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71화 (71/510)
  • 00071 필리버스터(filibuster)  =========================================================================

    서열 제49위의 크로셀이 전사한 무렵. 인간계의 열두 국가는 여느 때처럼 정력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천장이 높은 돔형 회의건물.

    지금 이곳은 난장판에 가까웠다. 귀족들 낯빛이 우락부락했다. 그들은 날붙이만 안 들었을 뿐이지 상대방한테 모욕이란 모욕은 죄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들 전원이 제국의 최고위 중신이었으나 체면 따위는 차리지 않았다.

    오늘 그들은 군제도와 관련해서 한바탕 맞붙었다. 황녀파에선 정 안건을 통과시키고 싶다면 황실에서 고용한 외국인 용병 부대를 즉각 해산시키라 요구했다. 이에 황자파에서는 “지극히 곤란한 문제”라고 대답했다. 이는 일상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엿이나 처먹어라” 정도의 의미를 가졌다.

    이에 대해 황녀파에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답변했는데 대략적으로 “그럼 꺼져라 새끼들아”라고 번역해도 무방했다. 당연히 군제도 안건은 공중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귀족들이 지금 서로에게 소리쳐대는 것은 요컨대 화려한 불꽃놀이의 잔해였다.

    “당신 아내에겐 젖탱이도 없소!”

    “무슨 헛소리요? 내 아내에게는 훌륭한 젖이, 당신 아내보다 열 배는 훌륭한 젖이 달려 있소외다. 그러는 댁의 부인이야말로 엉덩이에 꼴보기 싫은 점을 달고 살지.”

    “뭐?”

    콧수염을 기른 귀족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러자 뚱보 귀족이 말했다.

    “왜냐하면 내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이외다. 눈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고, 손으로 직접 만져봤을 뿐만 아니라 혀로 핥아도 보았지. 솔직히 형편없는 여자였소! 나는 어떻게 댁처럼 형편없는 남자가 신성한 결혼생활을 꾸리는지 항상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댁의 아내를 보고나더니 그제사 궁금증이 풀리더군. 가히 천생연분이오.”

    뚱보 귀족이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콧수염 귀족이 안색이 새파래졌다. 아니 이 년이, 왜 요즘 바가지를 긁지 않는가 싶었더니 뒷구멍에 황소바람이 새고 있었어……?

    “그러는 댁의 아내도 썩 훌륭하지 않던걸. 가슴은 컸지만 그게 다였지. 가슴만 컸다 할 뿐이지 얼굴은 영 아니었어. 게다가 몸무게는 왜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 젖소가 따로 없었지. 그짓을 하는 동안 나한테 쉬지 않고 열렬하게 입을 맞춰오는데 그만 깔려 죽을 뻔했지 뭐야.”

    제3자, 대머리 귀족이 끼어들어 한 말이었다. 그는 콧수염 귀족과 같은 파벌에 속해 있었다. 졸지에 아내가 바람 핀 사실이 공적으로 까발려지자 콧수염 귀족은 정신이 아득해졌고, 대머리 귀족이 보다못해 구원에 나선 것이었다.

    “지, 지금 내 아내를 모욕하는 거외까?”

    뚱보 귀족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에 개의치 않고 대머리 귀족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댁도 저 사람 아내를 모욕했잖아.”

    “결투를 신청하외다!”

    “좋아.”

    대머리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단 저 사람과 결투부터 하고 오쇼. 내가 보기에 순서가 그래야 맞거든.”

    이 모든 광경을 상석에 앉은 황녀가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엘리자베트 아타나시아 에바트리에 폰 합스부르크. 그녀는 이미 백작의 지위를 받았고, 열여섯 살에 전무후무한 천재로 불리우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희망이라 칭송되었다. 은발이 아름다운 황녀는 그러나 현재 절찬리에 절망하고 있었다…….

    저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끄는 최고 수뇌부였다. 어릴 적부터 최고급 교육이란 교육은 다 수료 받은 인재였다. 말하자면 저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선'이었다. 악몽이 아니고 뭔가.

    제국최고회의는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아니……한꺼번에 두 사람을 상대하라니, 비겁하오.”

    “비겁하다는 건 별 문제가 안 되는걸. 난 비겁하다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하거든. 솔직히 말해서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짝 유두 주변이 짜릿하기도 해.”

    “세상에, 끔찍하군……. 저 대머리 후작이 피학적인 변태일 줄이야.”

    그러자 대머리 귀족이 별안간 버럭 소리쳤다.

    “피학성을 모욕하지 마――!”

    주위에서 잡담하고 떠들던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대머리 귀족을 쳐다보았다. 대머리 귀족은 평소에 능글맞게 말하여 재수없기로 유명하긴 했으나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뚱보 귀족 또한 놀랐다. 그가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위가 같은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요.”

    “말투가 나쁜 건 너겠지!”

    대머리 귀족은 대머리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를 모욕해도 좋아. 내 아내를 모욕해도 좋아. 하지만 피학성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여, 여보시오……미쳤소? 피학성이니 뭐니……그런 건 다 변태스러운 것 아니오외까!”

    주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파 황녀파 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학성은 변태적이다, 거기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기적의 대동단결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뚱보 귀족이 힘차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걸 즐기고 더구나 성적으로 느끼다니, 그게 변태가 아니면 뭐란 말이외까. 차라리 저 뚱보처럼 남의 부인과 놀아나는 쪽이 점잖게 느껴질 정도요. 아니, 다른 사람의 부인과 놀아나는 것에는 최소한 낭만이라도 있지! 피학은 단순한 변태요외다!”

    또 다시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황자파 황녀파 가릴 것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인을 서로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하나의 당파에 속했다. 그들은 귀족 남성이었고, 남의 부인을 사냥하는 것이야말로 귀족 남성다운 유흥거리라 여기고 있었다.

    “흥.”

    대머리 귀족이 기죽지 않았다. 그가 코웃음치고 말했다.

    “낭만? 거 어이가 없어서. 낭만의 낭 자도 모르는군. 진정한 낭만이 뭔지 전혀 몰라! 어린애 장난 같은 짓거리나 벌이는 주제에 지들은 낭만적인 삶을 구가한다고 생각하겠지.”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안색이 심히 불쾌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부정당하는 것은 어쩌면 용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성적인 낭만을 부정당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저 새끼를 끌어내!”

    “감히 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평의회를 농락하다니!”

    “제국모욕죄로 당장 고소해야만 한다!”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졌다. 그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목을 붉혔다. 이 넓은 돔형 건물 안에서 오로지 딱 한 명, 엘리자베트 황녀만이 고개를 점점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평의회를 농락하는 것은 대머리 귀족뿐만이 아니라 너희 전부다, 이 발정난 개자식들아…….

    물론 황녀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절대다수는 당장이라도 대머리 귀족의 머리 살갗을 발라버릴 기세로 소리치고 있었다. 대머리 귀족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아테네 법정에서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 나선 소크라테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머리 귀족이 자기 자신을 진리의 수호자라 느끼면서――한점의 의심 없이 투명한 눈빛으로――또박또박 연설했다.

    “피학성, 그것은 선언하건대 성적 낭만의 정점이다. 그에 비교해서 외도는 성적 낭만의 밑바닥 너머 밑바닥, 그야말로 천박한 행위이지. 어리석은 놈들! 그저 사회의 법도를 파괴할 뿐인 외도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말이야. 거기에는 사랑이 없어.”

    대머리 귀족이 불끈 손을 쥐어올렸다.

    “그렇다. 사랑이다. 외도에는 사랑으로 착각되는 이기심만 가득하다. 반면에 피학은 어떠한가? 피학은? 피학을 즐기려면 맨 먼저 가학을 해주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기꺼이 나를 때려주고, 결박해주고, 밟아주는 가학적 파트너 말이다. 그런 파트너는 실로 희소하고 귀중하지……다음으로 피학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결박을 생각해봐라. 지금 당장 노끈으로 내 두 손이 묶인다고 상상해보란 말이다!”

    그가 절절하게 외쳤다. 실로 그는 절절했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다……가슴이 철렁한다! 그래,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무서운 게 결박이다. 하물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날 묶어버리고 풀어주지 않는다……그 공포는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지! 이를 허락한다는 것. 상대방에게 완전무결한 신뢰를 내보인다는 것. 아니,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것! 이게 바로 피학인 것이다!”

    귀족들이 얼빵하게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논변이 생각보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들이 대머리 귀족에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기세를 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괴롭힘 당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복해주길 바라고,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범해주길 바라는 욕망이 약간은 있다……그렇지 않은가, 위선자들아!”

    그건 그래.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솔직한 합스부르크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다고. 나도 가끔씩 누가 짐승처럼 뒤에서 박아주길 바라기도 하지, 그 육중한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말야……하고 어느 백작이 몽롱한 눈빛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을 옆에서 들은 남작이 경악하는 것도 모르고.

    “왜 우리는 법률을 존중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왜 우리는 윤리를 따를 때 양심의 환호를 듣는가? 우리 모두에게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본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러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모든 윤리에 약간의 피학이 들어 있듯, 모든 피학에 약간의 윤리가 들어 있을지언저! 상대방이 간절히 바라는 행위를 들어주고, 기꺼이 상대방의 엉덩이를 때려준다. 이것이 사랑과 존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뚱보 귀족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그럴수가……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거요? 피학은 변태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대머리 귀족이 입가를 이죽거렸다.

    “그렇다. 피학은 성적 낭만의 정점이다! 이렇게 사랑에 가득 찬 행위를 변태라고 부르다니 당신이야말로 변태야. 정말로 불쌍하군.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정말로 불쌍해.”

    회의장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귀족들은 어느새 감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간만에 멋진 연설을 들은 것에, 특히나 성적인 주제로 이토록 훌륭한 논변을 감상한 것에 심히 만족했다. 근래 최고회의에서 들은 연설 중 최고라고 평하는 이도 있었다. 오직, 오직 황녀만이 두개골이 지끈지끈거려 머리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정할 수 없소외다.”

    졸지에 변태에게 변태로 몰려버린 뚱보 귀족이 부들거렸다. 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피학은 성적 낭만의 정점이 아니오.”

    “흥, 패배자가 발악하려 드는군.”

    “아니! 성적 낭만을 추구하는 그대의 진지한 마음가짐은 알았소. 그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외다……그렇지만, 성적 낭만의 정점이 피학이라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음이요.”

    대머리 귀족이 눈썹을 찡그렸다.

    “동의할 수 없다고? 하. 그럼 바람이나 피워대는 외도 따위가 성적 낭만의 정점이란 말인가? 그거 엄청나게 대단한 정점이로군 그래.”

    “아니!”

    뚱보 귀족이 분노에 달아오른 목소리로 외쳤다.

    “성적 낭만의 정점은 근친상간! 그것도 형과 남동생이 정답게 나누는 근친 간의 사랑이외다――!”

    …….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귀족들이 경악하여 입을 쩌억 벌렸다.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해야 하는 경비병들마저 입을 쩌억 벌렸다. <경악 교향곡>이라 이름붙일 법한, 소리없는 합창이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쩌억 벌린 입에서 노래되고 있었다. 이 경천동지할 발언에는 과연 자칭 피학의 수호자 대머리 귀족마저 얼이 빠졌다.

    “그만 좀 해라, 미친놈들아…….”

    이제 두개골이 빠개질 것 같은 아픔을 느끼면서 황녀가 중얼거렸다. 열여섯 살 소녀가 내뱉은 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뇌와 슬픔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찬란한 은발이 왠지 모르게 희여멀겋게 풀이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황녀의 중얼거림은 지나치게 미약했다.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실 들었더라도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것이다. 방금 근친상간을 주장한 뚱보 귀족을 포함하여.

    뚱보 귀족이 연설해나갔다.

    “성의 묘미는 다름아니라 배덕감에 있소.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행위! 남들이 윤리적으로 불쾌하다고 여기는 행위! 그것들이 난공불락의 성벽이지. 성적 낭만은 바로 사랑을 위하여 그 험난한 성벽을 넘는다는 데에 가치가 있소외다. 귀족과 평민의 사랑 이야기를 보시오. 그 두 사람의 사랑은 어째서 고귀한 것이오?……간단하오. 가문이 반대하기 때문이외다. 가문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랑이 가문이라는 이름의 성벽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고귀한 거요.”

    귀족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맞는 소리로 들렸다. 그 반응에 뚱보 귀족이 힘을 얻어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소. 성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가 손에 넣는 사랑의 가치는 더더욱 높아지오. 성벽의 험난함이 도리어 사랑의 가치를 증명하지. 사랑하는 이가 자기보다 가난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고귀해지오. 보시오. 오늘날 동성애만큼 거대한 장벽이 또 있겠소? 근친상간은 어떻소? 근친상간만큼 어마무지한 장벽이 있소외까? 그렇다면――동성애와 근친상간이 합해진, 형제 간의 사랑만큼 거대하고 거대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이 존재하외까? 없소. 그럼 형제 간의 사랑만큼이나 위대한 사랑이 있을까? 없소. 절대로 없소!”

    뚱보 귀족이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형제끼리 사랑할까……? 상상해보시오, 그 사랑이 얼마나 격렬하지. 아마도 대륙의 무게에 버금가는 고뇌가 그 사랑을 짓누르고 있겠지. 그들은 번민하고 또 번민할 거요.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형을 사랑할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뚱보 귀족의 어조가 너무도 절실했으므로 사람들은 그 사랑을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사랑하는 이에게 일부러 매정하게 대해보기도 하겠지. 신전으로 달려가 사랑의 신에게 기도해보기도 하겠지.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습니까. 이같은 사랑이라면 차라리 증오가 황금과 같을 것을. 제발 저에게서 이 사랑을, 불타는 심장을 앗아가주십시오……그렇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오……!”

    뚱보 귀족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애절한 목소리에 귀족들은 마음이 동했다. 아, 그것은 실로 위대한 사랑이 아닐련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홍수와 같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여름의 태풍과 같이! 두 형제의 사랑은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소. 무슨 일이 그 둘에게 벌어지는 것이외까? 그들은 그들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사랑보다 위대한 윤리, 법률,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소! 사랑이 무엇보다 위대함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외다! 이 삭막한 시대에,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동지도 날파리처럼 죽여대는 이 시대에, 형제 간의 사랑이 어찌 눈부시지 않을 수 있겠소……?”

    뚱보 귀족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회의장이 침묵에 감싸였다. 무거운 침묵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감동하고 있었다. 그래, 맞다.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회와 타인이 아무리 반대해도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 하고 사람들이 감동에 휩싸여 대화했다. 나도 이제부터 형을 사랑해보겠어. 나는 남동생을 귀여워해주겠어. 침대에서 말이지. 그래, 맞다.

    “…….”

    피학이 성적 낭만의 정점이라 주장했던 대머리 귀족이 발을 옮겼다. 그가 뚱보 귀족에게 다가서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가 패배했어. 그대의 승리야.”

    “아니. 이 자리에 패배자는 없소.”

    뚱보 귀족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십대 남자의 얼굴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서로의 신념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승자요외다.”

    “훗, 그도 그러한가…….”

    두 사람이 악수했다. 그와 동시에 큰 박수갈채가 터졌다. 어떤 귀족이 휘파람을 불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는 확실히 황자파도 황녀파도 없었다. 오로지 관용만이 있었다. 제국이 쇠락해가는 시대, 그들은 수없이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린 끝에 드디어 서로 화합한 것이었다. 기적의 대단합이 그곳에 있었다.

    단 한 사람. 황녀를 제외하고.

    “……샤를.”

    황녀는 자신의 뒤편에 기립하고 있는 기사를 불렀다.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연설에 감동하여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황녀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고서야 기사는 정신을 차렸다.

    “샤를.”

    “헛? 예, 예! 각하!”

    “저 머저리들을 여기서 끌고 나가라. 당장.”

    기사 샤를이 곤란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저어……각하. 저기 한 명은 우리 황녀파의 실세인데요.”

    “본인이 그걸 모르고 있겠는가.”

    엘리자베트 황녀가 훗,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만사 다 포기한 눈초리였다. 아무리봐도 열여섯 살 여자아이가 짓기에 적당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더없이 어울렸다.

    “아니, 사실은 모르고 싶군……근친상간에다 동성애까지 저지른 남자가 황녀파의 실세라니. 신전 놈들이 알면 당장 옷을 벗어재끼고 춤을 추겠지. 오늘을 기념일로 제정해버릴지도 모르지. 샤를. 저 머저리들을 쥐어패라.”

    “그……맨손으로 말입니까, 각하?”

    황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몽둥이로.”

    “부, 분부 받겠습니다.”

    샤를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곧바로 소란의 주범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사람들이 어어, 하는 사이에 끌어버렸다. 기사의 괴력에 두 귀족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회의실 바깥까지 끌려나갔다.

    “끄아아아아악!”

    “크헉, 크허허헉!”

    회의실 너머에서 멱 따는 비명이 들렸다. 처참한 소리였다. 회의장에 남은 귀족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휘몰아친 감동과 사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싸늘한 북풍만이 자리했다.

    잠시 후 기사가 돌아왔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황녀의 뒤에 기립했다. 오른쪽 뺨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그걸 지적할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황녀가 말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간다. 흑사병에 대해 논의하지.”

    귀족들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제2부 시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