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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69화 (69/510)
  • 00069 두 개의 음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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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는 데 십 분이 걸렸다. 키스만으로 자그마치 십 분.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안이 얼얼했다.

    “더럽혀졌어……엉망진창으로.”

    바르바토스는 테크니션이었다. 기술이 몇 가지 사용됐는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드릴, 바이브, 진공까지는 알겠다. 그후로 기억이 삭제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나 역시 나름대로 한 기술 한다고 자부하는데 그녀는 정말이지 차원이 달랐다.

    바르바토스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사내 자식이 정어리처럼 비리비리하기는. 내가 네 나이 때는 인마, 사흘 밤낮으로 질펀하게 성교 파티를 벌였어. 깔깔, 그땐 나도 어렸지. 도대체 몇 번까지 갈 수 있는가 궁금해서 실험해봤거든. 삼백 번까지 세고 포기했지만.”

    “…….”

    외양이 로리인 여자애가 어릴 적 어쩌고 그러면서 자신의 섹스 편력을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었다. 무서운 년, 누가 마왕이 아니랄까봐 성윤리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아직 소녀에 불과한 라우라와 자버린 내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얘는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교섭은 성공했다. 예상보다 훨씬 크게.

    ‘상태창.’

    나는 성공의 결과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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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바르바토스

    종족: 마왕   소속: 바르바토스 마왕군, 평원파

    속성: 악(-40)

    레벨: 357   악명: 6985200

    직업: 대흑마녀(SS), 마왕(S), 던전운영자(A+)

    통솔: 330  무력: 460  지력: 153

    정치: 159  매력: 209  기술: 301

    호감도: 50

    현재심리: ‘흐응, 남정네 새끼랑 입을 맞춘 건 처음이네.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걸. 확 덮쳐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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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케이. 호감도 오십을 찍었어.’

    ……현재심리에서 무언가 불길한 내용이 비추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호감도 오십.

    여기까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 이상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모종의 제한 조건을 깨트려야 했다.

    제한조건은 캐릭터마다 천차만별로 바르바토스한테 정확히 어떤 조건이 숨겨져 있는지 당장 알아낼 수는 없었다. 라우라의 경우야 부하로 영입하자 덩달아서 조건까지 달성되었지만, 그런 행운이 두 번 반복하긴 어려웠다. 하긴 바르바토스를 부하로 영입하는 것 자체가 한없이 망상에 가까웠다.

    ‘여기까지 만족해야지, 뭐.’

    나는 초조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단연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그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그만한 강자를 아군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순수히 기뻐해도 좋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능력치가 높아.’

    바르바토스는 압도적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경탄을 넘어서서 절망까지 느껴질 정도가 아닌가. 내 능력치를 전부 합쳐도 백오십 될까 말까한 상태에서 그녀의 능력치는 총합 일천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수치였다.

    게임에서 그녀는 이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레벨이 357이라니! 서열 제4위는 되어야지 가능한 수준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레벨 250부근을 서성였다. 아무리 높아도 260이하였다. 350이니 뭐니 어이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숫자가 결코 아니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이거, 난이도가 이상해.’

    서열 제8위 마왕의 레벨이 게임에 비해 백이나 뛰어올랐다. 그녀가 이럴진대 서열 제1위 마왕은 어떻겠는가.

    본래 게임에서 최종보스 서열 제1위 마왕 바알은 레벨이 389였다. 헌데 지금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영 불길했다. 바알마저 레벨이 부쩍 상승했을 것이 확실했다. 아마 최소한 레벨이 500에 이르지 않을까 싶었다.

    레벨 500.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설령 내가 게임에서 키운 용사 캐릭터가 온다할지라도 이건 공략하지 못했다. 던전 어택 펜사이트 회원들이 보면 기절해버리고도 남으리라.

    ‘비너스빤스 이 개새끼가……제기랄. F급 모험대, E급 모험대가 왜 그리 강한가 했는데 그냥 전체적인 난이도가 높았어.’

    나를 이딴 세계에 집어처넣은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작자, 비너스빤스가 말한 얘기를 한순간이라도 잊은 적 없었다. 어찌 잊을까. 녀석은 나에게 정말로 신작 게임을 직접 플레이할 거냐고 질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던전 어택이 마왕들로부터 세계는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 이번 신작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 빌어먹을.’

    당시엔 쓰잘데기 없는 정보라 생각했지만 이젠 생각이 달랐다. 녀석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해졌다. 녀석은 그때 이 세계에서 내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목표해야 하는지 알려준 것이었다.

    세계정복.

    어린시절 우스개소리로 주고받던 낱말이 이토록 무겁게 다가올 줄 몰랐다. 게임에서 세계를 정복한다, 이건 쉬울뿐더러 지겹기까지 했다. 누군가가 현실에서 세계를 정복하라고 요구하면 그놈은 미친놈으로 취급되어야 마땅했다. 나는 그런 미친놈의 미친 헛소리를 진지하게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니고 뭔가.

    문제가 심상치 않았다. 비너스반쓰는 '인간계'가 아니라 '세계'라고 표현했다. <던전 어택> 세계관에는 인간계는 물론이고 마계도, 설정상이지만 신계도 존재했다. 혹시 세계란 그 모든 세계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설마 그럴까 싶어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만일 세계가 인간계와 여타 세계까지 포함한다면……절망적이었다.

    “바르바토스. 사실 내가 오늘 찾아온 이유가 또 하나 있어.”

    “흐응? 뭐, 나랑 존나게 떡치겠다고? 발레르뇽 한 병만 더 주면 대주지 못할 것도 없는데.”

    “……좀 봐줘라아.”

    그렇기에 지금부터 대대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마왕들은 무시무시한 적이다.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게임 속 스토리에서 마왕들은 인간종에 토벌당한다. 진실로 막강한 적은 마왕이 아니라 인간계 전체이다. 용사 일행에는 바르바토스만큼 강력한 동료가 수십 명이나 소속되어 있었다. 평범한 수단으로 현재의 내가 용사 일행을 넘어트리기란 불가능했다.

    평범한 수단으로는.

    “하. 나 한번 박아보겠다고 밤마다 자위해대는 년놈이 수천 깔려 있단다. 발레르뇽 한 병이면 아주 싼 거야, 새끼야.”

    “우리 마계에 소녀성애자가 적어도 수천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네. 됐어, 진지한 얘기야. 치맛자락 올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흐응? 알았어.”

    “그렇다고 은근슬쩍 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지 말고!”

    내가 식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바르바토스가 입을 삐쭉거리면서 치맛자락을 다시 올렸다. 새하얀 스타킹이 치마 속으로 달아났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는가. 너 같은 년은 전생에도 현생에도 처음이다.

    “쳇, 나중에 좆탱이 잡고 울고불며 사정해도 안 대줄 거다.”

    “저한테도 언제든 같이 놀아줄 상대가 있거든요?”

    “아앙? 그년이 나보다 매력적이라는 소리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골을 때려도 두 번 때리는 년이었다.

    “내 기술이 얼마나 죽여주는지 단탈리안 넌 모르지? 천하에 이름난 석녀(石女)도 내 손가락에 걸리면 시발 이십 초만에 분수를 뿜어내지 않고 못 배겨. 입까지 쓸 것도 없지. 손가락도 두 개 필요없어. 요거.”

    그녀가 장난스럽게 검지를 까닥거렸다.

    “요거 하나면 충분하고도 넘쳐. 석녀가 색녀가 되고, 색녀는 창녀가 되지. 오로지 내 전용의 창녀 대부대에 소속된다 이 말이야. 너 삼백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다면서 고민상담을 해온 호족 여자가 생전 처음으로 내뱉는 신음소리가 어떤지 알아? 죽여줘요, 시발. 앙, 앙, 하응! 이런 건, 처음이에요! 전하! 흐읏! 사, 살려주세요! 하응! 하면서 마구마구 비명을 질러대는데 캬아. 교향곡도 그런 교향곡이 따로없지.”

    “으어어어…….”

    귀를 틀어막았다. 여자아이 얼굴로 능글능글한 아저씨나 씨부릴 법한 음담패설을 속삭포처럼 쏘아대니 버틸 수 없었다. 성대모사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녀석은 아주 생생하게 꼭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신음을 따라했다.

    문제는 묘한 배덕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랑거릴수록 하반신이 단단해졌다. 귀를 막아도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걸로 판단하건대 아무래도 색욕을 일으키는 마법을 목소리에 섞은 것 같았다. 아까 전에 코르캐-따개 마법도 그렇고 이 녀석은 세상에 쓸모없는 마법이란 마법은 죄다 꿰뚫고 있었다.

    “짜식아, 눈 딱 감고 일 분만 나한테 맡겨봐. 천국을 무료로 관광시켜주지. 아니, 일 분도 필요없다. 너 새끼 하는 꼬락서니가 딱 고자니까 삼십 초면 충분해. 남자는 보통 한 번밖에 못 간다면서? 불쌍하고도 열등한 족속이지. 하지만 내게 맡기면 적어도 열 번까지는…….”

    나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결론적으로 말해, 강철과 같은 이성이 유혹을 견뎠다. 그렇지 않아도 열여섯 살인 라우라와 자서 약간 마음이 찔렸다. 하물며 외견이 열두 살, 열세 살 정도인 바르바토스랑 자라니. 백 일 정도 성욕을 풀지 못해 짐승이 되어버린 상태면 또 모를까 지금은 결단코 거절하고 싶었다.

    “이상하네, 내 <꼴림-마법>에 버티는 경우는 잘 없는데.”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색정 마법을 썼다! 게다가 이름 붙이는 센스가 최악을 달렸다. 나는 어이가 두개골에서 가출해버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진심으로 저런 이름을 지은 것이라면 바르바토스의 정신머리를 심각하게 고찰해야 했다.

    “하아.”

    내가 겨우 목소리를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한 달 동안이나 널 찾아오지 않고 게으름 피운 거엔 이유가 두 가지 있었어. 한 가지는 리프의 시체와 관련해서 평원파가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나 지켜봤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인간계에 소문 하나를 퍼트리기 위해서야.”

    “소문?”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만큼은 어린 얼굴이 순수해보였다.

    “그래. 지금 인간계에는 한창 불길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 바로 마왕이 흑사병을 퍼트렸다는 유언비어야. 내가 쿤쿠스카 상회를 경유해서 대대적으로 유포했지.”

    “아앙? 그딴 짓을 왜 했어?”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설마 파이몬 년이 말한 대로 진짜 네 자식이 흑사병을 만든 거냐? 아니지. 서열 제71위에 불과한 네놈이 사상최악의 질병을 만들 순 없을 텐데. 질병 제조가 특기인 마왕 놈도 흑사병 같은 것은 개발하지 못해.”

    “네 말이 맞아. 서열 제71위에 지나지 않는 내가 흑사병을 만들기란 요원하지.”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이 전무후무한 전염병이 자연적으로 생겼을 리 없다, 어떤 약한 존재가 만들었을 리도 없다.”

    “오호. 우리 마왕이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거냐.”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인간이란 항상 그 따위지. 지들이 불행하면 어떻게든 불행의 원인을 다른 곳에 갖다붙이려고 해. 신령을 향해 기도하고 마왕을 욕하지. 지들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업보임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흥미로운 견해이나.”

    내가 고개를 저었다.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엉?”

    “흑사병은 현재 인간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있어. 초기 진압에 성공한 사르데냐 왕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가 전염병에 신음하는 중이지.”

    일부 도시는 돌림병을 방역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블랙허브를 뿌린 덕분이었다. 몇몇 현명하고 용감한 영주는 자신의 재산까지 총동원해서 블랙허브를 사들였고, 그걸로 영지를 효과적으로 지켰다.

    하지만 그같은 영주는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은 그저 값비싼 블랙허브를 자기 몸과 자기 식구를 구하는 데 사용했다. 나한테 블랙허브를 사들여 값을 배로 불린 다음 되팔아버린 영주와 대상인도 있었다. 결국 흑사병은 원래 게임에서 그러했든 무수한 피해를 내고 있었다.

    블랙허브가 특효약인 것이 밝혀지고 이곳저곳에서 집단 재배가 시작했지만 첫 수확이 이루어질 때까지 몇 달이나 남은 상황. 효과를 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가, 아들이 죽어 있다……인간들은 인세의 지옥에 빠져 있었다.

    “바르바토스, 인간계가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똑바로 대처하지 못한 영주와 신전, 국가에 대한 불만이 역사상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어. 벌써 도시급 반란이 아홉 차례나 일어났다. 그중엔 대도시급 반란까지 있다.”

    바르바토스는 여전히 내 말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던전 어택>의 역사를 온전히 기억하는 나만이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왕이 전염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흐른 거야. 인간의 지도자들이 이걸 어떻게 이용하리라 생각해?”

    “……!”

    그제야 바르바토스가 제대로 반응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소문을 활용할 수밖에 없어. 나쁜 것은 영주가 아니다, 신전이 아니다. 나쁜 것은 마왕이다. 책임을 회피하려 들겠지. 인간들은 더더욱 소문을 신뢰할 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마왕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저잣거리와 궁중을 가리지 않고 떠들썩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너 이 새끼……?”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맹군을 다시 결성할 때가 되었어. 바르바토스, 전쟁이다. 전쟁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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