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인류의 번견 =========================================================================
회의가 끝났다. 결국 인간종이 얼마나 열등한가 성토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한심했다. 적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패착으로 이어지지만 과소평가하는 것보다야 한결 나았다. 신출내기 마왕들이 스스로 착실하게 패배 요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들에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아군의 사기를 북돋워야 마땅하다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다.”
제파르 선봉장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랬다. 꽝을 뽑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수하로 딸려온 자들의 절반이 저 모양이니 전의가 떨어질 만했다. 만약 신출내기 마왕들이 적군의 선봉대였다면 훌륭하게 전초전을 완수한 셈이었다. 명장들이 아니고 뭔가.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쪽의 사기를 떨어트렸으니.
한숨을 참으며 막사에서 나가려는 참이었다. 제파르가 나를 불렀다.
“단탈리안. 자네는 남게나.”
“예? 알겠습니다.”
반쯤 들린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무슨 일일까. 마왕들이 퇴장하고 금세 막사 안이 썰렁해졌다. 제파르와 그의 부관, 나, 라우라, 이렇게 네 명이 남았다. 제파르가 진중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제6군단 군단장께서 나에게 귀띔하셨다. 자네가 믿음직스러운 자라고. 용병술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어도 지략은 확실하다 말씀하셨다.”
내가 쓰게 웃었다. 또 바르바토스인가. 말괄량이 여동생 같다가 요염한 애인 같기도, 때로는 든든한 누나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방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곤란한 마왕 전하였다.
“저는 일개 모략가일 따름입니다.”
“그대가 발푸르기스 밤에서 파이몬 님을 격파할 때 나 또한 그곳에 있었다. 서열 제71위가 파이몬 님을 옭아매는 광경이 제법 인상적이었음을 밝혀두지.”
칭찬인가? 이 노인은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라피스처럼 천성적인 무표정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위엄과 원숙함이 굳어져서 생겨난 무표정이었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솔직히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지.
아니, 약간 겸손하게 구는 편이 나을까……보아하니 바르바토스를 단지 파벌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제파르 본인을 칭찬해봐야 아부하는 소리로 들릴 공상이 컸다. 여기서는 상대방의 숭배심을 이용하자.
“감사합니다. 허나 청문회는 순전히 제 힘으로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긴밀히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감히 파이몬 님에게 반항하지도 못했겠지요.”
“으음.”
제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색이 만족스러웠다. 한 번 더 치고 들어가도 될 듯싶었다.
“청문회를 계기로 군단장께서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진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경박한 말투를 쓰시는 것 아닌가, 타 파벌이 방심하기를 노리시는 것 아닌가……행동력과 심모원려를 동시에 갖추신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계 토벌이라는 명분, 평원파라는 세력까지 있습니다. 바르바토스 님만큼 군주에 어울리는 분도 없겠지요.”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네.”
오랜만에 띠링! 하는 효과음이 들렸다.
「마왕 제파르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성취감이 가슴에 얕게 퍼졌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내쪽에 유리하게 이용한다. 간단한 승부인데도 성공하면 뿌듯해졌다. 예전부터 생각해오건대 나의 진정한 주특기는 호감도 쌓기였다. 여태까지 호감도 사냥에서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제파르가 말했다.
“나는 군단장을 신뢰하며, 군단장께서 신뢰하시는 자 또한 신뢰한다. 그러나 내 휘하에서 활동하려면 그 나름대로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탈리안, 자네에 대한 따돌림을 조장한 것은 나일세.”
“그렇군요.”
나는 덤덤했다. 도리어 제파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놀라지 않는군?”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제파르 각하께서는 선봉대의 임무를 자각하고 계십니다. 아군의 불화는 가장 경계해야 할 사건이지요. 하지만 진군이 시작하고 일주일 동안 각하께서는 마왕들 사이의 신경전에 일절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령을 바로 세우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바로 맞혔다.”
「마왕 제파르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제파르가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자네는 전술가이기보다 전략가, 전략가이기보다 모략가이겠지. 그런데 군단장께서는 자네를 선봉대에 배속하셨다. 전술적인 승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전초전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디 한번 무훈을 세워봐라, 그 정도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앞으로 적어도 두 달 동안은 내가 군사행동에 개입하지 않아도 좋았다. 여유로운 시간인 것이었다. 제71위라는 서열은 아무래도 마음껏 책략을 펼치기에 불리한 자리이니 군공으로 지위를 만들 수밖에 없다……이거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가.
생각에 잠긴 나를 향해 제파르가 넌지시 말했다.
“서열 제58위의 아미 말이네만.”
왜 갑자기 아미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잠자코 들었다. 지금부터 의문을 해결해주리라.
“본래 무소속이었다가 월맹군이 결성할 즈음해서 평원파에 자진 합류했다. 새로 들어온 마왕이니 우리 파벌 내의 입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선봉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우고, 그걸로 입지를 강화시켜라. 바르바토스 군단장께서 배려하신 게지.”
“아. 그래서 과격하게 발언했던 거로군요.”
중요한 선봉대에 왜 신출내기가 세 명씩이나 배속되나 싶었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다. 확실히 바르바토스와 나는 입장이 서로 달랐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월맹군의 전반적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평원파 수장으로서 파벌원까지 신경 써주어야 했다. 이해했다.
그렇지만 세 명이라니. 너무 많다. 제8차 월맹군의 초전을 결정 지을 선봉대이다. 이런 허섭한 구성원으로도 괜찮으리라 낙관하는 거냐, 바르바토스.
제파르는 내 표정을 살펴보더니 슬며시 미소 지었다. 주름살이 자연스럽게 보조개로 밀렸다. 멋있게 나이가 든 남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내가 댄디 취향의 여성이었다면 웃음 한방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군단장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군.”
“예?”
“자네한테 부하를 만들 기회를 하사하신 것이다.”
부하라고? 무슨 소리냐?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제파르가 말했다.
“군단장께서 자네에게 건네는 진언이다. 언제까지 그림자에서만 나를 도울 셈이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네 세력을 만들어라.……정말로 경은 군단장 각하의 신뢰를 받는 모양이로군, 단탈리안.”
“……!”
내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런가! 그랬는가!
바르바토스는 단지 무공이나 세우라고 나를 선봉대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최근에 평원파에 들어와서 입지가 약한 세 명의 마왕, 그들을 내 세력의 밑거름으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만약 세 명의 마왕을 선봉대가 아니라 뿔뿔이 다른 부대들로 나누어서 소속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을 비호해줄 사람,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을 찾아서 스스로 복속했겠지. 평원파라고 해서 바르바토스가 황제처럼 군림하지는 않았다. 바르바토스 아래에 또 다시 여러 마왕이 작은 세력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출내기 세 명은 순식간에 그 세력들로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 명을 일부러 뭉뚱그려서 선봉대로 보냈다. 선봉대는 대장 제파르를 합치더라도 고작 여섯 명의 마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섯 명 중에 세 명, 게다가 처지가 비슷한 마왕들……당연히 끼리끼리 놀게 되었다.
대장인 제파르는 따로 세력을 만들지 않고 바르바토스의 심복으로 지내는 데 만족했다. 나머지 한 사람의 마왕도 딱히 고위 서열이 아니었다. 신출내기 세 명한테 자기 세력으로 들어오라 권유할 만한 인물은 적어도 선봉대 안에 없었다.
이제 세 명의 목적에는 어느 세력으로 들어가 비호를 받는 것 따위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최대한 군공을 많이 세워 입지를 강화시키자, 그것이 최대의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임에 틀림없다. 달리 할 일이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즉, 이미 세력 구도가 완성된 평원파 내부에서 입장이 정해지지 않은 마왕이 세 명이나 생겨버린 것이었다.
새로운 세력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보다 절묘한 기회는 없었다. 아니, 바르바토스가 그 기회를 만들었다! '신참들한테 공을 세울 기회를 준다'라는 실로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서.
‘내가 그 세 명을 먹어치우라는 거냐. 세력을 만들어, 그림자뿐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너를 보좌하라는 것이냐……!’
전율이 일었다.
바르바토스의 섬세함은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쩌면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바르바토스를 얕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포도주에 취하여 이쪽의 계략에 넘어온 소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여겼을까……멍청하긴!
‘제기랄. 전쟁의 밑그림을 다 그려놨다고 해서 방심했어.’
솔직하게 인정했다. 세력 따위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추구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바르바토스의 눈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세력을 키워야만 하는, 키우지 않으면 곤란한 입장으로 비추었다. 당사자보다 타인이 상황을 더 절박하게 인식한 것이었다.
신출내기 마왕들은 적어도 자기네 입지를 스스로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머저리에 불과하다면 나는 무엇인가? 머저리를 뛰어넘는 머저리, 바보 멍청이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기만 했지 왜 그토록 어리석은 자들이 선봉대에 속했는가 한 번도 숙고하지 않았다…….
“눈빛이 달라졌군.”
제파르가 말했다. 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저리로 남았겠지요. 이 빚은 반드시 군공으로 갚겠습니다.”
“개의치 마라. 군단장께서는 자네에게 전술을 구경시켜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기회에 인간과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일견하도록.”
이런, 심지어 제파르는 나를 위해 파견된 가정교사였는가……내 인식은 바르바토스에 비해 어지간히도 물렀다. 나에게 선봉대가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면 바르바토스에겐 전쟁의 시작 그 자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문득 회의 도중에 제파르가 강조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실책은 비단 일개 부대의 실수가 아니라 제6군단의 과오, 더 나아가 월맹군 전체의 과오가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제6군단 선봉대는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여야만 한다. 단독행동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저것을 신출내기 마왕들한테만 내던진 경고라고 생각했다. 정반대였다. 누구보다도 내가 뼈아프게 새겨 들어야만 했다. 자괴감이 등뼈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나는 대체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 레벨 21에 불과한 녀석 주제에 '나는 저들과 달라' 하고 우월의식이라도 품었는가? 쓰레기 자식 같으니.
제파르의 말 그대로였다. 우리 선봉대는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고 있었다. 아군을 깔보는 일 따위 용납될 리 없었다. 나는 이번 선봉전에서 군공을 세워야 함은 물론이었고, 세 명의 마왕까지 내 세력으로 회유해야 했다. 이런 일에 방심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아서 제파르에게 경례했다.
“소인, 반드시 각하의 지휘를 학습하겠습니다.”
“음. 이만 나가보아도 좋네.”
나는 막사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그렇다. 이건 바르바토스의 깜짝 선물이다. 선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서야 제대로 된 어른이라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소녀가 준 선물임에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좋다. 어디 한 번 네 기대대로 성장해주겠다고, 바르바토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주마……그게 너에 대한 나의 깜짝 선물이자 가장 멋진 답례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