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60화 (60/510)
  • 00060 두 개의 음모  =========================================================================

    어느 날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

    “…….”

    라우라와 내가 굳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본다고 할까. 다른 곳으로 미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를 움직이려 해도 근육이 돌이 되버린양 꼼짝하지 않았다. 황당함, 경악, 놀라움, 자괴감, 부끄러움, 질척한 감정이 밑물과 썰물처럼 오갔다. 단순히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런 뻘쭘함을 느낄 이유가 없겠지. 즉 라우라와 나는 지금 단순히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알몸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잠깐.

    일단 변명해두자.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하게 생겨난 사건이었다. 나에겐 유일한 가신(家臣)의 나체를 훔쳐보겠다는 파렴치한 목적 따위 전혀 없었다.

    설령 라우라가 아주 아름답고, 가끔씩 그녀에게 두근거리거나 성욕이 치밀어올랐다 해도, 솔직히 말해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 그랬다 할지라도, 어거지 써서 알몸을 볼 의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맹세할 수 있다. 그녀는 내 신하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지 않은가. 당연히 의사를 존중받아야 한다.

    부하랍시고 마음대로 부려먹는다면 그야말로 쓰레기 폭군, 신하에게 등 뒤를 찔려도 변명할 거리 따위 하나 없겠지. 누가 폭군을 진심으로 따르겠는가.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라도 라우라는 소중하게 지켜야 했다. 아니, 무엇보다 라우라는 고작 열여섯 살이다! 원래 세계로 따질 경우 이제 중학교 3학년……나는 어린애를 탐하는 취미가 없다, 정말이다…….

    나의 더없는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던전 시설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성에는 목욕시설이 전무했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나한테도 딱히 목욕이 필요없었다. 땀과 같은 노폐물이 아예 나지 않았으니까. 마왕이 된 이후 나는 음식을 먹을 필요도 씻을 필요도 사라졌다. 잠은 하루에 두세 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무척 편리했다. 내가 음식을 먹거나 몸을 씻는 이유는 오로지 일종의 사치를 부리고 싶어서였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

    밤새도록 우리 마왕군이 앞으로 걸어갈 행보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기분을 전환할 겸 던전의 지하연못으로 향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지하연못은 물이 맑았고 해충이나 수중생물이 살지 않았다. 마력이 지나치게 고여서 그러는 거라는데 여하간 목욕하기에 딱 좋았다.

    어디에서 굴러떨어졌는지 물 속에는 마광석들이 있어, 연못 바닥에서부터 수면까지 파란 빛무리가 연하게 올라왔다. 마광석이 발하는 열 때문에 수중온도가 딱 적당히 따뜻했다. 푸른 빛깔의 연못에 뛰어들어 수영하면서 샘 주위에 자라난 종유석을 느긋하게 구경하노라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극락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신비하고 기분 좋은 체험을 즐길 수 있었다.

    푸른 연못이 보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왠지 모르게 신이 나서 얼른 옷을 벗어버린 나를 누가 탓하리오――.

    그리고 연못가에 다가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중에서 퐈아! 하고 라우라가 올라왔다.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동굴 속. 그러나 물밑에서 비쳐오는 파란 빛무리가 여자아이의 나신을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드러냈다. 라우라의 긴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나는 굳어버렸다.

    냉철한 두뇌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내 머릿속에 기거하는, 벌레 같은 자아들이 현재 사태를 두고 제각기 소리높여 의견을 개진했다. 리프의 모험대를 맞이했을 때와 버금가는 속도로 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라우라는 여기서 목욕을 하고 있었어.’

    ‘아무리 천재라도 신체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그야 목욕할 필요가 있지.’

    ‘어떻게 맨날 피부에서 향긋한 냄새가 나나 싶었더니 매일 씻고 있었구나…….’

    ‘멍청한 새끼! 지금 그딴 걸 생각할 때냐! 위급 상황, 긴급 상황이라고! 당장 데프콘 2단계를 발동해야 한단 말이다!’

    ‘하긴 던전에 딱히 목욕시설이 없어. 생각해보면 인간인 라우라를 배려하지 못했네. 이제부터라도 인간들을 위한 시설을 고려하는 것이 어때.’

    ‘내 생각으로는……일단 잠자코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잖아? 이 기회에 마음껏 즐기자고.’

    ‘잠깐만. 지금 의견이 너무 중구난방이야. 선택지는 세 가지야. 도망치거나, 변명하거나, 이대로 같이 목욕하거나.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 번째 선택지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는 것을 덧붙여야만 하겠어. 이 의견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여주지 말아줘.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니까.’

    ‘이제서야 네놈들이 전부 병신 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군. 닥치고 그럴듯한 변명부터 생각해내. 상대방은 자그마치 공작 영애라고, 무식한 놈들아. 네놈들이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태평하게 살다와서 얼마나 이 세계에 무식한지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흠, 회의 도중에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얘기들이 죄다 월월! 왈왈! 깨갱깨갱! 정도로 들린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군.’

    ‘월월! 왈왈! 깨갱깨갱!’

    ‘좋아. 우리들이 대체로 개새끼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겠어.’

    ‘그거 최근 들어 들은 소식 중에 가장 희소식이네!’

    ‘이건 그냥 감상에 불과한데 말이야. 우리 지금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라우라의 알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감각이 병신이 아니라면 대충 1분 정도 흘렀어. 축하해. 결국 세 가지 선택 중에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최악의 선택지, 그냥 가만히 서 있는다를 선택했군. 나 자신의 멍청함에 대해선 더 이상 감탄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다시피 훌륭하리 만치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있었다.

    관념적인 존재자끼리 의사소통을 시킨다는 점에서 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폭주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신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얘기이겠지만 지금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

    “…….”

    라우라의 나신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완만한 곡선을 따라 푸른 빛이 비추었다. 비 내린 날의 수국 같은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열여섯 살인데도 불구하고 라우라의 몸은 소녀의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벌써부터 제대로 굴곡이 져 있었다.

    새하얀 살결이 별미였다. 눈빛 살결은 적당히 근육이 붙어 탄력이 있었다. 그런 탱탱한 피부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슬그머니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주군.”

    라우라가 이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올수록 수면 위로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다시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부푼 엉덩이, 그 아래로 어릴 적부터 승마에 의해 단련된 것임에 분명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탄탄하게 이어졌다. 소녀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연못의 빛에 언뜻 비추었다.

    마침내 라우라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살짝 파인 쇄골에 물이 고여 있었다. 소녀의 몸에서 물이 작디작은 실개천을 그으면서 미끄러졌다. 유두, 손끝, 엉덩이에서 방울져 떨어져서는 동굴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물기에 막 젖은 소녀의 향기가……물씬 풍겨왔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주군.”

    자그맣게 열린 입술 사이로 또 한 번 빗물 내음이 새어나왔다. 코가 아니라 귀로 맡는 향기였다. 종유석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라우라의 목소리가 동굴벽을 때리고 더더욱 낮게 퍼지었다.

    방금 들린 것은 종유석 물소리였던가, 아니면 내가 침을 삼킨 소리였던가.

    고요와 긴장 속에서 라우라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주군도 목욕하러 온 것인가?”

    엥?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여기는 물이 좋다. 눈도 즐겁고 몸도 즐겁다. 과연 주군이 마음에 들어할 만하다.”

    라우라는 소녀답게 비명을 지르지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뺨따귀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로 기쁜 듯이 싱글벙글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군한테 이곳을 알려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숨겨진 명소가 아니었던 모양이군. 섭섭하지만 주군과 마음이 통한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하다. 후후.”

    “어……아…….”

    이 무슨 절호의 기회인가.

    그때까지 시끌벅적 떠들어대던 자의식 애벌래들이 한 목소리로 한 마음으로 합창했다.

    ‘물타기를 시전해라!’

    지금껏 나온 어떤 의견보다 유효하고 적절했다. 라우라는 내게 알몸을 보인 것과 내 알몸을 본 것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왜인지 몰라도 아무튼 나에게는 구원과 같은 반응이었다.

    내가 말을 더듬거렸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알몸 같은 것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는 듯이.

    “마, 맞습니다. 오늘따라 뭔가 깨끗해지고 싶어서.”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다! 목욕은 영혼의 세탁. 몸이 깨끗해지면 마음도 저절로 깨끗해지지. 모험대를 무찌르고 인근 마을을 복속한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심신에 쌓인 피로를 풀기에 적시이다.”

    “그렇습니다. 저, 전쟁이란 단순히 싸움의 반복이 아니지요.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라우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백 번 지당한 말이다. 주군의 말씀은 한마디한마디가 금과옥조로 삼을 만하다.”

    “하하하. 과찬입니다…….”

    “주군은 지금부터 목욕할 생각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일이 풀릴 모양이었다. 눈보신은 눈보신대로 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으니 최선의 결과가 나왔다.

    안심하는 나를 향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 떨어졌다.

    “그럼 소녀와 함께 목욕하는 것은 어떠한가.”

    네?

    *  *  *

    쿤쿠스카 상회 제2급 사무마이자 단탈리안의 전담원, 라피스 라줄리.

    그녀는 최근 들어서 할 일이 부쩍 늘어났다. 일단 제2급 사무마로 승진했다. 제4급에서 단번에 제2급으로 올라가자,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출세가도에 들어섰다면서 놀랐다. 이에 따라 온갖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접근, 다시 말해 인사와 청탁과 권유로 얼룩진 추파가 그녀에게 던져졌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관심없습니다.”

    라피스는 모든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과 자원을 단 한 가지 일에 쏟아부었다. 즉, 단탈리안을 보좌하는 일에. 그녀는 단탈리안이 앞으로 상회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리라 확신했다. 라피스의 독단이 아니었다. 쿤쿠스카 상회 주인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녀가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진 사건은 단연 모험대-자경단 연합부대와 단탈리안이 맞붙은 일이었다. 라우라도 단탈리안도 더 이상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이긴 전투에 더 미련을 둘 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라피스는 생각이 달랐다.

    ‘일개 하급 모험자들이 중장갑을 갖추다니 믿기 어려운 일.’

    단탈리안이 모사꾼이고 라우라가 책사라면, 라피스는 행정가에 가까웠다. 그녀는 전투의 상세한 원리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도 전투 바깥의 분야에 대해서 누구보다 능통했다. 식량은 어떻게 배급할 것이고, 병참은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무장과 병력은 어디서 동원할 것인가 등등.

    ‘사슬갑옷, 그것도 네 고리로 이루어진 사슬갑옷. 인간계의 평민이 장만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모험대와 자경단에 지급된 무장은 값비쌌다. 그들이 가진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단탈리안 전하의 얘기를 듣자하니 리프는 옛날에 마왕성에서 200골드 가량의 돈을 약탈했다. 거금이긴 해도 칠십 명이 넘는 부대 전원에게 튼튼한 사슬갑옷과 잘 버려진 강철창을 지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을사람들에게 단탈리안을 배신하라고 부채질하면서 리프가 뇌물을 동원한 것이 밝혀졌다. 대략 백 골드. 즉 리프의 수중에는 최대 백 골드의 돈만 남아 있었다. 이걸로는 도저히 중갑보병을 준비할 수 없었다.

    ‘뒤가 의심스러워.’

    라피스는 혹시 모험대의 대장이라는 작자가 은행에서 거액의 사채를 빌려쓴 것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철저한 조사 끝에 리프가 어디에서 돈을 빌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유력자나 영주가 후원해준 것 같지도 않았다.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리프는 어디서 거금을 마련했다는 말인가?

    ‘분명히 모종의 인물 혹은 세력이 모험대를 도와줬어. 하지만 대체 누가……?’

    라피스가 전용 탁자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다.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는 그녀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그녀의 분홍색 양갈래 머리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라줄리 님.”

    “말씀하세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라피스가 말했다. 별 볼 일 아닌 일로 자신의 업무를 방해했다가는 응당의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그런 압박감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라피스는 절대영도의 무표정 상관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 모험대 대장의 시체가 있지 않습니까. 숲속에서 발견된…….”

    자세한 조사를 위해 라피스는 단탈리안으로부터 몇몇 모험자의 시체를 양도받았다. 자그마한 증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서.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게 저기, 정말 곤란한데 말이지요…….”

    직원이 우물쭈물거렸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본론은 간단히. 결과는 간결하게.”

    “죄,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중에 받지요. 리프의 시체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직원이 울상을 지었다.

    “그 인간의 가슴팍에 검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마법적인 각인입니다.”

    “마법적인 각인?”

    라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녀는 그것이 어쩌면 배후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될지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냉정한 눈초리로 직원을 쳐다보았다.

    “어떤 각인입니까?”

    “그러니까……그게……서열 제68위 마왕 전하인 벨리알 님의 징표였습니다…….”

    라피스는 누군가가 쿵, 하고 머리를 친 것만 같았다. 불길한 전율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단탈리안 전하를 적대하는 자의 배후에 다른 마왕이 있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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