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64화 (64/510)
  • 00064 두 개의 음모  =========================================================================

    라피스가 양피지에 쓰인 목록을 손가락으로 쓰윽 흝었다.

    “보시면, 서열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산악파 인사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세력이 약한 마왕일수록 몬스터가 기거하고 인간종이 없는 위치에다 마왕성을 마련합니다.”

    라피스가 지적한 그대로였다. 서열 제1위에서 제20위까지는 산악파, 평원파, 중립파, 아무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은 자들이 비교적 균등하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서열 제20위 미만부터 급격하게 산악파의 비중이 늘어났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했다.

    “이거, 인간과 싸우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네.”

    “그렇습니다. 제7차 월맹군(月盟軍) 원정 이후로 마왕 전하들은 인간의 왕국과 전쟁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월맹군은 <던전 어택>에서 마왕들이 꾸리는 연합군을 가리켰다. 역사상 마왕들은 몇 번이고 인간계를 정복하고자 대대적인 군사를 일으켰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적도 많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원정 실패.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왕연합군이 무려 일흔두 명이나 되는 군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딱 그짝이었다.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력한 몬스터 군세를 갖고 있는데도 마왕연합 월맹군은 번번이 인간의 계략과 이간질에 휩쓸려 각개격파되었다. 게임 설정에 따르면 인간이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해산되어버린 경우도 있었다던가. 하여간,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월맹군 원정이 거듭 실패함으로 인해, 천 년 전까지만 해도 두어 명에 불과하던 산악파가 순식간에 과반수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백오십 년 전에 있었던 제7차 원정에서는 심지어 출정 자체를 거부한 마왕도 다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왕답지 않게 꼴불견이다!……이렇게 호통치고 싶지만.”

    내가 쓰게 웃었다.

    “손익을 고려하자면 당연한 행동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피스가 상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동의했다.

    패배할 것이 뻔한데 무엇하러 막대한 군비를 써가며 출전하겠는가. 하물며 적군이 아니라 아군 때문에 패배할 텐데. 마왕 본연의 의무가 마인들을 인간계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라 한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에도 정도가 있었다.

    문제는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월맹군 원정이 실패할 때마다 마인, 인간 입장에서 몬스터라 불리우는 종족이 대규모로 죽어나갔다. 그러자 도리어 인간종이 급속도로 세력을 불리게 되었다. 마왕연합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 것이었다.

    천 년 전부터 월맹군 편을 들었던 아인종들, 요정족이나 난쟁이족 등도 최근 백 년 사이 영구중립을 표명하고 있었다. 마왕들은 아인종의 이탈에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월맹군이 패배하고 나서 몰아닥칠 인간종의 보복 전쟁을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라는 명분에 마왕들은 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인종에서 주장하는 바는 솔직하게 변역해서,

    ‘너희 마왕들이 자꾸 멍청하게 패배하니까 애꿎게 우리만 손해보지 않느냐.’

    이것과 같았으니까.

    제1차 월맹군에서 제7차 월맹군까지 참가하고 희생해준 아인종 앞에서 마왕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못난 것은 아인종이 아니었다. 마왕측이었다. 그들이 패배를 자초했고, 아인종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마왕군은 피폐해졌다.

    마인들은 점점 마왕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인간계에서 마왕군을 도와주던 조력자들까지, 등을 돌렸다.

    예컨대 <던전 어택>에 개인 시나리오 배정되어 있는 쿤쿠스카 상회의 회장 이바르 로드브로크. 그녀 역시 무의미한 월맹 원정군에 실망하여 마침내 마왕측을 배신하고 용사한테 붙게 된다. 게임 후반부에 마왕들이 제8차 월맹군을 결성하여 마지막으로 용사에 대항하지만 그 역시 파이몬을 위시로 한 산악파의 내분으로 인하여 파멸. 월맹군은 지상에서 모든 마왕이 전멸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마왕측에 승리를 안겨주지 못한다.

    결국 요새 대다수의 마왕은 본진 지키기로 전략을 정하고 있었다. 산악파는 자의로, 평원파는 어쩔 수 없이.

    즉――.

    “산악파 마왕 전하들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수동적입니다.”

    아무리 가장 많은 마왕이 포진되어 있는 파벌이라 해도 군대를 동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청문회에서 파이몬 전하가 굳이 단탈리안 님께 정쟁(政爭)을 걸어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설령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오는 경우에도 무력적으로 나서지는 않습니다.”

    라피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파악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쟁은 자고로 명분 싸움이지. 불과 얼마 전에 파벌의 수장격인 파이몬이 나한테 패배했어. 날 공격하고 넘어질 명분이 사라졌지. 웬만한 시간이 지나지 않는 이상 직접 무력을 동원해올 리 없겠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직 범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서열 제68위의 벨리알이 몰래 리프 모험대를 지원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 있지 않을까요.”

    흐음.

    상황은 이러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적대하고 있는 세력은 마왕군 최고 파벌이다. 단신으로 맞서싸우면 하루조차 버티지 못하게 패배하겠지. 그러나 이들은 매우 수동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고, 나를 공격할 명분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벨리알인가 뭔가가 내게 해를 끼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할지라도 증거가 남을 만큼 대대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요컨대 내가 크나큰 위험에 처할 일은 없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이제 안심하고 천천히 던전을 방비하면 되는 것일까? 적당히 바르바토스의 평원파에 아부를 떨고, 적당히 중립파의 마르바스에게 중재를 요청하면서, 또 적당히 적들의 계략을 격파하며 모험자들을 물리쳐서 느긋하게 나의 세력을 확장하면 만사형통인 것일까?

    ‘아니다.’

    단호하게 부정했다.

    적대하는 이들을 가만히 놔둘 정도로 내가 호구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쪽을 건드렸다면 두 배로 갚아준다. 두 배를 갚을 수 없다면 이자로 남겨둬서 훗날 네 배로 갚아준다. 죽일 수 없다면 치명상을,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면 허리라도 물어뜯는다. 관용은 강자에게나 허락된 사치이다! 약자는 결코 적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다. 그렇게 놓아준 적이 언제 다시 성장하여 보복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적들이 수동적이라고?

    ‘고맙군.’

    마음속으로 웃었다.

    그쪽에서 방어적으로 나온다면 기꺼이 이쪽에서 치고 나가주겠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심이…….”

    “아니, 프랑크 제국의 성향을 고려하면…….”

    “알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트려서…….”

    오랫동안 라피스와 토론했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나에게는 <던전 어택> 최고참 플레이어로서 막대한 정보가 있었다. 인간계의 각 세력이 무슨 약점을 가졌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모르는 사항에 대해서는 라피스의 조언을 받아가며, 나는 만족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전략을 짜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진실로 무서우신 분입니다.”

    마라톤 토론 끝에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 누구도 이처럼 장대한 계략을 짜내지 못할 터입니다. 감히 어떤 자가 상상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두뇌에서 비롯했음을.”

    “성공하면 말이지.”

    “저 따위가 어찌 보장하겠습니까마는.”

    라피스가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백 년의 생을 걸고 확신합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성공하시리라고.”

    “든든하네. 그래, 나도 웬만하면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내가 아닐까 생각해.”

    “그럼 당장 마계로 돌아가서 첫 번째 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

    라피스가 일어서서 내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호감도가 50이 되었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예의에 엄격했다. 그녀의 한결같은 자세에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헌데 단탈리안 님. 이 총체적인 작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정하시겠습니까?”

    작전명이라.

    그런 게 필요하나 싶어도 분위기상 라피스의 장단을 맞춰주는 것 또한 마음에 끌렸다. 내가 머리에 떠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미네르바 작전이라고 부르지.”

    음모가 시작했다.

    *  *  *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의 던전, 통칭 「죽은 자들의 궁전」.

    바르바토스가 바윗돌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만사가 심심하다는 얼굴로 언데드 몬스터들의 재롱을 관람했다. 리프 모험대에 엮인 이후로 그녀의 삶에서 재미난 일이라고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아――. 됐어, 됐어.”

    그녀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여전히 재미없구나. 냉큼 꺼져라, 너희.”

    언데드 몬스터들이 송구해서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들은 슬금슬금 바르바토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같은 반응을 포함하여 그녀는 모든 것이 따분했다. 오로지 술과 섹스만이 그녀의 권태를 약하게나마 달래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술도 여자도 그닥 내키지 않았다.

    오롯이 바르바토스만이 살아 숨 쉬는 궁전에서 그녀가 혼잣말했다.

    “제기랄. 혹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나…….”

    으으, 하고 바르바토스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리프 모험대가 격파되는 광경을 눈앞에서 구경한 지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단탈리안이 움직였다든지 하는 소식이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르바토스는 심란했다.……설마 증거를 발견해지 못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그 정도 바보였으면 파이몬 개년이 쪽박쓰지도 못했을 거라고. 혹시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나? 겁쟁이로는 안 보였는데. 제68위 정도는 그래도 덤빌 만하잖아! 사내 새끼라면 배짱을 보이라고!…….

    “에잉, 시발. 모르겠다.”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단탈리온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거나 뭔가 알아냈다 해도 행동하지 않는다면……결국 그 정도 인물이었다는 얘기이다. 바르바토스 본인이 기대를 걸어볼 가치조차 없겠지.

    그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고로 배신하는 것이 익숙했고.

    배신당하는 것 또한 익숙했다.

    “…….”

    그녀가 하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딱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그렇게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하아, 그럼 쓸 만한 새끼가 나타날 때까지 또 무작정 기다려야…….”

    “바르바토스――전하아아――바르바토스――전하아아아――.”

    마왕방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직후, 바닥에서 희끄무레한 유령이 솟아났다. 하필이면 바르바토스의 발 바로 앞에서. 마침 회한에 잠겨 있던 바르바토스가 깜짝 놀랐다.

    “헉, 어머나 시발!”

    “전하아아――드릴 말씀이이이――.”

    “야 이 후장에다 꼬치 박아넣어서 십이지장을 꿰뚫어도 시원찮을 새끼야!”

    그녀가 버럭 소리질렀다.

    “나 알현할 때는 정문으로 공손히 들어오라고 말했어 안 말했어!? 시―발, 오백 년 동안 그 더러운 귓구녕에다 딱지가 쌓이고 쌓여 산맥을 이룰 정도로 말해줬으면 슬슬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송구하오나――드릴 말씀이이이이――.”

    “뭔데! 육시랄, 별 거 아닌 거면 존나 이번에야말로 성불시켜주마!”

    “그것이이――그것이이이――.”

    바르바토스가 야트막한 가슴에 손을 얹혔다. 아후, 심장 떨어질 뻔했네. 심장이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게 최고위 마왕이라는 족속이었지만 그래도 가히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3차 월맹군 원정에서 용사에 의해 심장이 뚫려본 적 있는 바르바토스로서는 더더욱이.

    그러나 유령 전령이 전해준 말에 바르바토스는 심장이 떨어지는 감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단탈리안――전하가아아――방문했사옵니다아아――.”

    뭐?

    바르바토스가 멈칫했다.

    “단탈리안이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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