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인류의 번견 =========================================================================
제국력 1506년. 늦봄.
영문도 모른 채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1년이라니, 무슨 농담 같았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을 지금처럼 절감한 적도 없었다. 아직 노인이 되기에는 멀었는데 말이다.
리프의 모험대에 죽을 뻔했다. 흑사병 건으로 돈을 왕창 벌어들였다. 라우라를 구출했다. 잭을 죽였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 그 건으로 니블헤임에서 한바탕 소란에 휘말렸다. 이제 와서는 바르바토스를 설득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함으로써 인간계 전체가 공포에 떨 전쟁을 조장하기에 이르렀다……어딜 보아도 고작 1년 간의 스케줄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워커 홀릭이 깜짝 놀라서 줄행랑칠 지경이었다.
딱 1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나에게 미래를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방구석 폐인 자식아, 넌 앞으로 <던전 어택>과 세계관이 똑같은 곳에 떨어져 최약체 마왕으로서 생고생을 할 것이라고. 아마 미친 놈 취급을 당하겠지. 바로 그 미친 짓거리가 실제로 일어났다. 아이구야.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도 벚꽃이 있었다. 부대가 진을 친 이곳에는 벚꽃 무리가 왕창 피었다. 새하얀 벚꽃잎 아래에서는 무엇이든 눈부셔서, 심지어 오크조차도 아름다워 보였다. 나 나름대로 상념에 잠겨서 꽃구경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주군. 제파르 대장이 회의를 소집한다.”
라우라였다. 그녀는 내 부관으로서 월맹군에 참여했다. 인간을 부관으로 삼았다고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무리도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무얼, 나는 실력주의를 애호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생존시켜줄 수만 있다면 마인이든 인간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고작 오십 명밖에 이끌지 않는 지휘관입니다. 제가 가봤자 의미가 있을까요?”
“제파르 대장은 선봉대 소속 마왕 전원을 소집했다. 주군도 얼굴을 비출 겸해서 가봐야겠지.”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꼭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이런, 아무래도 라우라가 나보다 정신연령이 높은 모양이었다. 무심코 그녀에게 불평을 토로해버렸으니 말이다.
서열 제71위. 그런 내가 받는 취급이란 정말 눈물이 겨웠다. 간판만 마왕이지 통솔하는 부대가 고작 오십 명을 헤아렸다. 그것도 대부분이 최하급골렘, 최하급요정. 다른 마왕들 입장에서는 '이 새끼 뭐야?' 싶으리라.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쪽에 시비 걸어오는 것을 마냥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의외로 쪼잔하다고.
“미안합니다. 이래저래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이 많아져서…….”
“실력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라우라가 초록 눈동자로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주군을 믿는다.”
어이쿠, 정말로 라우라가 어른스러웠다. 인간인 그녀에게는 나보다 훨씬 더 고약하고 질 나쁜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을 텐데. 둘이서 다른 마왕들 뒷담화나 실컷 까볼 생각으로 운을 띄웠다가 도리어 응원을 받아버렸다. 몸이 이어진 이래로 라우라와 나는 유대가 더욱 공고해졌다. 머쓱해서 그만 웃어버렸다.
“그럼 얼굴을 비추러 가볼까요.”
“아아.”
나는 바르바토스가 이끄는 제6군단의 선봉대에 배속되었다.
월맹군 결성이 이루어지자마자, 바르바토스는 재빠르게 제6군단을 조직했다. 평원파 소속의 마왕들은 바르바토스의 명령 아래 일사분란하게 조직 개편에 동참했다. 명령계통, 부대, 군령까지 순식간에 하나의 군단이 완성되었다. 당연히도 제일 먼저 진군하게 된 군단은 제6군단이었다. 우리가 진군하는 광경을 파이몬은 재미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평원파는 전쟁꾼 소굴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 소굴의 대빵쯤 되었고. 자기네가 평소부터 얼마나 전쟁을 준비해왔는지 직접 증명했다. 장담컨대 월맹군이 결성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날 회의장에서 환호성을 터트린 자들은 죄다 평원파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산악파는 열심히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명령계통조차 수립되지 않았다던가.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목소리가 불거지진 않았어도 아무래도 제1군단의 군단장 파이몬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흐. 아무래도 제1군은 꽃구경이나 갈 생각인가봐?’
결정타는 바르바토스가 파이몬의 면전에 대고 날린 대사였다. 다른 군단들이 열심히 닦아놓은 길을 제1군은 뒤늦게 따라가기만 할 속셈 아니냐, 바르바토스는 그렇게 비난했다. 파이몬이 잔뜩 달아오른 것은 당연지사.
매섭게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으나 정작 대꾸할 수는 없었다. 벨리알 건으로 인해 평원파가 선취점을 딴 상황에서 제2라운드도 우리 평원파에 점수를 넘겨주었다. 부디 분발해주기를 빌었다. 그쪽이 분발해야 모처럼 대전쟁을 기획한 나도 보람이 생기지 않겠는가.
“왔는가, 단탈리안.
라우라를 대동하고 막사에 들어섰다. 그러자 상석에 앉은 노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가 제6군단 선봉대 대장으로 임명된 마왕, 서열 제16위의 제파르였다.
“예, 제파르 님. 명을 받들고자 왔습니다.”
“음. 편히 대기하도록.”
제파르가 내 공손한 군례에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턱수염이 멋들어져서 나이가 좋게 들었다는 느낌이 났다. 행동거지나 말투가 진중하여 화려한 면모는 부족했지만, 노련한 숙장(宿將)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었다.
‘저러고도 바르바토스보다 나이가 적다니까, 원.’
마왕은 도무지 겉보기로 나이를 판가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배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라우라는 내 뒤에서 기립.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지 막사 안에는 제파르와 제파르의 부관, 나, 라우라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르셨습니까, 제파르 님?”
“명을 받듭니다.”
시간이 지나자 마왕들이 한두 명씩 들어왔다. 그중에는 군례를 취하는 자도 있었고, 적당히 생략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자가 이전에 월맹군에 참여해본 마왕이었다.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좋겠지. 후자는 이번에 처음으로 월맹군에 참여하는 신출내기 마왕이었다.
신출내기들은 인간 군대를 가리켜서 겁쟁이니 애송이니 비웃으면서 월맹군의 위엄을 조금만 보여주어도 도망쳐버릴 거라고 떠들었다.
머저리 같으니! 애송이는 바로 너희들이다. 인간군이 정말로 겁쟁이였다면 월맹군이 지금까지 일곱 차례나 실패할 일도 없었다. 신출내기들은 마왕군의 한심함과 인간군의 무서움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흠.”
슬쩍 살펴보니 제파르도 안색이 불편했다. 눈치 채기 힘들지만 오른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는 제4차에서 제7차까지 월맹군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왕군이 인간군에 패배했는가 뼈저리도록 알고 있으리라.
지금 신출내기 마왕들이 보이는 태도는 기존에 마왕군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였다. 마음에 안 들겠지……바르바토스가 선봉대의 대장으로 임명한 만큼 제파르는 꽤나 유능한 인사인 듯했다. 기대해볼까.
“그나저나 단탈리안 님은 특이한 자를 부관으로 데리고 있군요?”
이런, 나에게 화살촉이 돌려졌다. 신출내기 한 명이 내쪽을 보고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서열 제58위의 마왕 아미였다.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로 몰렸다. 화제가 떨어졌는가. 나를 씹을거리로 선정한 것 같았다.
“인간을 부관으로 삼다니, 전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례라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 부관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그 능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미색이 능력이라면 확실히 비범한 부관인 듯싶습니다만.”
신출내기들이 재밌다면서 웃었다. 라우라의 미모를 보고 혹시 색욕을 풀기 위한 용도로 데려온 것 아니냐며 놀린 것이었다. 아이구야, 머저리들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조금 어울려야겠다.
“무얼요. 귀하의 부관보다야 여러모로 쓸 만합니다.”
“……지금 저를 모욕한 것입니까?”
“천만에요. 듣자하니 아미 님의 부관이 서류업무를 전부 저의 부관한테 일임하고 있다 하는군요. 제 부관을 신뢰해주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만, 혹시나 아미 님의 부관이 서류업무에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습니다.”
아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일종의 따돌림인지 두세 명의 마왕 부관들이 라우라한테 일감을 몰아넣고 있었다. 인간 주제에 마왕군의 업무를 잘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 뭐 그런 의미겠지.
의도는 둘째 치더라도 자기 부대의 업무를 동급의 타 부대에 맡긴다니 잘하는 짓이었다. 만약 내가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장부를 조작해버리면 어쩔 텐가.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제파르 대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미. 방금 지적된 것이 사실인가?”
“……죄송합니다만 저는 들어보지 못한 사항입니다. 단탈리안 님! 군중에서 쓸데없는 모함은 삼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라.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미 님의 부대는 타 부대에 비해 보급량이 2할 가량 많더군요. 특히 술과 같은 보급품이 말입니다. 전쟁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축제 분위기입니까? 자신만만한 모습이 엿보여서 부럽습니다.”
“네 자식이!”
아미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십의 마왕 주제에 감히 나를 욕보이는 게냐!”
아니, 부럽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아무리 머리가 이상해져도 전투를 앞두고 술독에 빠지진 못할 거다. 당신과 같은 정신머리로 세상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나에게도 그런 정신력을 전수해주기를.
오십의 마왕은 내 별명이었다. 겨우 오십 명의 부대를 이끌고 월맹군에 참여했다고 붙은 명칭이었다. 짓궂게도 오십은 백의 절반이므로 '오십의 마왕'에는 반쪽짜리, 반푼어치라는 의미가 같이 담겨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단탈리안보다 반푼어치라고 불리는 날이 많아졌다. 참 나, 마왕이란 종자는 어지간히도 시비 거는 것을 좋아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제파르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만. 이것이 무슨 추태인가?”
서열 제16위의 위엄을 거스르기는 두렵겠지. 아미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앉았다. 솔직히 바르바토스에 비하면 귀엽기까지 한 상대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 녀석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을 듯했다.
마지막 마왕이 막사에 들어왔다. 그는 험악한 공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파르는 잡담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우리 제6군단이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진군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제6군단의 선봉대, 즉 이번 월맹군에서 최선두를 맡고 있다. 우리가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에 따라 역사가는 제8차 월맹군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나 제파르는 개인적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 서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막사에서 박수가 터졌다. 역사의 현장이라는 낱말에 몇몇 마왕이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제파르가 오른손을 척 들었다. 자연스레 갈채가 잦아들었다.
“알겠는가? 우리의 실책은 비단 일개 부대의 실수가 아니라 제6군단의 과오, 더 나아가 월맹군 전체의 과오가 되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는 우리가 월맹군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제6군단 선봉대는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여야만 한다. 단독행동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과연. 당근을 내민 다음에는 채찍을 인지시키는가.
제파르가 대장이라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다 똑같이 마왕이자 군주였다.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폭주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명령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군대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제파르는 이번 기회에 위엄을 바로 세울 의도였다. 실패하면 다른 마왕들에게 끝없이 조롱을 당하게 될 거다, 그러니 내 명령에 얌전히 수긍해라, 그런 이야기였다. 여기 모인 마왕들도 말귀를 알아들었다면 앞으로 자중하겠지.
문제는 말귀조차 못 알아먹는 바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간 놈들 따위, 오우거의 숨소리만 들어도 땅바닥에 주저앉을 겁니다!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미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두 명의 마왕이 맞장구를 쳤다. 인간은 두려워할 바가 못 된다면서. 요컨대 회의에 참석한 여섯 명의 마왕 중에 세 명이나 꽝이었다.
자그마치 절반이 꽝……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제대로 견뎌낼 수 있을까, 이번 전쟁. 유능한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무섭다. 내가 그 진리의 산 증인이 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