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필리버스터(filibuster) =========================================================================
회의가 끝나고.
엘리자베트 황녀는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머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도저히 못해먹겠다!”
“고, 고정하십시오.”
“고정? 지금 본인이 고정하게 생겼나? 뭐, 성적 낭만이 어쩌고 저째? 개 같은 놈들, 너희를 씹어먹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인육성애자가 되겠노라!”
황녀는 분을 이기지 못해 벽을 찼다. 쾅, 하고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오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검사이기도 했으며, 벽은 그녀의 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기사 샤를이 눈을 찔끔 감았다. 그녀가 흥분하면 설령 황제가 친히 방문해도 말릴 수 없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제국 신민이 나날이 죽어나가고 있다! 저들의 유흥에 재정은 파탄난 지 오래, 오로지 군부만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 그런데 저 개자식들은.”
“성스러운 입에 비천한 낱말을 입에 담지 마시옵소서…….”
“저 개새끼들은 회의에 모여서 음흉하게 노가리나 까고 있다!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영지 관리는 대리인에게 전부 맡겨버리고, 지들은 제도(帝都)에 모여 방탕한 나날만 보내는 주제에!”
황녀가 씩씩거렸다.
“이 나라는 글러먹었다. 시궁창이나 다름없어.”
“가, 각하.”
기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합스부르크 제국에 망조가 들었다는 사실이야 비단 제국 신민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인간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는 제국의 심장인 황궁. 함부로 국가를 모욕했다가 어떤 죄목이 씌워질지 몰랐다. 기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녀가 소리질렀다.
“본녀가 회의에 참여한 것이 그리도 아니꼽단 말인가!”
그녀는 빤히 알았다. 귀족들은 무능했지만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귀신처럼 약삭빨랐다. 성적 낭만이니 뭐니 아무짝에도 쓰잘데기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버리는 까닭은――다름아니라 황녀를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최고회의에 제1황자와 제2황자가 참석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아마 지금쯤 아무 시녀나 잡아서 질펀하게 허리나 놀려대고 있겠지. 그런 상황에서 황녀가 회의에 참석했다. 제1황자와 제2황자의 편에 가담한 귀족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했다.
자칫 의제가 황녀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불륜이니 근친상간이니 정숙한 여인에게 한없이 곤란한 주제로 끌고들어 갔다. 황녀가 개입하지 못하게끔. 잘못하다 ‘황녀께서 동성애와 근친상간에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면 정치적 파장이 어디까지 번질지 가히 짐작하기 어려웠다……끝끝내 황녀는 그 지난한 성적 담론이 마무리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엘리자베트 황녀한테 우회적으로 항의한 것이었다.
─ 저희는 바보가 되어봤자 잃을 명예도 체면도 없습니다.
─ 그렇지만 고상하신 황녀 전하께서는 잃을 것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 이곳은 오직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는 회의실. 황녀 전하께서는 괜히 귀를 더럽히지 마시고 모쪼록 퇴청하십시오. 국가의 대중소사는 저희가 알아서 합의하겠나이다.
철저하게 황녀를 회의에서 배격했다. 심지어 황녀파에 속하는 귀족까지 그에 동조했다. 아마도 아랫것들에게 일을 맡기고 편히 계시라는 의도였다 변명하겠지만 어찌 그 속내를 황녀가 모르겠는가.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기네 권리를 침해받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시간을 넘겨서 회의가 종료. 단 하나의 의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귀족들이 해산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황녀가 귀족 두 명을 부당하게 폭행했다는 소문이 시녀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었다.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 이익집단이 어디까지 꼴불견사납고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황녀는 새삼스레 절감했다.
“저런. 각하의 발길질 소리가 궁중 구석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넉살좋게 웃었다. 남자는 외무부상서(外務副尙書)로서 황녀파의 일원이었다. 황녀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히델베르크 경. 들으라고 하는 걸세, 들으라고.”
“그래봤자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시지요? 신경줄이 굵기로는 자타공인 대륙 최고인 그들입니다.”
“돌아버리겠군.”
그녀가 고급스러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나니 분이 풀렸다. 그녀가 탄식했다.
“본녀는 아직 열여섯 살이야. 그런데 새치가 날 지경이네……십 년 안에 본녀가 화병으로 죽을 것임을 내기해도 좋네.”
“각하께선 머리카락이 은색이지 않습니까. 새치가 난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건넨 건가?”
황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외무부상서가 웃었다.
그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전령이 당도했습니다. 브르타뉴-바타비아 동맹군이 서열 제49위 마왕 크로셀의 성을 함락했습니다. 병력 삼천을 동원했다 그러는군요. 동맹군이 떠드는 바에 따르면 마왕성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병사들에게 두당 10골드가 배분되었으니, 아주 헛소리는 아닐 것입니다.”
황녀 역시 표정이 진지해졌다.
“국내의 불만을 마왕에 떠넘겨서 해결하려는 심산인가. 꽤나 더러운 짓이군.”
“발이 빠른 자들이지요. 흑사병은 어디까지나 마왕이 퍼트린 것. 그에 대해 왕실은 응징했다, 그러니 왕실에게 죄를 묻지 마라……죄송합니다만, 각하.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에도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군부는 뭐라 하는가?”
“황제 폐하의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지, 라고.”
황녀가 한숨을 쉬었다.
“외무부상서.”
“예, 각하.”
“이 썩어빠진 나라가 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외무부상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미간으로 모았다. 그가 저어하며 입을 열었다.
“신성하신 황제 폐하의 은덕과 신들의 가호가 있기에…….”
“그대는 입으로도 방귀를 뀌는군. 이유는 단 한 가지일세. 군부가 지나치게 유능해서야.”
엘리자베트 황녀가 탁자에 놓인 포도주를 병째로 마셨다. 도무지 황족이 보일 법한 예의범절이 아니었으나 외무부상서 히델베르크나 기사 샤를은 뭐라 말리지 못했다. 그녀가 단숨에 포도주를 반쯤 비웠다.
“크으. 국내에는 끝없이 불만이 쌓여가네. 거듭되는 흉년, 파탄난 경제, 정책적 과오, 올해는 게다가 돌림병까지. 이런 불만이 쌓일 때마다 우리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반드시 어딘가를 침략하지. 그리고 승리한다네. 제국 신민들은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고, 현실의 괴로움을 잠시간이나마 잊는다……이딴 식일세. 국가적 실패를 군사적 성공으로 무마하고 있어.”
운의 연속인지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계속해서 명장들이 탄생했다. 최근 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이 패배한 전쟁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다. 그마저 대단치 않은 패배였다. 제국의 강대함에 신민들은 긍지를 가졌고 힘든 삶에도 다른 나라보다는 낫다며 위안했다.
“지나치게 기형적인 구조일세. 궁중 귀족들은 어차피 군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믿고 있어. 평민들도 마찬가지야. 정치적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 노력하기보다 군대에 투신하지……제국에서 군대만큼은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으니 말일세.”
“군대가 유능하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스러운 일입니다.”
“알고 있네!”
그녀가 탁자를 내려쳤다.
“그 유능함이 도리어 제국을 갉아먹고 있어. 중신들은 정책이 실패해도 전쟁으로 무마하면 된다고 여기지 않는가! 이번에도 그렇다네. 흑사병으로 인한 불만을 마왕과의 전쟁으로 해소하겠다면서 너무도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놓고 있어!”
“각하.”
“방역 대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은 어디로 갔는가. 블랙허브를 대량으로 확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어디로 갔는가……진절머리가 나네, 책임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
침묵이 찾아왔다. 외무부상서와 기사는 할 말이 없어 멀뚱하게 서 있었다. 황녀는 여기서 분풀이를 해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자네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였어.”
“천만에 말씀입니다. 각하께서 누구보다 제국의 안위를 걱정하심을 알고 있나이다. 다만 우리도 어서 마왕성 토벌에 가담함이 옳은 줄 아룁니다.”
외무부상서가 목소리를 밝게 했다.
“제가 적당한 마왕성을 미리 조사해두었습니다. 각하, 혹시 쿤쿠스카 상회라고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쿤쿠스카 상회?”
황녀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기억하는 약 삼백 개의 상단 중에 쿤쿠스카라는 이름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군.”
“오로지 극소수만이 이름을 아는 상회입니다. 마계에서 운영하는 상회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구할 수 없는 물품도 손쉽게 구해내어 최상위 귀족들이 애용한다지요.”
“호오.”
황녀의 눈빛에서 권태가 사라졌다. 마계에서 운영하는 상회라니 제법 흥미로웠다. 그녀의 기분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외무부상서가 더 느긋하고 밝게 떠들었다. 그는 마계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을 뽐내면서 황녀의 귀를 즐겁게 했다.
남자는 이십 대의 젊은 신진귀족으로서 능력과 야심을 겸비했으며, 황녀에게 제국의 미래가 있음을 파악한 뒤 그녀한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자신의 군주가 기뻐한다면 기꺼이 표정과 어투를 연기할 의향이 있었다. 황녀가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속으로 기뻐했다.
‘불행 중 다행이로다. 젊은 귀족 중에는 인재가 많다.’
현재 제국을 다스리는 중신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달랐다. 아비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는 상상할 수 없이 명예를 알았으며 유능했다. 딱 십 년. 십 년만 지나면 그들이 작위를 이어받으리라. 제국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겠지…….
‘제국에 필요한 것은 십 년의 시간뿐이다.’
황녀가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외무부상서의 입담에 웃으면서 문득, 엉뚱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형편없는 귀족들에게서 그처럼 유능한 자식들이 태어났을까?’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 없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으나 곧이어 생각하길 관두었다. 자기만 하더라도 색욕에 미쳐버린 황제의 딸이지 않은가. 자식이 부모를 닮는다는 속설은 아무래도 거짓인 모양이었다. 단지 아리송했다. 완벽하게 무능한 현세대와 완벽하게 유능한 차세대의 간극이.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시대를 이렇게 구분해놓은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지만.’
황녀가 자조했다. 아무튼 희망은 있었다. 십 년만 지나면 작금에 제국을 뒤엎고 있는 무책임주의, 이기주의, 무능의 극치도 빠르게 사라질 것이었다. 국내의 정치적 병폐를 전쟁으로 무마시킨다――임시방편에 불과했으나 십 년 정도는 너끈하게 견딜 수 있으리라.
“쿤쿠스카 상회에서 비밀리에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곳, 서열 제68위 벨리알의 마왕성에 특히나 금은보화가 대량으로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68위? 지나치게 서열이 낮지 않은가? 통상 서열이 높을수록 마왕성에서 약탈할 수 있는 재화가 많을 터.”
“소신도 그것이 걱정되었으나 쿤쿠스카 상회측에서 알려주길…….”
약간의 토론을 거쳐 황녀는 군대출병안에 도장을 찍었다. 별 고민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은 궁중의 신료와 다르게 지극히 유능했다. 서열 제68위의 마왕 따위 제국군 천 명만 동원해도 쓸어버릴 수 있었다.
황녀에게 있어 마왕이란 어리석은 작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단합하지 못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마왕성 한 곳을 공략하는 것 정도로 그들의 태도가 갑작스레 바뀔 리 없지, 하고 엘리자베트 황녀가 확신했다.
그녀의 동의에 힘입어 군대출병안은 바로 다음날 귀족회의를 통과했다. 귀족들로서도 흑사병으로 인한 평민층의 불만을 마왕에게 돌릴 수 있기에 군대출병안을 환영했다. 이미 출병을 준비하고 있던 제국군은 명령이 전달되자 곧바로 움직였다.
엘리자베트 황녀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간과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합스부르크 제국뿐만 아니라 인간계의 모든 나라가 제각기 적절한 마왕성을 향해 출병했다. 황녀의 생각과 다르게 총 열두 곳이나 되는 마왕성이 전화에 휩싸였다.
두 번째로――쿤쿠스카 상회가 퍼트린 정보가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마계에선 원래 음식이 맵다지 뭡니까! 정말이지, 혓바닥이 입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후후.”
외무부상서의 과장스러운 몸짓에 어린 황녀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한 명의 마왕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대륙에 존재하는 열두 국가의 수뇌부 중 어느 누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