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73화 (73/510)
  • 00073 필리버스터(filibus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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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블헤임 시장(市長) 관저.

    얼마 전에 청문회이 열린 그곳에서 다시금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발푸르기스 밤이 사교를 목적으로 조직된 모임이었다면, 지금 마왕들은 인간계에서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급히 모여들었다.

    규모도 달랐다. 서른두 명이 참석한 발푸르기스 밤과 달리 여기엔 자그마치 예순 명의 마왕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상 마왕 전원이 참여한 것이었다.

    “프랑크 제국을 불태워버려야 한다! 어린애와 여인 가릴 것 없이.”

    “퇴장해라! 그딴 말만 지껄일 거면 당장 꺼지라고!”

    “나가! 평원파 놈들의 헛소리는 들을 것도――.”

    “지상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인간종의 창자를 끄집어 헤쳐!”

    관저의 회의장이 소란스러웠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떠들었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어 나에게는 회의장 자체가 하나의 큼직한 입구멍처럼 보였다. 그 커다란 입구멍이 쉬지 않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옹알거리고 있었다.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귓속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군.”

    “흥. 마왕들이 진지하게 벌이는 회의란 대체로 이 짝이야.”

    바르바토스가 화난 얼굴로 대답했다. 나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표정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곳에 평원파의 거두로서 참가했고, 그만한 위엄을 내보여야 했다. 평원파는 자기 소속의 마왕을 한 명 잃었다. 그 사실에 매우 분노했음을 주변에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슬쩍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회의장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뉘었다. 건물 왼쪽에 대다수의 마왕이 서 있었다. 산악파. 그중 파이몬은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건물 오른편은 우리 평원파가 차지했다. 바르바토스를 중심으로 평원파 마왕들은 양옆으로 길게 섰다. 입구 쪽에는 열 명 남짓하는 중립파의 마왕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저번 청문회에서 사회자를 맡은 서열 제5위의 마르바스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입구 맞은편, 상석. 다섯 명의 마왕이 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뚝뚝하거나 심심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는데, 그들이야말로 회의장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명의 제왕이었다.

    서열 제2위 아가레스.

    서열 제3위 바싸고.

    서열 제4위 가미긴.

    서열 제6위 발레포르.

    서열 제7위 아몬.

    회의가 시작하고 나서 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지금 떠들썩하게 고함치고 소리지르는 자들은 전부 여섯 명의 제왕을 눈치 보고 있었다. 여섯 제왕은 침묵하고 있는데도 무형의 압박감을 발산했다. 나 또한 살에 닭살이 돋았다. 무시무시한 아우라였다.

    내가 바르바토스한테 속삭였다.

    “야, 쟤들은 왜 벙어리 흉내를 내고 앉았냐?”

    “바알 아저씨가 안 왔잖아.”

    바알은 서열 제1위의 마왕을 가리켰다.

    “지금 아무리 떠들어봤자 바알 아저씨가 오면 말짱 도로묵이거든. 괜히 뭘 주장했다가 아저씨가 싫다고 해봐, 시발. 체면만 구기는 꼴이지.”

    “바알이 올 때까지 이 시장통 꼬락서니를 견디라고? 끔찍하군.”

    “흐응. 그래, 그건 끔찍하긴 해. 한번 정리를 해줘야겠네.”

    바르바토스가 벌떡 일어섰다. 평원파 소속 마왕들이 입을 다물었다. 작은 몸집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성량으로 바르바토스가 소리 질렀다.

    “그만!”

    회의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한 순간에 소란이 잦아들었다. 말다툼을 벌이던 마왕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가 눈을 흘겼다. 마왕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토스가 평소와 다르게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열 제49위의 크로셀이 죽었다. 서열 제50위의 푸르카스도 마왕성을 잃었다. 인간계에서 마인의 우방을 자처하던 아인종 부족들은 간단하게 우리를 버렸다.”

    그녀가 오른손을 휘저었다. 공중에서 거대하고 투명한 지도가 나타났다. 지도에는 인간계 대륙이 그려져 있었고, 일흔두 개의 마왕성이 각각 표시되어 있었다. '크로셀'과 '푸르카스'라고 표시된 두 군데에 가위표가 쳐졌다.

    “가장 최근에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북쪽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진 자, 있는가?”

    “합스부르크의 제도에 있는 제 정보원이 말하기를.”

    중립파에 속한 마왕 한 명이 대꾸했다.

    “제국군은 발렌시아 지방을 향해 떠났다고 하는군요. 서열 제68위의 벨리알 혹은 서열 제61위의 자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스부르크 북부 지방의 침략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말도 안 되오!”

    산악파의 마왕이 버럭 소리쳤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움직이지 않았소. 우리 마왕군은 제국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소. 인간종들은 침략하고 있는 게 아니요, 아인종 부족들을 회유하고 있지! 이 틈을 타서 동맹군을 구하는 것이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요정 부족과 난쟁이 부족이 인간계의 사신을 접견하고 있소! 대륙 전체에 걸쳐서 대(對)마왕동맹군을 결성하려는 게요. 우리는 또 다시 인간계의 아인종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지 모르오.”

    “헛소리!”

    이번에는 평원파에서 한 마왕이 대응했다.

    “요정과 난쟁이는 결코 중립을 어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 마왕들의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동맹군을 결성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군대를 움직인 나라는 합스부르크 제국만이 아닙니다! 열두 국가 전부 군대를 동원했어요. 그들은 검은 사막 입구에서 군대를 모을 속셈입니다.”

    쿠웅, 하고 회의실이 울렸다. 바르바토스가 발을 내리쳐서 약한 지진을 일으킨 것이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가 말했다.

    “먼저 정보를 취합한다. 서로 알고 있는 정보가 달라서야 토론조차 못 될 터. 파이몬.”

    “……소녀를 부르셨사와요?”

    산악파의 수장 파이몬이 대답했다. 그녀는 바르바토스가 자신을 부른 것에 의뭉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원수로 유명했다. 바르바토스 역시 파이몬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싫어했으나, 내 간절한 부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평원파에서는 인간계의 열두 국가가 모두 군대를 동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각 군대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지. 산악파에서는 어때?”

    “…….”

    파이몬이 턱에 팔을 괴었다. 어떻게 대꾸할지 고민하는 것이겠지. 그녀가 평원파와 똑같은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았다. 그녀에게 정보를 흘리라고 지시한 사람이 다름아니라 나이기 때문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나를 참모로 발탁했고, 내 계획 아래 평원파는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파이몬이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소녀도 열두 국가의 군대가 움직였음을 파악했사와요.”

    “군대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꽤나 잘 알겠지.”

    “……부정하지 않겠사와요.”

    바르바토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공중에 떠오른 지도상에서 직선들이 굵게 그어졌다. 총 열두 개의 직선들은 인간계의 군대를 의미했다. 직선들이 각 나라의 도시에서 출발하여 어디론가 향했다. 그 도중에 이미 멸망해버린 크로셀과 푸르카스의 마왕성이 있었다.

    마침내 직선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대륙 북쪽. 절대다수의 마왕성이 위치한 곳이지.”

    “…….”

    파이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긍정을 뜻함을 여기 모인 모두가 알았다. 회의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마왕들이 요동쳤다. 고함소리가 홍수같이 쇄도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파이몬 님!”

    “단순한 침공이 아니다! 인간 놈들이 연합하고 있어!”

    “쓰레기 버러지 새끼들이! 감히 우리의 영토를 노린다는 얘기인가!”

    내가 마음속으로 웃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나는 인간계의 행보를 제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바르를 협박함으로써 쿤쿠스카 상회를 움직였다.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제법 많은 뇌물을 써가면서 인간계의 수뇌부들에 접근했고, 정보를 유포하는 데 성공했다.

    열두 군대의 경로가 겹친 것이 그 결과였다.

    인간의 국가들은 자국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적당히 약한 마왕성, 그리고 최대한 약탈거리가 많은 마왕성을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쿤쿠스카 상회에서 슬쩍 건네주었다. 딱히 거짓된 정보를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요구조건에 걸맞는 마왕성들을 내 나름대로 선별했을 따름이었다. 인간들은 자기네의 경로가 서로 겹친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나 침략당하는 마왕들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열두 군대의 진로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단순히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리 없었다. 인간계가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하는 것 아닌가 걱정되겠지. 실제로 벌써 경로에 위치한 마왕성 두 개가 함락되었다. 그중 한 명의 마왕은 전투 중에 죽기까지 했다. 인간계의 침략이 심상치 않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법했다…….

    “도와주십시오! 제 마왕성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콧수염을 기른 마왕이 비명을 질렀다. 바르바토스에게 귓속말로 물어보니까 서열 제68위의 벨리알이라고 알려줬다. 나와 여러모로 악연이 깊은 자였다. 벨리알이 허둥지둥거리는 이유는 간단했는데, 합스부르크 제국군이 행군하는 경로에 바로 자기의 마왕성이 자리한 탓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이천 명. 서열 제68위에 불과한 벨리알이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벨리알은 지금 발등에 도끼가 떨어진 기분이지 않을까.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

    “인간들에게 우리의 대의가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맹수이고 인간은 어디까지나 먹잇감, 사냥하는 자가 사냥당하는 것에 먹히는 경우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여러분, 제발!”

    마왕들이 귀찮은 듯 벨리알을 외면했다. 당장 자신에게 불길이 닥치지 않는 이상 미래의 경쟁자가 줄어드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마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벨리알이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가 힘없는 걸음걸이로 파이몬한테 다가갔다. 같은 산악파의 수장인 그녀에게 기댈 의도인 것일까, 벨리알이 무릎을 굽히고 파이몬에게 손을 뻗었다.

    “파이몬 님. 저, 저를 구해주십시오. 천 명, 아니, 오백 명이라도 군대를 파견해주신다면! 이 벨리알, 영원토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파이몬이 침묵했다. 과연 현명했다. 이곳에서 파이몬이 원군을 보내겠다고 말해버리면 산악파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고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산악파로서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일단 가만히 있으세요.”

    “파이몬 님!”

    벨리알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파이몬은 방금 산악파 전체를 위하여 벨리알 한 사람을 내버렸다. 파벌의 수장으로서는 이성적인 선택일지 모르겠으나, 정작 버림당한 벨리알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지금이다.

    내가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에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벨리알. 나 바르바토스가 그대를 도와주겠다.”

    “저, 정말입니까!?”

    마왕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서로 대적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평원파 수장인 바르바토스가 직접 산악파의 일원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파이몬 또한 인상을 찌푸리고 바르바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건 말건 바르바토스는 나와 상의한 바대로 말해나갔다.

    “우리는 동포이다. 평소에 적대할지라도 인간계 정복이라는 단 하나의 천명 아래 살아가고 있지. 작금에 인간 놈들이 우리들의 영토를 넘보는 터에 어찌 평소의 은원에 얽매여서 대의를 외면할까! 나 바르바토스는 즉각 죽음의 기사 오백 명을 동원하겠노라!”

    “오, 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리알이 감격했다. 죽음의 기사 오백 명이면 단독으로 제국군 이천 명을 압살할 수 있었다. 벨리알은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바르바토스에게 절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파이몬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지나치게 조심했다, 파이몬.

    이로써 산악파에 속한 마왕들은 파이몬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편이 멸망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파이몬, 다른 편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원군을 내주는 바르바토스. 어느 쪽이 더 믿음직스러운가는 명약관화하겠지. 첫 라운드에는 평원파가 점수를 챙겼다.

    바르바토스와 내가 그려놓은 밑그림대로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던 차였다.

    “서, 서열 제1위!”

    회의장 입구에서 문지기가 외쳤다. 문지기는 겁에 질려 있었다.

    “마계 최초의 군주이자 대공! 육십육 개의 군단을 이끄시는 영도자요, 모든 검의 주인이신! 바알 폐하 납시오――!”

    회의장의 육중한 대문이 먼지를 일으켰다.

    마왕들이 입구를 향하여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석에 앉은 여섯 명의 최고위 마왕마저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마계의 진정한 주인이 행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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