았다.

“흐하하하!”

제파르 대장도 이번에는 웃음기를 참지 못했는지 나와 함께 따라 웃었다. 역시나, 겉으로는 엄격하고 근엄하기만 한 양반이지만 이 정도 유머감각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유머감각이 없으면서 바르바토스 같은 녀석의 아래에서 심복을 자처할 리 없었다. 그 녀석은 정신머리가 꽤나 돌았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신출내기 마왕들이 어쩐지 약간 하얘진 얼굴로 나와 제파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다들 아연질색한 얼굴이었다.

뭐냐? 방금 전까지 호언장담하던 기세는 어디로 도망친 거냐, 아미? 이건 제법 진미한 농담이라고. 부디 마음껏 웃어달라. 너처럼 정색하고 있으면 모처럼 농담을 꺼낸 당사자가 무안해지겠지. 바르바토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배꼽을 부여잡고 폭소했을 거다. 아미한테 그 정도 개그 센스를 기대하는 건 글러먹었나. 진심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좋다. 단탈리안이 세운 계획대로 간다. 전군, 우선 녹색의 산성을 깨부수라!”

그날 제파르 대장은 전격적으로 내 작전안을 발탁했다.

작전명 <개미지옥>. 대장이 붙인 이름이었다. 적절한 작전명이 아니고 뭔가. 오백인대의 알박기는 그대로 개미지옥이 되어 산성에 주둔하는 이천오백 명의 인간군을 빨아들일 것이다.

산성 수비군들이 스스로를 인류의 번견이라 부른다던가. 개를 자칭하다니 좋은 취미이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너희 번견들은 단 한번의 울부짖음도 주인에게 알리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는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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