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두 개의 음모 =========================================================================
바르바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냐, 제정신이냐. 심하게 질책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녀만큼 월맹군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왕도 달리 없었다. 내 멋대로 월맹군이 결성될 만한 상황을 꾸몄다는 것에 분노를 느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기분 좋게 나의 기대를 날려주었다. 도리어 웃은 것이었다.
“어디 배알이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봐.”
금빛 눈에 호기심과 흥미가 넘실거렸다. 나에게 어떤 심오한 계략이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멋쩍게 웃었다. 상대방에게 기대 이상의 신뢰를 받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간지러웠다.
우리는 유령 집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았다.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수천 년 동안 월맹군은 번번이 실패했어. 인간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군대를 가졌는데도 말이지. 그 원인이 마왕들의 내분과 경쟁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는 뻔할 뻔자. 그녀는 마왕들의 어리석음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바르바토스. 내가 네 스트레스의 주범들을 한꺼번에 멸망시켜줄 테니. 너는 겉모습에 어울리게 행복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라. 소녀에게 스트레스는 가슴이 자라지 않는 원인이 된다.
“반대로 생각해보자고. 왜 마왕들은 전쟁에서 내분을 일으켰지? 그런 미친 짓거리를 어떻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냥 멍청한 게 아니라 존나게 멍청한 거지.”
“흥미로운 가설이지만.”
내가 피식 웃었다. 바르바토스는 다른 마왕을 격렬하게 증오하는 듯했다. 조금은 머리를 식혀주길 바랐다. 이제부터 냉정함이 뚝뚝 떨어져 호수를 이룰 정도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했다.
“그만큼 마왕들이 멍청했다면 지금까지 생존하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생각하기에 월맹군이 패배한 이유는 하나야. 월맹군이 지나치게 강력하기 때문이지.”
“야. 족제비.”
바르바토스가 인상을 썼다. 족제비라니? 나한테 붙인 별명이냐? 나처럼 호리호리하게 잘 빠진 청년도 달리 없는데 족제비라니 중상모략도 수준급이었다. 하다못해 여우라고 불러주기를 소망했다.
“네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거 알겠어. 혓바닥에 올리브 기름을 상시 처바르고 다니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너무 강력해서 패배한다고? 무슨 쉰소리야.”
사정은 이러했다.
웬만한 인간 국가는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아봤자 3만, 4만을 넘기지 못한다. 대군이긴 하나 마왕군을 막을 순 없다. 저들이 3만 대군을 휘몰아치고 온다한들 이쪽에서 10위급 마왕을 서너 명만 출진시켜도 간단하게 막아낼 수 있다. 그만큼 몬스터는 인간종에 비해 한없이 강했다.
인간계의 모든 나라가 합심하여 동맹군을 꾸려봐도 30만 대군이 한계. 그중엔 싸구려 징집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월맹군은 적어도 10만을 헤아린다. 그들 전원이 몬스터이다. 중과부적이란 이럴 때 쓰라고 고안된 표현이겠지. 후대를 위하여 그런 단어를 개발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라도 표하고 싶다.
“솔직히 말할게, 바르바토스. 월맹군에서 진지하게 마인의 승리를 바라는 마왕은 너 정도밖에 없어. 나머지 마왕들에게 인간의 국가는 언제든지 깨부술 수 있는 상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오히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같은 마왕이다.”
“……마왕이 마왕을 두려워해?”
“성가시다고 생각한 적 없나. 왕은 백성을 인도하는 정점. 왕이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국가 따위, 누구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어.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가 용납되는 까닭은 인간계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어서다.”
내가 얕게 웃었다.
“거의 모든 마왕들은 한번쯤 생각해봤을걸. 인간계를 점령한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하고. 서열이 높은 마왕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지 항상 불안에 떨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하, 하아!?”
바르바토스가 소리쳤다.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언가 반론하고 싶어 보였지만 내가 앞질러서 말했다.
“얼마 전에 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였다. 그리고 너는 나를 두둔했지. 다른 마왕들 눈에 그게 어떤 식으로 비추었을까?”
바르바토스는 일개 마왕이 아니었다. 평원파를 이끄는 거두였다. 실제로 그녀가 나한테 단지 호감을 품어서 접근했든 접근하지 않았든, 그것을 지켜보는 주변에서는 세력 관계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 살해자 단탈리안을 평원파 전체가 옹호했다, 평원파는 예전부터 산악파를 증오했다, 어쩌면 상대편 일파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여타 마왕들은 그렇게 생각할걸. 특히 산악파 마왕들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넌 평소부터 산악파를 쓰레기라고 부르면서 말소해야 한다느니 죽여버리겠다느니 떠들었잖아. 거짓말로 들리지는 않았는데.”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르바토스, 너는 강자였다. 강자이기에 약자의 입장을 눈꼽만치도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과 벌이는 전쟁에서 다른 마왕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그들을 겁쟁이에 멍청이라고 비난했다. 멍청해서 인간 따위도 이기지 못했다면서.
사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상대는 바르바토스와 같은 고위 마왕이다.
서열 제1위에서 서열 제72위, 그 사이에는 무한이라 표현해도 허용될 만큼 간극이 놓여져 있다. 지금이야 인간계로 진출한다는 명분 아래 일흔두 명의 마왕이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 만약 마왕이 같은 마왕을 공격한다면 '자기 의무도 잊어버린 채 인간이 아니라 동족을 공격하는 파렴치'라고 비난받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인간계에 진출한 다음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이라는 최대의 적이 사라진다. 이제 마왕만 남게 된다.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군주가 사이좋게 하하호호 하며 제국을 함께 다스릴까? 불가능하다. 결국 마왕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고위 마왕이 살아남으리라…….
“대다수의 마왕은 인간계 정복을 바라지 않아.”
보다 정확히 말하여, 자신의 군대가 인간계 정복 전쟁에서 소모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인간종을 무찔렀다 해서 군대가 필요없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그러므로 마왕, 특히 서열이 낮은 마왕일수록 자기 군대를 철저하게 보호하려 든다.
아마도 처음에는 소수의 마왕만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거다. 월맹군이 실패해도 그들은 피해를 받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점차 다른 마왕도 똑같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천 년 전에는 극소수에 불과하던 전쟁반대파, 소위 산악파가 현재에 이르러서 과반수 가까이 차지하게 되었다…….
바르바토스가 침묵했다. 내 설명을 듣고 짐작가는 부분이 떠오른 것 같았다.
“하아.”
그녀가 깊이 탄식했다.
“시발, 그랬구나. 그래서 좇 같은 새끼들이 죽어도 군대를 움직이지 않은 거였어. 제4차 때도……제6차 때도……제기랄!”
약자에겐 약자 나름대로 생존하는 방법이 있다.
강자는 그것을 단순하게 겁이 많아서, 무능해서, 라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강자는 자기 자신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강해졌다고 여기지 않고 되도록이면 자신이 용감해서, 유능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약한 타인을 필요 이상으로 깔볼 필요가 있다. 간편한 심리 구조이다.
“소수의 마왕으로 인간계 전체를 정복하기란 불가능해. 단 한 명의 마왕이 침략할지라도 인간계는 곧바로 단합할 테니까. 고로 최대한 많은 수의 마왕이 연합하여 월맹군을 꾸려야 하지. 하지만…….”
“최대한 많은 수의 마왕이 모일수록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지고, 당당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새끼들이 늘어나겠지! 염병할.”
그렇다. 이것이 마왕 전체의 역설이었다.
동족이 지나치게 강대한 탓에 눈앞에 있는 공공의 적을 헤치울 수 없었다. 아니, 해치워선 안 되었다. 그러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자기가 죽어버릴 테니까. 상황이 이렇기에 마왕들은 인간계 침략은 고사하고 마왕성에 틀어박혀 쓸데없는 정쟁(政爭)에 세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던전 어택> 시나리오에서는 대모험시대를 맞이하여 마왕 개개의 세력이 조금씩 약화되다가, 이윽고 용사 일행한테 각개격파당한다. 어쩌면 그 와중에도 마왕들은 현재의 동족이자 미래의 라이벌이 사라졌다면서 기뻐했을지 모른다. 마왕이 용사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작 인간의 모험대에 죽다니 한심하긴' 하고 비웃지 않았을까.
결국 마인의 전체적인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화되었고, 깨닫고 나니 이미 절반의 마왕이 용사에게 죽어버렸다. 뒤늦게 헐레벌떡 월맹군을 조직해서 인간계에 대항했지만 중과부적. 한 명씩 속수무책으로 용사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다……어리석기 이를 데 없었다.
문제는 그 어리석음이 정말 무능에서 비롯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일흔두 명의 마왕'이라는 구조 자체에서 비롯하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우울한 이야기였다.
“이 고착상태를 타개하려면 한 가지 수단밖에 없어.”
“말해봐.”
바르바토스가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아랫도리를 쓰다듬으면서 장난스럽게 작업을 걸던 여자아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눈앞에는 자신의 미래, 더 나아가 마계의 미래를 염려하는 한 명의 마왕이 앉아 있었다.
내가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우리가 침략하는 게 아니라, 인간종이 우리를 침략하게 만들어야 해. 그리고 마왕의 수를 대폭 줄여. 적어도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단탈리안.”
그녀가 나를 직시했다. 냉엄한 군주의 눈빛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입에 담았는지 알아? 너는 방금 전세계에 일흔 명밖에 없는 동족을 절반이나 죽여버리자고 말한 거야.”
“안 그러면 일흔 명의 동족 전원이 죽어……!”
내가 경고했다.
“늦든 빠르든 인간종은 흑사병을 계기로 마왕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돼! 어쩌면 일부 아인종도 유언비어에 휩쓸려 마왕을 적대할지 몰라. 그들은 산발적으로 마왕성을 공략하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자랑스러운 동족들께서는 경쟁자가 약해지는 광경을 신나게 구경하겠지!”
그것이 <던전 어택>에서 이루어질 미래였다. 현재 순간에는 오로지 나 혼자만 알고 있고, 마인에게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미래.
“그때 가면 늦는다. 마계의 세력이 온전한 지금, 바로 지금 연합해서 인간계의 세력을 최대한 줄여야만 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야!”
물론 노림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정복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상, 인간은 물론이고 마왕마저 정복의 대상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번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인간과 마계, 양측의 세력을 일거에 약화시킨다. 사상최대의 인간-마인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양측은 심대한 피해를 입으리라. 전쟁의 참화를 복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게 틀림없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나는 세력을 키운다.
어쩔 수 없다! 통상적인 수단만 갖고서는 내 세력을 일궈내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바르바토스가 레벨 357인데 반하여 나는 능력치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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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악(-20)
레벨: 21 악명: 375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E)
통솔: 26/32 무력: 7/10 지력: 30/32
정치: 24/30 매력: 15/20 기술: 4/10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E),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2개]
[부하: 42개체/21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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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제8위인 바르바토스의 레벨이 357이다. 그녀보다 강한 마왕이 일곱 명이나 된다! 어느 세월에 내가 레벨을 쌓아 그같은 괴물들을 상대하겠는가. 언제 세계정복을 이루어낼까. 내가 강해지는 동안 다른 마왕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인간들은? 앞으로 10년 후 용사와 함께 맹활약할, 훗날의 대영웅들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경쟁상대의 세력을 깎아버리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마왕뿐만이 아니었다. 용사 그리고 용사와 함께할 영웅들도 똑같았다. 미래에 산맥을 뒤엎고 바다를 메마르게 할 만치 강력해진다 할지언정, 어디까지나 십 년 후의 이야기.
현재 시점에서 그들은 아직 능력의 절정기를 맞이하지 못했다! 용사 본인조차 지금은 일곱살배기 꼬맹이일 터. 작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도박이라 해도 좋다. 승산 없는 미래까지 기다리느니 차라리 가능성이 보이는 현재에 내가 가진 모든 패를 걸겠다.
아니, 가능성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다. <던전 어택>의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는 나라면 확실히 가능하다! 마계의 세력을 깎고, 인간의 세력도 깎고, 철저하게 나만의 시간을 벌어들인다. 그 모든 것이 이번 전쟁 한 번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바르바토스, 언제나 산악파 놈들을 겁쟁이라 비웃지 않았어?”
내가 처절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희생될 마왕은 대부분 산악파일 거야. 어차피 자신의 이익에 눈이 팔려 마인의 염원, 마왕의 의무를 저버린 놈들이다. 그런 놈들을 신경 써주느라 마계 전체의 희망을 깔아뭉갤 속셈은 아니겠지!”
“……처음 희생양은 누구냐.”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물었다.
“마왕 전원을 단합시키려면 인간계의 침공이 거대해야 돼. 대규모의 원정군이 마왕들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 거고, 마왕들이 월맹군을 조직하기 이전에 최소한 한 명의 마왕이 원정군에 당할 게 뻔해.”
그녀의 말이 옳았다. 마왕들은 코앞까지 위험이 닥치지 않는 이상 서로 협력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명, 두 명, 운 나쁘면 세 명까지 동족이 희생되어야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음을 인지하리라. 단합하지 않으면 인간의 대군대에 한 명씩 당해버린다, 그런 위기의식이 공유되어야만 한다.
“미안하지만……평원파에서 먼저 희생을 해줘야 해.”
“크흐. 역시 그렇군.”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내가 무얼 의도하는지 알아챘음이라. 평원파 일원이 제일 먼저 인간의 군대에 당한다, 그러면 바르바토스의 발언력이 저절로 강해진다. 마음 놓고 인간에 대한 복수를 울부짖을 수 있다. 더불어서 혹시 흑사병에 대한 유언비어를 평원파에서 퍼트린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원천봉쇄한다…….
바르바토스가 일어섰다. 그녀가 내게 걸어왔다.
“잔혹하구나, 단탈리안. 정말로 잔혹해.”
그녀의 목소리에 음울한 색기가 스며들었다. 그녀가 나의 배, 가슴, 목, 그리고 뺨을 어루만졌다. 당장이라도 그 손아귀로 내 목숨을 취할 것처럼. 나는 담담하게 손길을 받아들였다.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넣을 때까지만 해도, 난 그저 네놈이 약간이나마 성장하기를 기대했지. 벨리알과 다투고, 산악파와 경쟁하고, 무수한 세월을 거쳐 번듯한 마왕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이제보니 애송이는 나였네. 깔깔…….”
“바르바토스.”
“좋아. 협력하지. 전쟁? 바라던 바야. 희생? 그딴 거에 연연할 성격이었으면 진즉에 포기했겠지. 단 한 순간의 명예로운 전쟁을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감당하겠어. 나는 마왕이니까.”
바르바토스가 내 턱을 살짝 돌렸다.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가 작은 입술 사이로 내쉬는 숨결이 나의 얼굴에 그대로 부딪쳤다.
“하지만 놀랍고도 재밌구나. 단탈리안, 네놈은 분명히 내가 이런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행동한 것이겠지……어디까지 예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냐? 네놈이 앞으로 내딛을 행보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 이거 봐봐.”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자신의 허리 아래로 가져갔다. 치마를 헤집고 그 속으로 내 손을 이끌었다. 이윽고 얇은 천이 손끝에 닿았다. 질척했다.
“나, 젖어버렸어……네가 일으킬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상상만 해도 흥분돼. 너처럼 악마적이고, 비열하고, 개 같은 새끼는 처음이야.”
아.
또 그거였다. 색욕 마법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내 귓등을 혀로 핥으면서, 바르바토스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머리가 띵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색정이 귓구멍을 쑤셨다. 뇌수를 흔들었고, 척추를 경유하여 아랫도리에 파고들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필사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려는 가운데 의식 저 멀리서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주 예전부터 개 같은 새끼한테 박혀서 개처럼 헐떡이고 싶었는데……한번, 박아볼래?”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끊겼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은, 드넓은 마왕궁을 짐승처럼 헤집으며 교합해대는 그녀와 내 모습이었다. 탁자든 의자든 무엇이든 이용해서 갖가지 자세로 교미했다.
그녀가 신음으로 헐떡거렸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일종의 계약이라고. 앞으로 동족을 지옥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들 음모에 가담해버린, 두 사람만의 비밀계약이라고 말이다…….
겨울이 다가왔다. 해가 바뀌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맞이한 그해 봄.
서열 제49위이자 평원파 소속의 마왕 크로셀이 인간종의 침공에 패사(敗死)했다.
============================ 작품 후기 ============================
─ 챕터 <두 개의 음모> END.
─ 제1부 끝. 제2부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