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65화 (65/510)
  • 00065 두 개의 음모  =========================================================================

    “예에에――확실히――단탈리안 전하라고오오――.”

    바르바토스가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왜 이런 시점에서 나를 찾아왔지?

    각종 추론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판단을 내릴 때도 복잡한 논리보다 단순한 직관을 선호했다. 지금 단탈리안이 방문한 것에 틀림없이 흥미로운 내막이 깔려 있으리라 보고, 그녀가 말했다.

    “당장 들어오라 그래! 아니, 네가 직접 데려와.”

    “명으을――받듭니다아아――.”

    온몸이 희여멀건 유령이 말끝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유령이 땅 밑으로 쏙 들어갔다. 평소와 같았다면 기껏 멀쩡하게 지어놓은 통로가 아니라 땅속을 쏘다니는 부하의 작태에 한숨이라도 쉬었겠으나, 바르바토스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물었다.

    ‘혹시. 정말로 혹시지만……내가 한 짓을 눈치 챘나?’

    바르바토스는 등골이 짜릿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럴 리 없음을 알고 있는데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 것만으로 흥분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었다. 숨결에 미약한 열기가 섞였다. 물론 단정 짓기에는 일렀다.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커지는 법이었다. 적당히 체념하는 법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렇다면. 나는 아주 크게 만족할 거야, 애송이.’

    바르바토스의 입가가 히죽 올라갔다. 샛붉은 혀가 입술을 적셨다.

    잠시 후, 검은 망토를 두른 단탈리안이 정문에서 걸어왔다.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에는 손님용으로 지어진 텔레포트 장치가 있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단탈리안이 그녀를 보고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한 태도였다.

    “오랜만이야, 바르바토스.”

    그녀는 아주 잠깐 말문이 막혔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저렇게 허물없이 행동할 줄 몰랐다. 단탈리안과 바르바토스가 말을 놓기로 한 것은 맞았다. 그렇지만 서열 제8위와 서열 제71위이다. 인간사회의 계급에 비유컨대 황제와 훈작사만큼 서로 위상이 달랐다. 말을 놓으라고 해서 진짜 친구처럼 대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이런 인삿말을 들어본 게 대체 언제였는지.

    그녀가 짙게 미소를 지었다.

    “무례한 새끼, 예의는 보리빵에다 잼 처발라 먹었나. 숙녀의 집에 방문할 거면 적어도 오기 전에 연통이라도 줘야 할 거 아냐.”

    “저런, 실례했네. 하지만 봐줘. 아름다운 숙녀를 보러가겠다는 마음에 너무 설래여서 그만 예의차리는 것도 깜빡 잊었지 뭐야. 자고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온갖 겉치레와 예의를 한 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마련이지.”

    “깔깔깔.”

    그녀는 아부를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부를 빙자한 농담은 좋아했다. 농담이란 지긋지긋한 삶에서 소금과 같았다. 삶이 더럽게 퍼석퍼석하더라도 소금을 약간 뿌리면 그나마 먹을 만했다.

    “가히 듣기에 달콤한 언변이야. 파이몬 년의 낯짝을 눌러버린 그 솜씨, 내 인정해주마. 하지만 나는 그 창녀랑은 급이 다르신 분이거든.”

    “호오. 말씀인즉슨?”

    “고작 말빨로 실례한 걸 봐줄 정도로 만만하지 않다 이거야. 네 말마따마 진정한 아름다움을 갖추신 이 몸께 성의를 보여봐.”

    그럴 줄 알았지, 하고 단탈리안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술병이었다. 바르바토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술병에는 옛날 딱 한 번 구경해본 상표가 붙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그녀답지 않게 말이 떨렸다.

    “서, 설마? 설마 아니겠지?”

    단탈리안이 씨익 웃었다.

    “마계에서 고급 포도주를 만들기로 유명한 화탕지옥(火湯地獄). 그중에서도 용암 백작의 영지에서 일 년에 한 병만 생산하는 포도주 중의 포도주, 발레르뇽 대륙력 505년 산이다. 마침 올해로 정확하게 천 년이 되었지.”

    “말도 안 돼!”

    바르바토스가 절규했다.

    “바알 아저씨도 구하기 어려운 최고급 포도주잖아!”

    “에헴. 힘 좀 썼지.”

    “미친, 아니 세상에! 진품이야!? 진품은 아니겠지!?”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미 옥좌에서 엉덩이를 반쯤 일으킨 상태였다. 그녀는 마왕들 중에 최고의 술꾼을 자처했고 다른 마왕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녀에게 저 포도주는 성배와 같았다. 바르바토스는 예의고 체통이고 전부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고 헐레벌떡 아래로 뛰어갔다.

    “그거 나 좀 줘봐!”

    “당연하지. 자아.”

    단탈리안이 술병을 던졌다. 공을 던지듯 공중으로 높이. 그 어마어마한 횡포에 바르바토스가 경악했다.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애주가 눈앞에서 던지다니! 차라리 화가를 앞에 두고 세기의 명화를 갖고 저글링한다 해도 이보다는 예의바른 행동일 것이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미친 새끼!”

    그녀는 무심코 마법까지 발동해서 허공에 뜬 술병을 낚아챘다. 세 겹의 흑마법이 무영창(無詠唱)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길>, <안락사의 날숨>, <귀신 발걸음>, 세 개 모두 5서클 이상의 대마법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땅바닥을 밟아 십 미터 이상을 도약했다. 허공에 마법적인 안개를 발생시켜 술병이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병을 잡았다. 만일 인간계의 마법사가 방금 펼쳐진 장면을 목격했다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턱을 쩌억 벌렸을 것이다. 첫 번째로, 마법을 두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를 겹쳐서 발동했다는 것. 두 번째로, 세 겹의 마법을 아무런 영창도 없이 즉시 시동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위대한 마법의 향연이 단지 술병을 잡기 위해서 이용되었다는 것.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르바토스에게 인간계 마법사의 시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온 신경은 허공에 부유하는 발레르뇽 505년 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천 년을 헤아리는 삶 속에서 단련하고 또 단련한 마법은, 지금 이 순간, 오로지 직경 45cm의 유리병을 위해 쓰이고 있었다. 그런 집중력이 빛을 발한 것일까. 바르바토스의 손안에 술병이 착 들어왔다. 그녀는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아즈아아아아아아!”

    바르바토스가 두 손으로 술병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시합의 결정적인 순간 리바운드에 성공한 농구선수처럼 포효했다. 그녀는 분명 그라운드의 지배자였다.

    “보았냐, 시발! 이게 존나 서열 제8위 바르바토스 님의 위엄이다아아!”

    “……잘 모르겠지만 뭔가 대단한 게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것 같네.”

    “단탈리안 개새끼야! 네놈은 이 술에 입 한모금 댈 자격이 없어!”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획 돌려서 단탈리안을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열세 살이 되었을까 싶은 외견으로 눈을 부라리는 것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박력이 풍겨졌다.

    “어떻게, 세상에! 믿을 수 없어! 천 년을 묵은 포도주를! 제조장인이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마법, 오로지 술을 보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을 보름마다 한 번 걸어줌으로써 세대와 세대를 거쳐 완성시킨 걸작을! 시중에 풀리지도 않고 화탕지옥 대공이 판단하기에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한테 선물한다는 이 보물을 던지다니! 개자식처럼 던지다니! 까마귀 발톱에 낀 뗏국물만큼도 못한 새끼!”

    “음. 네가 지독한 술주정뱅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겠어.”

    “주정뱅이가 아니라 애주가다, 머저리야!”

    바르바토스가 떨리는 손으로 포도주병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헉.’

    대흑마법사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유리병도 보통 유리병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최고의 온도보존마법과 대충격마법이 반영구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설마 진품이냐, 하는 그녀의 심정이 어쩌면 진품일지도, 정도로 바뀌었다.

    “너, 너……이게 진품이 아니면, 진짜 날 기만한 죄로 가만히…….”

    “제일 처음 한 모금은 너에게 양보하지.”

    “딸꾹.”

    바르바토스가 저도 모르게 딸꾹질했다.

    “제일 처음 한 모금이……가, 가장 맛있는데?”

    “그러니까 양보하는 거야.”

    단탈리안이 방긋 웃었다.

    “우리 친구 아니냐.”

    “너……개새끼지만 진짜 좋은 개새끼구나.”

    “욕으로 들리지만 일단 예의상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

    바르바토스가 감격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자그마치 발레르뇽 505년 산의 첫 한 모금을 마셔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바르바토스가 허둥지둥했다.

    “이, 이럴 게 아니지! 포도주잔! 포도주잔을 어디 놔뒀더라!?”

    그녀가 팔을 빙빙 휘둘렀다. 그러자 정문 쪽에서 잡다한 쓰레기가 무더기로 날아왔다. 창고에 잠들어 있던 물건들이 바르바토스의 소환마법에 끌려온 것이었다. 드넓은 마왕방이 잡동사니로 꽉 찼다. 한참이 지나서야 바르바토스는 그중에서 크리스탈 포도주잔을 찾아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가, 간다?”

    “그래. 제발 좀 가라.”

    주정뱅이의 진상에 지쳐서 단탈리안이 한숨 쉬듯 말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그 무례한 태도에 보복했겠으나, 그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바르바토스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간다'라고 말한 것도 단탈리안에게 건넨 말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중얼거린 것이었다.

    “조, 좋아. 발레르뇽 505년 산……어디 그 응큼한 속살의 냄새를 나에게 내보여봐라.”

    “응큼한 건 포도주가 아니라 네 머릿속 같은데…….”

    “시끄러워!”

    바르바토스가 마법을 영창했다. 포도주의 코르크 마개를 도구 없이 뽑아내는 마법이었다. 아무리 좋은 병따개라 해도 마개를 따는 도중 코르크 찌꺼기가 조금은 술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코르크 찌꺼기는 술맛을 미묘하게 떨어트렸다. 그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하여 천일백삼 년 전에 바르바토스는 이른바 <병따개-마법>을 개발했다. 바르바토스는 이것이 전생을 통틀어서 그녀가 이루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자부했다. 고작 2서클 마법, 쓸 구석이라고는 포도주 병따기밖에 없었지만 여하간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방금 전에 5서클 이상의 대마법을 아무런 영창 없이 세 겹씩이나 펼쳐낸 바르바토스가 2서클에 불과한 병따개-마법은 세심하게, 아주 느릿하게, 최대한 신경을 집중하여 영창으로 펼쳐내고 있었다. 그녀가 마법영창을 중얼거릴수록 코르크 마개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조금씩. 또 조금씩. 그리하여 마침내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천 년 묵은 포도주 향이 바르바토스의 코에 화악 풍겼다.

    “…….”

    그녀는 감동했다. 정신이 상공 오백 미터쯤까지 날아갔다. 확실했다. 이건, 진품이었다. 빼도박도 못하게 진짜 <화탕지옥 용암영지 발레르뇽 505년 산(産)>이었다. 압도적인 향――그윽하면서도 황홀하고, 다채로우면서도 깊은――향기.

    바르바토스는 아직 술도 안 마셨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알딸딸했다.

    “처, 천국은 실존하는 것이었나?”

    “냄새만으로 그렇게 좋아해주니까 기쁘네. 이제 마셔보지 그래?”

    “마시라고……? 이걸……?”

    그녀가 덜덜 떨었다.

    “단탈리안……너는 이것의 가치를 전혀 몰라……어, 어떻게 이걸 마셔? 보물은 마시는 게 아니라구……?”

    “너 술 좋아하잖아. 여기 최고의 술이 있어. 그런데 안 마셔?”

    옳은 말이었다.

    바르바토스는 절망했다.

    “크윽!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기에 이 발레르뇽을 원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술을 좋아하기에……그렇기에 더더욱, 이 발레르뇽을 마실 수 없다! 역설! 부조리! 번뇌! 이것이 삶이냐!”

    “조금만 더 있으면 포도주 한 병으로 우주의 진리를 깨닫겠네. 야, 병 이리 줘봐. 내가 따라주마.”

    “으, 응.”

    바르바토스가 얌전히 포도주병을 넘겼다. 도저히 자기 손으로는 술을 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크리스탈 술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포도주병을 잡은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임마! 그게 뭐야!”

    병을 두 손으로 쥔 단탈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병을 쥐는 자세가 잘못되었잖아, 자세가!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으로!”

    “이렇게?”

    “아니, 시발! 손바닥으로 꽉 잡지 말고, 바닥에만 살짝!”

    “……이렇게?”

    바르바토스가 길길이 날뛰었다.

    “썅! 손바닥으로 잡지 말라고! 엄지랑 검지, 중지만 사용해서――.”

    “그냥 대충 좀 처마셔라 주정뱅이 알콜 중독자 년아.”

    단탈리안이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답 없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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