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6 두 개의 음모 =========================================================================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아무렇게나 술병을 잡아서 포도주를 부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커졌다.
“야, 야!”
“술이 즐기라고 있는 거지 뭐 잡는 법 따로 있고 따르는 법 따로 있어. 그런 거 신경 쓰다가 인생이 퍼석퍼석해져.”
“이래서 남정네란! 무엇이든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해!”
“예이예이.”
단탈리안이 적당하게 대답했다. 바르바토스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그가 따르는 술을 얌전히 받았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움직였다가 자칫 황금보다 귀한 포도주가 한 방울이라도 쏟아질지 몰랐으므로. 단탈리안은 자신의 잔에도 대충 술을 따라넣었다.
“건배.”
“거, 건배.”
짜앙, 하고 크리스탈이 맑은 소리를 냈다. 단탈리안이 단숨에 잔을 기울여 마신 것에 반하여 바르바토스는 옴짝달싹 못했다. 그저 향기조차 제대로 감상하지 않고 맥주 마시듯 발레르뇽을 꿀꺽꿀꺽 넘겨삼키는 단탈리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햐아.”
“맛……있어?”
“맛있네. 진짜 맛있어. 흐으음, 개인적으로 포도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건 기가 막히네.”
그녀의 황금빛 눈이 반짝거렸다.
“어떤 맛이야? 응? 맛이 어떻냐니까?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봐.”
“……직접 마셔보면 되잖아.”
“그, 그렇지.”
바르바토스가 쉼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그녀는 자기암시를 걸었다. 이것은 단지 붉은색 알코올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붉은색 액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지……. 혼잣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바르바토스는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다. 바로 옆에서 단탈리안이 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드디어.
잔이 기울어지고. 포도주가 흐르고. 입술과 혀끝을 적셨다.
“……!?”
찰나, 바르바토스는 생명체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두개골이라는 이름의 단칸방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그곳은 어두컴컴하여 두 눈구녕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만 뭔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뭐지, 하고 의식에서 아득히 머나먼 저편에서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멀리서 어느 신이 속삭였다. 이것은 뭐지? 빛 그 자체이지 않은가? 보아라, 저 너머에서 빛이 새어오고 있지 않은가? 놀랍도다, 더더욱 빛이 거세지고 있구나!
‘아아, 아아아.’
그녀는 환상을 목도했다. 자신이 유목민이 되어 질주하고 있었다. 진짜 유목민이었다.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땅에서 울려퍼져 전달되어 오는 진동에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끼고, 마침내는 박차도 없는 박차를 내딛고, 마침내 고삐도 없이 고삐를 휘두르고,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고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일 따름이며, 벌써 말의 목덜미도 말의 머리도 없이, 오직 한 줄기의 갈기만이 휘날리게…….
“흑, 으흑흑. 흐윽.”
구원이었다. 참된 구원이 여기 있었다.
단탈리안이 식겁했다.
“뭐, 뭐야. 너 지금 설마 우냐?”
“살아있기 잘했어, 으헝헝. 힘든 나날이었지만, 이천 년은 힘들었지마안, 헝헝. 살아있길 잘했어.”
그녀는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포도주를 홀짝거렸다. 바깥으로 배출하는 수분을 술로 보충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그 와중에도 향기를 맡고, 술을 혀안에서 굴리고, 식도에 넘어가는 식감을 느끼는둥, 와인을 즐기기 위한 모든 절차를 단 한 차례도 빠트리지 않고 준수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 지나치게 포스트모던적인 광경에 단탈리안은 멍 때렸다.
“이리 내놔.”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워버린 바르바토스가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는 술병 바닥의 홈에 오른손 엄지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포도주병을 손에 고정시키고 왼손에 든 잔에다 술을 따랐다. 포도주를 따른 다음에는 행여나 방울이 튀지 않도록 술병을 우아하게 살짝 돌려주었다. 편집증이나 다름없는 주도(酒道)였다. 그 광경이 반복되었다.
울고, 술 따르고, 마시고.
“훌쩍, 훌쩍.”
─ 또르르륵.
“으헝헝, 맛있어, 너무 맛있다고 시발.”
─ 또르륵.
단탈리안은 자기 술을 마시는 것도 잊어버렸다. 울고불며 술을 따라마시는 겉모습 열두 살짜리 소녀의 모습은, 좋게 말해서 초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해서 조금 미친 것 같았다. 단탈리안은 게임 설정을 통해 마왕 바르바토스가 유명한 술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궁금한 점이 있어. 왜 맛있다면서 시발거리는 거냐?”
“으흑. 이렇게 맛있는데 마셔버리면 마시는 만큼 양이 줄어들잖아. 그건 정말로, 정말로 시발스러운 거야. 흑. 자고로 눈물 들어간 발레르뇽을 마셔보지 않은 자와는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 그랬지.”
명언의 출처가 누구인지 심히 의심스러웠지만, 단탈리안은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이쯤에서 운을 떼고자 했다. 바르바토스를 놀리는 것이 예상치도 않게 재미난 탓에 시간이 꽤 지나갔다.
“그래?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고?”
단탈리안이 아쉽다는 어투로 혼잣말했다.
“곤란하네.”
“으헝헝. 뭐가 곤란해, 자식아?”
“네가 리프의 시체에 남겨둔 표식에 대해 논하려고 왔거든. 눈물 들어간 발레르뇽을 마셔보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논하지 말라니, 나로서는 곤란할 수밖에.”
그 순간에.
바르바토스가 손에 쥔 술잔을 떨어트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의외로 냉정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해서가 아니었다. 손가락에 힘이 풀리는 정도의 작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술잔을 들어올려 막 입에 털어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이 정지했다.
“……으흥.”
그녀가 즉각 상황을 파악했다. 이천 년 동안 벼리고 다듬은 습관과 직관이 알려주었다. 속수무책으로 일격을 얻어맞았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훌륭하지 않은가.
황금빛 눈동자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암사자와 같은 눈빛이 대신 자리잡았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바르바토스에서 서열 제8위의 최고위 마왕으로 둔갑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그녀는 마비에서 풀려나 포도주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래서, 발레르뇽 505년 산인가.”
맥락이 없는 문장.
눈앞의 남자는 그 비약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아. 서열 제8위의 마왕 전하이니까. 긴장을 풀어재끼는 데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지.”
“슬슬 이해되기 시작하는군. 처음에 발레르뇽을 공중에 내던진 것부터 포석을 쌓은 거였어. 그 어마무지한 횡포에 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그녀는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했다. 이상하지 않았는가. 세상에 어떤 자가 뇌물을 주면서 그 뇌물을 던져버릴까. 심지어 그것이 뇌물을 받을 상대방에게 더없이 소중한데도 말이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해 기껏 장만해낸 보물을 일부러 던져버림으로써 호감을 떨어트리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폭거였다.
“거기에 더해 술을 깔보는 식으로 발언했지. 즉 나한테 이런 인상을 심어준 거야. 아, 단탈리안 이 개새끼는 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바르바토스가 숨죽여 웃었다.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말이 안 돼지. 이 포도주를 구한 사람은 다름아니라 너다. 당연히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보물인지 철저히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고작 술이 아니냐며 쫑알거렸어. 나를 주정뱅이 취급하면서. 그게 전부 이몸을 방심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거지……흐으응. 꽤 대단한 책사잖아.”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정하지 않을게.”
“자랑해도 좋아.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어, 애송이. 흑마법의 주인이자 십만 영혼의 군주요, 인간종 살해자인 나 바르바토스를 방심하게 만들었다고. 결국 네놈이 기습적으로 리프의 시체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잠깐 멈칫거리고 말았지. 암묵적으로 그것이 내가 한 행위임을 인정해버린 거야.”
황금빛 눈동자가 단탈리안을 슬쩍 흘겨보았다. 맹수가 자신의 적수를 노려볼 때 취하는 눈빛이었다. 한없는 경계심이 그곳에 서려 있었다.
“단탈리안. 서열 제71위의 나약하디나약한 마왕아. 그 단 한순간을 위하여 도대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어느 정도의 연기를 해온 것이냐? 그래. 처음 만난 순간에 허물없이 반말을 쓴 것도 연기였고 가장이었나?”
그녀의 경계심에 단탈리안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온갖 겉치레와 예의를 한 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듦이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말한 문구였다.
“저기, 바르바토스. 네가 지금 입에 대고 있는 포도주는 진실로 아름답지 않아?”
“호오. 내 한 순간을 빼앗을 정도의 가치를 이 포도주가 갖고 있다는 얘기로군.”
바르바토스가 감탄했다.
“실로 맞는 말이야.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어. 하, 패자로 하여금 패배에 승복할 뿐만이 아니라 패배를 기껍게 받아들이도록 하다니. 좋아. 순수하게 지금 이 순간을 기념하겠어. 완벽한 연극이었어.”
그녀가 크리스탈 잔을 내밀었다.
“나 바르바토스가 그대를 위하여 건배하지. 단탈리안을 위하여.”
“단탈리안을 위하여.”
챠아앙.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바르바토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너무나 환상적인 맛이었다. 이같은 술이라면 한 번 정도 속아넘을 가치가 분명히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다. 굳이 발레르뇽이 아니라 다른 최고급 포도주를 가져왔더라도 단탈리안은 자신을 속일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게 계략이었음을 깨닫고 나서 자기는 단탈리안을 미워하겠지. 허물없이 반말하라고 한 배려, 파이몬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응원, 무작정 찾아왔는데도 기꺼이 환영해준 친절, 그것들이 배신당하고 이용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단탈리안은 세계에서 가장 귀한 술을 대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당신을 속이는 데엔 이 정도 가치가 있습니다.’
최상의 배려가 아니고 뭔가. 최고의 응원이고, 최대의 친절이 아닌가.
그렇기에 바르바토스는 속아넘은 이 순간에도 유쾌하게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부를 싫어했다. 대체로 아부란 거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대담하게도 바로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목적을 이루었고, 그녀를 치켜세웠다. 부패한 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아부가 아니었다. 진심을 다해 싸운 검투사가 치열한 전투 끝에 상대를 치하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전사들만이 교감할 수 있는 우정이 있었다.
단탈리안은 승리를 거두었을뿐더러 상대의 마음까지 얻었다. 진정한 승리였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내가 한 짓인 걸 알았냐?”
“지금은 술을 즐기는 데 집중해도 좋을 텐데.”
“새끼, 나 궁금한 거 있음 못 사는 성격이야. 말 안 해주면 천하의 발레르뇽을 마시면서도 네 자식이 어떻게 알아냈을까 궁금해서 딴 생각이나 처할 거다.”
단탈리안이 키득거렸다.
“그래. 곤란하네. 모처럼 고생해서 준 선물인데 친구가 제대로 즐기지 못하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야.”
“그걸 아는 놈이, 어휴. 됐고. 얼른 잘난 아가리 좀 털어봐.”
“이것만 좀 마시고.”
단탈리안이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상대방을 안달 못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그의 같잖은 수작에 분노하면서도 잠자코 기다렸다. 승자가 복기(復棋)에 참여해주겠다는데 패자가 된 입장에서 닥달할 수도 없었다.
“캬아. 맛있다.”
“우쒸.”
“알았어, 알았어. 말해줄게.”
단탈리안이 웃었다.
“우선 발푸르기스 밤에 참여한 사람이 용의선상에 올랐지. 시기로 따져보면 청문회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아닐 경우 리프의 모험대를 후원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니까.”
“시발, 좋아. 그건 나도 이해했어.”
바르바토스의 하얀 미간에 인상이 졌다.
“그런데 발푸르기스 밤에는 서른두 명의 마왕이 참석했다고. 그중에서 어떻게 날 골라?”
“간단한 논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