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68화 (68/510)
  • 00068 두 개의 음모  =========================================================================

    “자, 다음 경우의 수를 지워보자……그 전에 목 좀 축이고 말이야.”

    단탈리안이 포도주를 머금었다. 그는 첫 번째 난관을 넘어갔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불만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놈 말이 그럴듯하긴 해. 그래도 여전히 빈틈이 있어. 치즈에 난 구멍처럼 숭숭 뚫려 있다고. 만약 어떤 산악파 새끼가 훼까닥 돌아버린 거였다면? 파벌의 이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불합리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저 단탈리안 네놈을 놀리기 위해서 장대한 장난을 벌인 거였다면?”

    단탈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난 어느 정도 용의자들이 합리적인 행위자라고 가정하고 있지.”

    “맞아, 애당초 말이 안 돼. 마왕들은 절반이 미친 새끼야. 까놓고 말해 벨리알이 지나치게 멍청하거나 머리가 맛이 가서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겼을 가능성도…….”

    “그러니까 요컨대 바르바토스 너는 '우연'에 기대고 싶어하는 거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단탈리안이 술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안에서 붉은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쟤가 정말로 순전히 추리에 의거해서 날 범인으로 때려맞힌 것일까? 운 좋게 우연히 범인으로 지목한 것 아닐까? 발레르뇽 505년 산은 추리에 자신이 없어서, 자기가 맞게 찍었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려고 동원한 꼼수 아니었을까?……그걸 확인하기 위하여, 바르바토스. 너는 나한테 승부를 제안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비합리적인 것에 기대어 나를 논파하려 하는구나.”

    그가 바르바토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야. 어떤 미친 작자가 완전히 비합리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지. 어떤 우연적인 것에 의해서 리프의 시체에 표식이 남은 걸지도 모르지. 이건 어떻게 생각해? 서열 제7위 아몬은 천리안의 능력을 갖고 있지. 그는 발푸르기스 밤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천리안으로 청문회를 지켜봤을지도 몰라. 안 그래?”

    “그건…….”

    “우리는 아몬 또한 용의선상에 추가시켜서 서른두 명의 마왕이 아니라 서른세 명의 마왕을 의심해봐야겠네. 왜 아몬이 서열 제71위인 나에게 관심을 가졌고, 왜 서열 제68위인 벨리알을 모함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아몬이 조금 미쳐서 그딴 짓거리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이 모든 게 나의 자작극일 가능성도 있지. 내가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놓은 다음 엉뚱하게 너한테 떼를 쓰는 것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아몬보다는 내가 범인에 가까워보이는군.”

    바르바토스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스스로 승부의 목적을 부정할 셈이냐고. 어떤 우연한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론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반론해버리면 애당초 우연을 배제하고 싶어하던 네 목적은 어디로 가버리는가. 우리 두 사람의 결투를 부정해버릴 텐가.

    “미안해. 내 실수였어.”

    그녀가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것은 무작정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추리극이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규칙과 목적을 갖고 이루어지는 결투 시합이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망각했다는 것에 바르바토스는 한숨을 쉬었다. 반절의 용의자가 목록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조급해졌을지 몰랐다.

    그렇게 두 번째 반론이 제지되었다.

    단탈리안이 싱긋 말했다.

    “다음으로, 평원파 전체를 용의자에서 제외한다. 물론 널 빼고.”

    “뭐, 뭣!?”

    바르바토스가 눈이 커졌다. 현재 용의자로 남은 열네 명의 마왕 중에 평원파가 아홉을 차지했다. 바르바토스를 제외함으로써 총 여덟 명의 평원파까지 목록에서 지워버리면――용의자는 불과 여섯 명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말도 안 돼!”

    “아니, 가능해. 평원파는 평원파라는 이유 때문에 곧바로 용의선상에서 사라진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청문회에 참석한 평원파 전원은 알고 있어. 바르바토스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공언했음을. 청문회가 끝나고도 네가 날 데리고 종일토록 도시 관광에 나섰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자아. 만약 평원파 일당이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남겨두었다고 가정하자.”

    왜 그랬을까, 하고 단탈리안이 자문했다.

    “벨리알이 정말로 범인이라면 굳이 나한테 보복을 맡길 필요가 없지. 불과 며칠 전에 파이몬이 설전에서 패배했어.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산악파의 누군가가 애꿎게 단탈리안을 공격했다? 그 증거를 잡았다?……잘만 하면 산악파한테 큰 일격을 먹일 기회야.”

    그런데도 평원파는 침묵했다.

    그들은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심지어 단탈리안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한 달을 보냈는데도, 평원파에서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단탈리안에게 접근하여 우리가 도와줄 테니 산악파를 추궁하자고 제안이라도 할 수 있었음에 불구하고.

    “'산악파에 적대한다'라는 행동 그리고 '산악파를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행동은 서로 모순이다. 따라서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그들은 산악파를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할 수 없어. 즉, 그들에겐 벨리알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다!”

    단탈리안이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알을 모함했다. 어째서인가? 왜 벨리알을 공격하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 고작 서열 제68위의 마왕을 공격하기 위해 이토록 장대한 계략이 필요한 까닭이 어디 있는가? 아까 전과 똑같은 논변이 여기에 적용돼. 바로 벨리알보다 약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단탈리안이 거대한 목록을 검지로 가리켰다.

    “보다시피 벨리알보다 서열이 뒤떨어지는 평원파는 전무! 가장 서열이 낮은 평원파 일당이 서열 제50위 푸르카스야. 자그마치 열여덟 단계나 서열이 차이나지. 그런 자가 최약의 마왕인 나 단탈리안에게 보복을 맡긴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이의 있어!”

    바르바토스가 바득 이를 갈았다.

    “네놈은 지금 평원파의 목적이 벨리알 개인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어!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만약 평원파가 리프의 시체에 표식을 남겼다면 그들의 목적은 당연히 벨리알 개인이 아니라 산악파 전체일 거야! 고로 서열이 얼마 차이나는지와 상관없이 산악파에는 벨리알을 모함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전적으로 동의해.”

    단탈리안이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바르바토스가 불길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네가 말한 그대로야. 평원파는 벨리알 개인을 목표하지 않았어. 산악파 전체를 목표한 거지. 궁금하군,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왕이길래 제대로 된 증거 하나도 없이 산악파 전체를 공격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

    바르바토스가 숨을 삼켰다.

    당했다!

    단탈리안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 '만약 평원파가 벨리알을 모함했다면, 그 평원파 인물은 산악파 전체를 증거도 없이 적대할 만큼 강력한 자'라고 인정하게끔 유도했다. 이렇게 되면――.

    “산악파는 명실상부 최고의 세력. 그들을 감당이라도 할 수 있는 세력은 평원파 전체밖에 없어. 그중 평원파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마왕은 단 한 명.”

    단탈리안이 그녀를 가리켰다.

    평원파의 수장. 누구보다 산악파를 증오하는 자.

    “바르바토스, 너밖에 없지.”

    “…….”

    그녀는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처음에는 서른두 명의 용의자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열네 명, 열다섯 명, 천천히 용의자가 제외되더니 순식간에 표적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평원파가 범인이라면 오로지 바르바토스 단 한 명만이 주범일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단탈리안이 결투에서 이길 것이라는 직감이 슬며시 다가왔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녀를 구해준 직감이. 아직 반론할 거리가 남아 있긴 했다. 결정적인 반론이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이겨내고 말겠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나 그녀는 명예를 내건 전투를 바라왔다.

    마왕으로서 자신의 명예란 인간계를 정복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월맹군의 선두에 섰다. 패배하고, 또 패배해도 끝없이 나아갔다. 그곳에 명예로운 결말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결말이 승리이든 죽음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오로지 전투를. 명예로운 대전쟁을.

    이천 년이 지났다. 단 한번도 그녀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월맹군은 번번이 무너졌다. 자중지란으로. 그곳에 명예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겁함과 두려움, 시기와 질투, 무엇보다도 어리석음만이 지배했다. 동지들은 점점 지쳐나갔고, 등을 돌렸으며, 아예 떠나기도 했다.

    그녀라고 어찌 지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바르바토스의 입 끝이 올라갔다.

    눈앞의 녀석이 옆에 같이 있어준다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한 번의 이천 년을 견딜 것이다. 철저하게 본능과 직관을 따라 움직이는 자기와 다르게, 단탈리안은 그 영민함과 음험함으로 월맹군을 보좌해줄 것이다. 어쩌면 꿈에도――그리는 대전쟁을 한판 펼치게 되리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시험해보자.

    최후의 반론까지 깨트려봐라. 너에게 십만의 마왕군을 보좌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시험해주겠다.

    “어림도 없는 개소리!”

    바르바토스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그녀는 흥겨워 웃고 있었다.

    “네 자식의 모든 주장은 평원파가 범인이라는 가정 아래 이루어지고 있어! 이걸 어쩐담! 산악파와 평원파가 모조리 의심에서 벗어난다 한들 아직도 여섯 명! 날 포함해서 여섯 명이나 남아 있어!”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촤자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목록에서 평원파 전원의 이름에 획이 그어졌다. 오직 바르바토스의 이름만이 무사했다.

    “서른두 명을 여섯 명으로 줄인 그 재치, 진심을 담아 칭찬하지! 그러나 어떻게 여섯 명 중에서 나를 골라낼 거냐! 중립파 혹은 무소속 인물은, 그저 산악파와 평원파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리프의 시체에 각인을 새겨넣은 것일 수 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여섯 명의 남은 용의자 중에는 벨리알보다 약해빠진 서열 제70위 세에레가 있다! 네가 표현하듯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를 밟아서 계략을 짜낼 이유가 넘치고도 흐르지. 약자는 강자에게 계략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혹시 모르지, 이번 기회에 단탈리안 네놈과 벨리알을 이간질시켜서 이득을 보려는 것인지. 또한!”

    바르바토스가 목록의 가장 꼭대기를 지목했다.

    “중립파의 수장 서열 제5위 마르바스 늙은이는 예전부터 산악파와 평원파를 꼴보기 싫어했다. 그 늙은이 새끼한테는 아무런 증거 없이도 산악파를 모함할 배짱이 있지! 있고 말고! 양대파벌이 서로 싸우는 와중에 중립파가 세력을 불린다, 그런 시나리오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단탈리안이 휘두른 논리의 축 두 개, '한참 서열이 높은 자가 굳이 벨리알을 모함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한참 서열이 낮은 자가 산악파 전체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가 막혔다. 전자의 경우에 서열 제70위 세에레가 포함되었고, 후자의 경우 서열 제5위 마르바스가 포함되었다. 바르바토스를 포함하여 최소한 세 명의 용의자가 남게 되었다.

    “왜 하필 나 바르바토스가 범인이냐!”

    그녀가 흥분에 차서 말했다.

    “네놈이 이 몸을 패배시킬 수 있겠냐!”

    그녀의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쳤다.

    “네놈의 가능성을――능력을 나에게 보여봐라!”

    드넓은 홀.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까지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죽음의 기사 오백 마리가 주인이 흥분한 것을 알았는지 그르릉 울어댔다. 거대한 손을 폈다가 구부렸다. 주인이 명한다면 당장이라도 저 오만불손한 녀석을 물어뜯겠다는 듯이, 십이지장을 끄집어내 도륙하겠다는 듯이.

    바르바토스의 마왕궁에 흥분과 살기가 차올랐다. 그녀 역시 발끝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녀의 모든 신경은 단 한 곳, 단탈리안의 입술에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받아칠 것이냐. 아니, 받아치는 게 정말로 가능한가. 만약 받아친다면……어떻게.

    입술이 열렸다.

    “우리가 여태까지 간과한 사실이 있지. 실로 중대한 사실 한 가지가.”

    차분한 목소리가 마왕궁에 스며들었다.

    “바로 누가 리프를 죽였냐는 것이다.”

    “…….”

    바르바토스의 몸이 멈추었다.

    “더불어서 도대체 언제 리프의 시체에 각인이 새겨졌냐는 문제도 있지. 시체가 발견된 당시, 리프 주변에는 동물과 벌레를 쫓아내는 마법이 걸려 있었어. 아마 범인은 그 마법을 거는 것과 함께 시체에다 표식을 그렸겠지.”

    그녀가 멍하게 있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것이 이용되는구나.

    “누가 리프를 죽일 수 있었고, 누가 마법을 펼칠 수 있었는가? 간단해. 따로 생각해볼 것도 없어. 리프의 모험대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오직 두 명, 리프 본인과 정체모를 마법사밖에 없었어. 마법사가 리프를 죽였으며, 시체에 각인을 새겼고, 시체 주변에 마법을 펼쳐둔 거야.”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천 년 동안 그토록 바래온 진짜 승부를. 그 결말을.

    “이제 질문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돼. 마법사는 누구인가? 나는 곧바로 리프가 머물렀던 도시의 길드를 뒤졌지. 하지만 리프가 고용했다는 마법사는 서류에만 표시되어 있었어. 실제로는 마탑에 가입되지 않은 인물이었지. 명부상의 존재. 의심스러운 냄새가 풀풀 풍겼지.”

    비록 칼날과 핏방울이 오가는 전장터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마법사는 대략 4서클 마법사로 보였어. 고위 마도사였지. 문제는 마법사의 마나색이 검은색이었다는 거야. 나는 당장 지금 남은 여섯 명의 용의자를 조사했어. 역시 최소한 수백 년을 활동한 마왕들이라서 그런지, 마왕들 본인에 대한 자료는 물론이고 그들의 심복에 대한 자료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어.”

    긴 세월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마법사가 약 백일흔 명. 4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가 스물한 명. 여기서 마나색이 검은색인 마법사가 세 명. 자, 후보자가 좁혀졌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세 명 모두 인간이 아니었지. 리프의 모험대에서 활약했던 마법사는 틀림없이 인간 여성이었는데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어. 아.”

    제법 잘 견뎠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둔갑 마법을 썼구나. 둔갑 마법은 7서클 대마법이야. 하! 이야기가 무척 간단해졌지. 총 백일흔 명의 마법사 중에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는 고작 세 명밖에 없었거든.”

    말을 놓고 마음으로 사귀는 친구 한 명 없었다. 약해져가는 파벌을 단신으로 이끌어가면서 진흙탕 같은 전쟁과 정쟁을 헤쳐나왔다.

    그렇게 지난 날을 떠올리면서, 바르바토스가 멍하니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세 명 중에 마나색이 검정인 대마법사는 오로지 한 명.”

    단탈리안은 미소 짓고 있었다.

    “바로 너야.”

    정적.

    침묵이 마왕궁을 메웠다.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가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목록에서 다섯 명의 이름에 획이 그어졌다.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그녀의 이름만이 덩그러니 온전히 남았다.

    “후우.”

    단탈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세 번째 반론이 논파되었다. 힘겨운 운동 끝에 찾아오는 고양감 비슷한 것이 그의 전신에 퍼졌다.

    그는 온통 죽음의 기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A급 몬스터 열두 마리가 얼마나 이득을 줄지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퍼졌다.

    “뭐, 그렇게 됐어. 여기까지 알아내는 데 꽤 시간이 많이 걸렸지. 나라고 바로 알아챈 건 절대로 아니야.”

    “…….”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 하하. 사실 죽음의 기사를 열두 마리까지……? 바르바토스?”

    단탈리안이 멈칫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숙인 채 한발자국, 한발자국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한테로 다가갔다. 마침내 바르바토스가 그의 코앞에 섰다.

    “…….”

    “왜 그래, 이제와서 승부라도……어?”

    그녀의 작은 양손이 단탈리안의 머리를 붙잡았다.

    “――으읍!?”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동시에 그녀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키 차이가 사라졌다. 한 순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바르바토스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바르바토스가 여전히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입술을 살짝 떼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거 알아? 너 지금 존나 멋있어.”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딥키스였다.

    죽음의 기사들이 차마 주군의 남사스러운 장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들끼리 알아서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넓디넓은 마왕궁에 읍, 읍하고 신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약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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