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9화 (59/510)
  • 00059 ending no.02  =========================================================================

    “…….”

    황녀가 남자를 샅샅이 살폈다.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뒤통수에 자그맣게 나 있는 뿔이 없었다면 평범한 사내로 여겼을지 몰랐다.

    무대 위에서 남자는 채찍질을 맞았고, 조교사들에게 범해졌다.

    몬스터의 잔혹무도한 제왕이 한낱 인간 남성에게 뒷구멍이 뚫리는 광경은 과연 뭇 귀족 영애의 여심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살결이 하얗고 몸이 호리호리하여 보는 맛이 있었다. 마왕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간드러져서 또한 일품이었다.

    이같은 쇼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평생 제왕학을 공부해온 황녀는 냉정하게 상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있었다.

    제도(帝都) 최고위 귀족만이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공연'은 여기 오페라극장에서만 열리지 않았다. 제국의 상류층은 도덕적으로 끝없이 타락했고, 풍요하지만 지루한 일상을 자극할 만한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극장주들은 귀족의 후원과 돈을 얻기 위하여 앞다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곳은 마왕이 비역질을 당한다, 라는 선전문구를 앞세워서 최근 인기를 석권하고 있었다.

    무대에는 마왕만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프, 인어, 세이렌, 고위요정 등 노예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종족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그들은 난교나 고문을 당하다가 무대에서 퇴장했다. 손님에게 초이스된 것이었다.

    쇼를 구경할 수 있을뿐더러 즉석에서 원하는 종족과 성교――혹은 그보다 더한 무언가――할 수 있다는 것이 이곳 오페라 극장의 인기 요소라고 했던가.

    “유리아. 그대라면 이 공연을 돈 주고 보겠는가?”

    아무도 없을 터인 유리객실에서 황녀가 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황녀가 재차 말했다.

    “대답해보거라. 명령이다.”

    “……백작 각하.”

    한 여인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저희 그림자에겐 입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인데 어찌 입이 없겠는가.”

    “……이렇게 그림자와 사적으로 얘기를 나누시는 것은 각하께도, 또한 저희 그림자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둘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생기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칫 각하께서 저희를 냉정하게 잘라버리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흐응, 하고 황녀가 여인을 바라보았다.

    “유리아.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말이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는가?”

    유리아라 불린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소녀.

    네 살에 고대제국어를 터득했고, 다섯 살에 고대공화국어에 능통했고, 일곱 살에 현존하는 모든 기하학에 통달했으며, 열 살에 제도의 학술원 전원에게 '건국 이래 황실 제일의 천재'라고 찬사 받았다. 열여섯 살인 현재 4서클 마법사이자 3급 검사이며 동시에 제도학술원 명예회원으로서 문무양도(文武兩道), 지용겸비(智勇兼備), 출장입상(出將入相),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제국 황실의 괴물.

    엘리자베트 아타나시아 에바트리에 폰 합스부르크.

    이미 백작의 작위를 앞세워 궁정회의에 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자기 세력을 일궈냈다. 썩어빠질 대로 썩어빠진 제국이지만 그래도 실력 있는 지사가 소수나마 남았고, 그들은 여지없이 엘리자베트 황녀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황녀파'라 불리었다. 작금에 이르러 황녀파 없이는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를 암살한 것도 황녀 전하의 계략이라는 소문이 있지.’

    황실에는 네 명의 황자와 세 명의 황녀가 있었다. 그중 엘리자베트 황녀는 제3황녀였다. 언니들이 어릴 적에 폐병으로 죽었고, 세 번째 오라비와 친동생이 차례대로 죽었다. 세 번째 오라비는 갑작스러운 전염병에 걸려서, 세 번째 오라비는, 네 번째 황자이자 친동생은 사냥 도중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서.

    오라비들의 죽음에 엘리자베트 황녀가 깊이 관여했다는 소문이 한때 떠돌았다. 평소 건강했던 제3황자가 그렇게 갑작스레 병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뿐더러, 황족들이 주로 다니는 숲에서 미노타우르스 같은 몬스터가 나타난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제3황자와 제4황자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엘리자베트 황녀의 황위 계승권이 두 단계나 올라갔으니 이게 전부 그녀의 계책 아니었겠는가. 음모론에서 그렇게 떠들었다.

    하지만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엘리자베트 황녀는――고작 열세 살이었으니까.

    더군다나 황녀는 어릴 적부터 도덕적으로 완벽했다. 부모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그녀의 인덕은 유명했다. 저잣거리의 창부에게도 비웃음 당하는 제국 황실이었지만, 그런 뒷담화가 오갈 때마다 ‘하지만 황녀 님은 예외이지’라는 단서가 꼭 붙었다.

    독보적인 천재에다가 자신만의 세력이 강력하다.

    도덕적으로 완벽하여 학자와 민중의 전적인 지지를 받는다.

    결정적으로, 그녀 외에 다른 황위계승권자인 제1황자와 제2황자는 인간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황녀가 황위계승후보 제3위에 불과하지만……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이들은 모두 그녀가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황제에 등극할 거라고 점쳤다. 만일 그녀가 아무런 수법도 쓰지 않는다면 신민들 스스로 봉기하여 그녀를 여황으로 떠받치리라.

    “…….”

    유리아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황녀가 사사로운 정에 발목을 붙잡히는 장면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황녀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되었다. 그대가 지키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으면 충분하다.”

    유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각하.”

    “용서한다. 그보다 내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구나. 그대라면 돈을 주고 이 공연을 기꺼이 관람하겠느냐고 물었다.”

    “저에게는 다른 이가 강간 당하는 광경을 몰래 훔쳐보는 취미가 없습니다.”

    “흠. 그대는 세상만사에 호기심을 느끼는 마법사 아닌가. 자그마치 마왕이 비역질하는 모습이란 적지 않게 구미에 당길 텐데.”

    ……그리 말씀하시는 백작 각하께서도 4서클 마법사이지요.

    속마음을 삼키고 유리아가 말했다.

    “각하께서 오늘 공연을 보신다 하셨기에 저 개인적으로 마왕 단탈리안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호오.”

    황녀가 흥미롭다는 표시를 내보였다. 유리아가 머릿속으로 정보를 취합했다. 어떻게 얘기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순식간에 판단했다.

    “마왕이나 되는 자가 인간에게 쉽게 잡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왕은 몬스터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고, 자신의 마왕성에 틀어박혀 요새를 구축하므로 포획하기가 극도로 힘듭니다. 즉.”

    “저 마왕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다는 얘기이렷다.”

    “그렇습니다.”

    황녀가 한 모금 홍차를 마셨다. 이야기를 듣겠으니 계속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유리아는 그림자로서 너무 수다스럽게 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 천재 황녀의 마음을 꺾기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호감을 얻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유리아는 7서클 고위 마법사였지만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었다. 마족의 혼혈만큼 인간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족속이 따로 없었다.

    황녀에게 잘 보이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그녀가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해나갔다.

    “제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마왕 단탈리안은 어리석게도 직접 인간의 도시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북부 도시였다고 하더군요.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탈리안은 그 도시의 노예시장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노예시장에?”

    “예.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사실입니다만…….”

    유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비웃음이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노예 한 명을 탈출시키고자 노예시장을 습격했습니다.”

    “성노예? 지금 성노예라 했느냐?”

    “예. 각하, 혹시 파르네세 가문을 아십니까?”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한때 사르데냐 왕국을 양분하던 공작가 아닌가.”

    “파르네세 가문에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식들이 있었습니다. 수국전쟁에서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하자, 그중 둘째 영애가 성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하여 마왕 단탈리안이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황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멍청하군. 제왕이 고작 성노예 한 명을 위해 거동했다니.”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로 우둔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왕은 국가와 도시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의 대적. 정체가 들키면 성히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을 텐데도 가볍게 움직였다. 본인이야 자기 나름대로 신변보호에 신경을 썼다 생각했을지 모르겠으나, 저렇게 잡혀서 한낱 극장의 볼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마왕의 어리석음을 증명한다. 흐응, 정말로 납득할 수 없구나.”

    황녀가 입가를 쓰다듬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녀가 물었다.

    “혹시 파르네세의 영애가 그토록 절세미인이라 하던가? 마왕이 마음이 동하여 움직일 정도로?”

    “각하께서 궁금해하실 줄 감히 짐작하고.”

    유리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며칠 전에 직접 파르네세 영애를 보고왔습니다.”

    “오호.”

    황녀가 작게 감탄했다. 단지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눈앞의 여인은 기본적인 정치를 할 줄 알았다.

    기본적인 정치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알아채고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보력과 지력이 필요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인맥과 행동력이 필요했다. 정치란 정보력, 지력, 인맥, 행동력의 싸움이었다.

    ‘그림자로 썩혀두기엔 아까운 인재로군.’

    황녀는 신민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그만큼 그녀를 아니꼽게 여기는 세력도 많았다. 대표주자가 제1황자와 제2황자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암살자를 파견했다.

    그림자들 사이에서는 황녀의 수비를 맡는 것을 가장 기피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죽어나가기 일쑤였으니까. 아무리 그림자들 개개인의 실력이 높다 할지라도 제1황자와 제2황자가 보내오는 암살자의 실력 또한 가공할 만했고, 결국 피로 피를 씻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황녀가 생각했다. 이 마법사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야겠다고. 여인은 암투의 희생양으로 내버려두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황녀는 인재를 아끼고 사랑했다.

    유리아는 자기가 점수를 얻었다는 것을 막연하게 느끼면서 말했다.

    “파르네세 영애 역시 제도의 고급창관에 묶여 있었지요. 과연 그녀는 경국지색의 미모를 뽐냈습니다! 각하께 제 진심을 말씀해드리자면, 저는 각하를 뵙고 다시는 다른 여자의 미모에 감탄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유리아가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제 믿음이 며칠 전에 깨지고 말았음을 고백하겠습니다. 파르네세 영애는 각하의 옆에 놓여도 아주 빛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정도의 미모를 갖추었습니다.”

    “마왕이 이성을 잃고 행동할 만했다 이거로군.”

    “예. 제왕이 한낱 미색에 이끌려 패망한 것이 확실히 한심합니다만……그같이 한심한 짓거리를 벌인 제왕이 역사에도 여럿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마왕 단탈리안은 전무후무한 멍청이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황녀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흥미가 식었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왕이 몬스터와 소통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왔다. 혹시 앞으로 거사를 벌이는 데 있어 마왕이란 자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었지. 몬스터의 조력을 얻는다면 내가 그리는 거국적인 그림에 큰 이득이 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또한, 보거라. 저 자의 얼굴을.”

    황녀가 유리벽 너머의 무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서 마왕이 조교사의 육봉에 박히고 있었다. 형편없는 신음소리가 마법도구에 의해 증폭되어 유리방까지 울렸다.

    “모든 희망을 잃은 표정이지 않은가? 절망에 지치고 패배한 자의 얼굴이다. 나는 희망을 모르는 자를 내 휘하에 두고 싶지 않다. 그자가 여색 때문에 신세를 망친 자라면 더더욱이나 그러하지.”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 하고 황녀가 유리방에서 나갔다.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유리아가 투명마법을 시전했다. 유리아는 유리방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번 무대 위의 단탈리안을 쳐다보았다. 고통과 신음으로 절여진, 평범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저 역시 반은 마족이니까 당신을 도울 사명이 있지만……당신처럼 멍청한 자를 주군으로 모시기는 싫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조금 더 나은 분을 따르려 합니다.’

    유리아가 미련없이 방에서 나갔다.

    텅 빈 유리객실에는 그후로도 한동안 남자의 연약한 신음이 울려퍼졌다.

    ─ Ending no.02(Bad Ending): <극장의 인기 아이돌★>

    ─ 엔딩 앨범이 추가되었습니다.

    ─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이번 엔딩에 라피스의 호감도가 제한으로 걸린 까닭은, 단탈리안이 노예시장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라피스의 호감도가 높으면 라피스가 단탈리안을 도와주고, 호감도가 낮으면 도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본편과 달리 단탈리안은 노예시장에서 도망치는 데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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