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필리버스터(filibuster) =========================================================================
바르바토스가 속삭였다.
“절대 눈 마주치지 마. 질질 싼다.”
약간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 마왕들은 대체로 유아독존의 성격을 가졌다. 자기보다 서열이 높다고 해서 상대방한테 무조건 존댓말을 쓰거나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법도 드물었다. 그런데 바알이 등장한다니 모든 마왕이 허리를 숙이지 뭔가.
“인사하는 게 아니야. 인사하는 척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바알 아저씨랑 눈을 마주치면 공포를 느끼거든. 겁나게 쫄려. 그 기분을 느끼기 싫으니까 대충 인사하는 척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넘기려는 거야.”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마왕들은, 바알과 시선이 마주치느니 차라리 극진하게 예의를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공포를 느끼길래 자존심이 히말라야 산맥에 오줌을 싸갈길 정도인 녀석들이 인사하는 척하면서 눈길을 피할까.
“그렇게 무섭냐?”
“궁금하면 쳐다보시든가.”
바르바토스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말리진 않겠는데 기저귀는 미리 차라.”
회의장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경첩이 삐꺽였다. 쇠가 쇠를 긁는 소리가 음산하게 찢어졌다. 그와 함께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 스무 개가 요란하게 깨졌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대문이 열린 틈새로 미약하게 새어나오는 빛, 그게 유일한 조명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 발자국씩 느릿하게 걸어왔다. 자신이 밟은 그곳을 영토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듯 확고한 발걸음으로. 그것은 회의실 대문에서 맞은편까지 한치의 어긋남 없이 직진했다. 발걸음이 내딛을 때마다 공기가 진동했다. 그 자는 하나의 발걸음으로 드넓은 건물을 꽉 매웠다. 발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가 이내 옅어질 즈음해서 다시 발소리가 울렸다. 이어지지 않을 듯 이어지는 음악처럼. 그는 마치 발자국 소리에 회의장이 버티지 못해 부서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같았다.
그가 회의장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우뚝 멈추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탓에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위치를 짐작컨대 중립파 일원이 모인 곳에 가까웠다.
“마르바스. 잘 지냈는고.”
“……덕분에. 바알.”
“중립이란 외로운 길. 그대의 외로움이 바다에 포류하는 일개 선원의 외로움이 아니라 홀로 바닷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선장의 외로움이기를 기대하노라.”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산악파가 모인 장소 근처에서 발소리가 중단되었다.
“파이몬.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미모로다.”
“황공하와요……바알 님.”
“전략이란 비단 전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대 역시 멀리 내다보는 이상이 있을 터. 비록 느리더라도 확실한 걸음으로 이상에 다가가기를 응원한다.”
발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발소리는 바로 가까이 다가와서 멈추었다.
그가 바르바토스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영원토록 순수한 전사여.”
소름이 끼쳤다. 귓가에, 아니 귓속에서 목소리가 지잉 울렸다. 귓구멍을 통해 뇌수를 흔들어버리는 듯했다. 발끝부터 균형 감각이 어긋났다. 나는 필사적으로 자세를 유지했다. 사전에 바르바토스한테 경고를 듣고 하반신에 꽉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꼴불견 사납게 넘어졌을 것이다.
「마왕 바알이 스킬 <문무격하(文武格下)>를 발동합니다.」
「당신이 무력과 지력 능력치에 따라 스킬에 저항합니다.」
「행운의 주사위가 떨어지다가 어떤 기적적인 확률에 의해 공중에서 멈추었습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 차이로 인해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시겠지.’
딱히 경악스럽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던전 어택>에서 바알한테 문무격하라는 이름의 스킬 따위 없었다. 아마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바알은 게임과 다르게 훨씬 더 많은 스킬을 보유한 모양이었다.
얌전히 능력치 패널티를 받아들이려는 때, 무언가가 내 앞을 감싸었다. 바르바토스의 그림자였다. 그녀가 나한테서 바알을 슬쩍 가려주었다.
“오랜만이야, 아저씨. 여전히 정력이 펄펄하네?”
「마왕 바르바토스가 스킬 <전법무효(戰法無效)>를 발동합니다.」
「스킬 상쇄! 패널티 효과가 지워집니다.」
깜짝 놀랐다. 이 멍청한 로리가!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비록 공적으로 평원파에 속하기로 마음먹긴 했어도 타인의 눈에 띄어서야 곤란했다. 나는 약자였다. 약자는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할 권리가 없었다. 강자의 뒤편에 숨어서 약삭빠르게 생존을 추구하는 게 약자 본연의 자세였다. 바르바토스가 지나치게 나를 감싸고 돌면 그녀와 내가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었다고 주변에다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르바토스의 행동에 바알이 흥미로워하는 목소리를 뱉었다.
“호오.”
“부인도 없으면서 불타는 몸으로 어떻게 밤을 지새우나 참 궁금해. 혹시 이거야, 이거?”
바르바토스가 상스럽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볼 순 없었어도 아마 외설적인 손짓이라도 만들어서 노는 것 아닌가 싶었다. 바알도 낮게 웃었다.
“적어도 남한테 밝히기에는 그닥 떳떳하지 않은 성생활을 영유하고 있다. 그대가 내 성생활에 관심을 가져주니 놀랍고도 흥미롭다. 내 과오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성생활은 유복한지 하문해도 되겠는가.”
“오, 적어도 이쪽 방면에 있어서는 저기 파이몬 창녀보다도, 아저씨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재미있는 성생활을 즐기고 있어. 솔직히 난 아저씨가 성교를 하는 광경을 잘 상상하지 못하겠어. 박고 빼고, 박고 빼고, 찌익, 그러다 끝나는 것 아닌가 싶거든.”
“크하하하!”
웃음소리가 회의장을 때렸다. 건물 구석구석까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등줄기에 불쾌한 무언가가 저릿저릿하게 느껴졌다.
바알의 웃음에 동조하며 주변의 마왕들이 조심스레 히히덕거렸다.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 모습을 보고 저들 하나하나가 인간계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마왕임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나 바알,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었도다. 나에게 농을 던지는 자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순수한 전사여. 내 어찌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목소리가 한층 그윽해졌다.
“삶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나에게는 나비와 비눗방울, 그리고 필멸자 가운데서 나비와 비눗방울 같은 자가 인생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고, 아저씨야. 아저씨는 다 좋은데 가끔 말을 하는 건지 시를 읊는 건지 모르겠어.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니까. 우리 둘이 사실은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기적적인 확률에 의하여 서로가 하는 말을 우연히 알아듣는다고.”
“어쩌겠는가. 내 삶이 지나치게 오래되어 요즘 아해들과 말투가 다른 것을.”
나도 이천 년은 살았는데, 하고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바알이 또 한번 웃었다.
“그대의 재롱을 보아 넘어가겠다.”
“…….”
무엇을 넘어가겠다고 말한 것인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나를 보호한 것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바알이 우리 곁을 훌쩍 떠나서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제 여섯 명의 최고위 마왕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묻고 대답을 구하는 것이 인사라면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흐으. 뒈지는 줄 알았네.”
“야, 너 진짜 왜 그딴 짓을.”
“밥팅아. 입 닥쳐. 저 아저씨가 너 노려본 거 모르냐.”
뭐?
“……나를 노려봤다고? 왜?”
“썅, 내가 알겠냐.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너 찌부라졌어. 약해빠진 주제에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틱틱거리기는.”
바르바토스가 입을 삐죽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바알에게 관심을 끌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었다. 애시당초 접점 자체가 있기라도 했는가. 기껏 생각나는 것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사건, 즉 동족살해인데 서열 제1위가 그 정도로 나한테 관심을 보인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알의 성격을 대략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 바알은 바르바토스보다 더한 주전론자였다. 아니, 투쟁 예찬론자라고 표현해야 마땅하겠다. 삶의 의미는 오로지 투쟁에 있으며, 마인이 쇠퇴한 이유가 다름아니라 투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피로 얼룩진 전쟁터를 누구보다 신봉하는 대마왕. 그것이 바알의 본질일 터.
‘설마 내가 흑사병 유언비어를 퍼트린 걸 알아챘나?’
안 되겠다. 정보가 너무 적었다. 판단할 재료가 부족했다……적어도 바알의 호감도가 20 이상이라면 심리상태라도 엿볼 텐데, 상태창을 불러봐도 홀로그렘에는 괴물 같은 체력과 공격력 그리고 방어력밖에 표시되지 않았다. 나는 일단 판단을 보류했다. 제기랄, 머리 한구석에 새까만 이무기 한 마리가 눌러앉은 기분이었다.
“시절이 다망함에도 한 자리에 모여든 그대들한테 수고의 말을 건넨다.”
바알이 상석의 정중앙에 앉았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덩어리 대여섯 개가 생겨났다. 샹들리에를 대신하여 불빛이 회의장을 어렴풋하게 비추었다.
바알이 잠시 휴지(休止)를 두고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나는 차마 그를 정면으로 마주볼 수는 없어서 약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다수의 마왕이 나처럼 자세를 취했다. 중립파의 마르바스, 산악파의 파이몬, 평원파의 바르바토스……극히 일부만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서 바알이 앉은 쪽을 직시했다. 시선이 권력이다. 이 명제가 이토록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본래 마왕들의 행로는 기나긴 토론과 깊은 숙고 끝에 결정 내려야 할 사항. 최고위 마왕들은 되도록 토의에 간섭하지 않고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나 바알이 의사를 표명하고자 하노라.”
침묵이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중력이라도 거세진 것 같았다. 회의장에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개전(開戰)!”
단 한 마디로 제8차 월맹군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와중에 바알이 마왕들을 일일이 거명하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이 이곳에 모인 예순 명의 마왕 전원을 휘어잡았다.
“서열 제9위 파이몬.”
“예.”
파이몬이 우아하지만 빠른 발걸음으로 회의장 가운데로 걸아나갔다. 그녀가 드레스의 양쪽 끄트머리를 잡아올리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소녀 파이몬. 명을 받들겠사와요.”
“그대를 제1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산악파를 이끌고 튜튼 왕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으로 진군하라! 인간종이 다시금 살아서 대기를 맛보지 못하도록 그 폐를 갈갈이 찢을지언저. 그대에게 산악파를 독자적으로 통솔할 권리를 인정한다.”
“예.”
파이몬이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반주전론과 친인간주의의 대표주자인 파이몬이 한번의 망설임도 없이 부복한 것이었다. <던전 어택>에서 그녀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인간종에 친화적인 전략을 펼쳤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파이몬이, 아무런 반항도 없이 인간 국가로 침공하겠노라고 긍정했다!
“서열 제5위 마르바스.”
“아아.”
마르바스가 진중한 걸음걸이로 회의장까지 나아갔다. 그는 허리를 숙이지 않았으나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두었다. 군례였다.
“고귀의 마르바스. 군명을 구한다.”
“그대를 제2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중립파를 통솔하여 아나톨리아 제국과 폴리투니아 왕국 방면으로 행군하라. 대륙 동부를 유린하도록.”
“대륙의 동쪽은 앞으로 사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울 것이다.”
마르바스가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서열 제2위의 아가레스.”
“예엡.”
같이 상석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일어났다. 그녀가 장난스러운 팔자걸음으로 회의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는 척, 하고 이마에 손을 갖다댐으로써 군례를 갖추었다.
“지진의 아가레스. 뭐든지 말해보라 이거야.”
“그대를 제3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소속이 없는 마왕들을 이끌어 모스크바 왕국과 칼마르 연맹국을 격파하라! 대륙의 북쪽이 본디 만년설의 영토였음을 인간들에게 알려주거라.”
“에엑, 추운 건 싫은데……별 수 없지. 대륙의 북쪽에서 앞으로 인간이 눈을 구경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가 다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팔을 벌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서열 제3위의 바싸고. 그대를 제4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서열 제6위의 발레포르와 더불어 버니시아 왕국의 해군을 초토화해라!”
“충분하다.”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장 가운데에 기립했다.
“서열 제4위의 가미긴. 그대를 제5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서열 제7위의 아몬과 함께 모든 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라! 그대들은 우리 마왕들의 영토에 머물도록.”
“어머머. 저만 재미없는 일 시키시고, 어쩌엄. 바알 님도 얄궂으셔.”
여인이 살풋 미소를 지으면서, 그러나 군례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로 회의장 가운데에 섰다.
이윽고 바알의 목소리가 우리를 향했다.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
“언제 부르시나 조마조마했다고.”
바르바토스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기라성 같은 마왕들 곁에서도 그녀가 쾌활하게 떠들었다.
“내가 갈 곳은 뻔하네. 그치?”
“그대를 제6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합스부르크 제국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그대에게 평원파 전원의 통솔을 인정한다.”
“시발, 좋다 이거야! 인간들을 죄다 씹어 죽여주지!”
그녀가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리함으로써 산악파, 중립파, 무소속, 최고위 마왕, 평원파까지, 모든 인원이 거론되었다. 남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마왕들 사이에서 열기가 고조되었다. 전의가 들끓기 시작했다. 모든 마왕이 참여한 월맹군은 이천 년만에 처음이었다. 유린, 정복, 파멸. 무엇보다도 마왕을 위하여 고안된 단어들이 지금 이 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피냄새를 감지하고 군침을 흘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 바알은.”
바알이 말했다.
“제7군단 군단장이자 총사령관임을 선언한다. 본인은 단독으로 프랑크 제국을 섬멸하겠다. 마왕군은 총 일곱 군대로 나뉘며, 일곱 갈래의 파멸과 일곱 갈래의 비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동지들! 인간들에게 본디 세계의 주인이 누구였는가 깨닫게 만들라.”
그가 일어서서 등에 찬 검을 빼들었다.
“월맹군이여! 진군하라!”
그 직후, 짐승들의 포효가 회의장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