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7화 (57/510)
  • 00057 E급 모험대  =========================================================================

    *  *  *

    “헉……허억, 헉…….”

    리프는 숨이 목청까지 차올랐다. 태어나서 이렇게 달려본 적이 언제 있었을까. 어릴 적 산골짜기에서 나무를 할 때 승냥이를 마주쳐서 죽도록 도망쳤을 때, 그러니까 수십 년 전의 곰팡이내 나는 기억을 떠올려야 할 만큼 리프는 있는 힘껏 달렸다. 숲속 깊은 곳으로, 더 깊숙한 곳으로.

    “이쯤이면 될 거 같네.”

    리프와 대조적으로 마법사는 여유로웠다. 몇 마리 쫓아오던 고블린도 그녀가 처리했다.

    “허억!”

    그 말을 듣자마자 리프가 풀숲에 주저앉았다. 거의 구르다시피 땅에 누웠다. 나무뿌리와 돌멩이가 섞여서 바닥이 울퉁불퉁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심장이 부풀다 못해 터지려 했다. 아랫배가 칼에 날카롭게 째인듯 아팠다. 달리기 박자를 지키지 못한 탓이었다.

    “쯧쯧쯧. 남자가 칠칠치 못하게. 이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우월하다니까.”

    “히끅……흐억, 헉…….”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제일 열등하고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가장 고귀하지.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중간쯤에 위치할 수 있는데, 적어도 여자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보다는 한결 낫거든. 옛다.”

    여인이 낚싯대를 드리우듯 지팡이를 리프의 얼굴 위에 갖다댔다. 그녀가 조그맣게 뭐라고 속삭이자 지팡이 끝에서 물줄기가 내렸다.

    “아. 입 벌리려무나. 아.”

    “우프픕……퍼흡.”

    “옳지 잘한다. 거 입 뻥긋하는 게 꼭 붕어새끼 같네.”

    리프가 힘없이 손을 저었다. 여인은 손짓이 뭘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오 초 정도 계속 물을 퍼부었다. 하지만 손짓 이상의 반응이 없자 시시해졌는지 쳇, 하고 지팡이를 거두었다.

    ─ 매앰, 매앰, 매애앰.

    막바지 매미 소리가 숲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리프는 의식이 아득했다. 평형 감각이 흐릿했고, 머리가 뜨거운 증기로 들이찬 것 같아 어지러웠다. 옆에서 여인이 계속해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는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마신 덕분일까, 느릿느릿하게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여인의 재잘거림이 인식됐다.

    “처음부터야. 처음부터 전투의 양상에 대해 다르게 판단했어. 어이, 대장 양반. 댁은 마왕성을 공략해서 함락시켜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봤지?”

    “허억……그야, 당연하지…….”

    “그래. 그랬겠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대에게 마왕성이란 애시당초 그런 물건이니까. 반대편에게도 마찬가지야. 마왕에게 마왕성이란 공략을 당하지 않고 지켜야만 하는 것, 뭐 그쯤 되겠지. 하지만 말이지. 단탈리안 그놈은 달랐어!”

    그녀가 흥분해서 빠르게 속닥거렸다.

    “모험대가 마왕성에 집착할 때, 단탈리안은 마왕성 너머를 쳐다봤어. 바로 모험대를 말이야. 모험대만 쓰러트릴 수 있으면 어디서 싸우든 별로 상관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지. 깔깔, 인식의 차이라고 할까. 생각의 수준이라고 할까. 애시당초 나무꾼 출신 따위가 감당할 만한 적수가 아니었네.”

    “개쌍년이…….”

    리프가 힘없이 이를 물었다.

    “생각의 수준 좋아하시네. 시벌, 마왕 새끼는 그냥 겁쟁이라 지한테 불리한 전장에서 도망친 거에 불과해.”

    “얼씨구.”

    “봐라, 덕분에 우리는 마왕 새끼의 금화를 털어버릴 수 있었지. 내 몫을 제외하고는 다들 뒈져버리는 바람에 허공으로 날려버렸지만……아무튼 그놈은 머저리 쫄보 새끼다.”

    “절씨구.”

    여인이 뚱뚱한 파리라도 보듯이 짜게 식은 눈으로 리프를 내려다봤다.

    “이래서 남자는 안 돼. 상대방이 잘나서 패배한 게 아니라 자기가 실수해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는걸. 야, 대갈통이라곤 세숫바가지로밖에 못 쓰는 밥팅아. 자기가 불리한 전장에서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가 유리한 전장을 선택한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 쯔쯧. 게다가 내 마법이 없었으면 마왕성 금고도 못 열었을 새끼가 입만 뚫려 갖고는.”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리프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그녀가 주변의 전나무처럼 쭈욱 기지개를 폈다.

    “응. 오랜만에 바깥 공기 좀 쐬니까 상쾌하네. 적어도 오늘만큼은 나도 상쾌한 말, 바른 말만 쓰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건 좀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도 항상 우아하게 바른 말만 쓰면서 살고 싶어. 사실은 그래. 오랜만에 멋진 전략을 봐서 기분이 좋아.”

    “…….”

    리프는 지금까지 마법사를 머릿속이 꽃밭인 호구라고 여겼다. 그는 생각을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방은 끊임없이 수다스럽게 대화했으며, 심각하게도 딱히 대화 상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잣말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험대의 패착은 거슬러 올라가면 딴 마을들을 괜히 약탈한 거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번 전투에서 마을들이 주요 전장이 되리라 예상치 못한 탓이고, 그건 결국 마왕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지. 흠, 지금 생각해보니까 고블린들을 주력으로 삼은 이유도 대충 알겠어.”

    “으구구.”

    리프가 힘겹게 일어섰다. 가만히 놔두면 여인이 언제까지고 복기를 명분으로 떠들 것 같았다. 대충 정신머리가 돌아왔으니 혹시 추격조가 올 것을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쳐야 했다.

    “이 전투가 끝나고나면 산맥에서 사는 인간마을이 겨우 일곱 개 정도로 줄어들잖아. 게다가 일곱 마을은 전부 단탈리안에게 복종한, 말하자면 단탈리안의 아군이라고. 이렇게 되면 인간에 비해 고블린 개체수가 너무 많아져. 일곱 마을을 다 합쳐봤자 삼백 명 정도에 불과할 텐데, 고블린들은 전사의 숫자만 해도 사백 마리. 승부가 안 되지.”

    단탈리안은 의도적으로 고블린의 숫자를 줄이려고 애썼다.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모험대가 당장의 전투를 좁은 시야로 바라보는 와중에 단탈리안은 한 수, 두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어. 심지어 몬스터와 인간 간의 생태계까지 신경 쓰다니! 깔깔, 정말이지. 일개 모험자가 대적할 수 있을 리가…….”

    “그래. 그래. 마왕 새끼께서는 겁나게 잘나셨고, 너는 더 잘나셨다. 잘난 년놈들끼리 서로 똥꼬나 빨고 있으시라고. 난 먼저 간다.”

    “응?”

    리프가 터덜터덜 숲길을 걸어갔다. 우선 꽤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 위치를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정상에서 지리를 파악하고 별자리를 길잡이 삼아 걷다보면 며칠 안으로 도시에 도착할 터.

    ‘씨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가.’

    이번 전투로 인해 리프는 동향 출신의 동료 모험자를 깡그리 잃었다. 그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내장을 까맣게 물들이며 번져 올라왔다.

    ‘아니다, 아직 아니야. 지금은 딴 생각하지 말고 도시로 귀환하는 거에 집중한다.’

    다른 생각에 빠지고도 살아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산맥이란 공간은 우습지 않았다. 나무꾼인 리프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일단 지옥과 같은 전쟁터에서 생존한 것을 감사하자, 나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민하자, 그래도 늦지 않는다, 리프가 그리 다짐하면서 걸어갔다.

    “야. 어디 가?”

    등 뒤에서 여인의 볼맨소리가 들렸다. 리프가 수풀에 침을 뱉었다.

    “어디 가긴 썅. 지랄맞은 산맥에서 나갈 거다.”

    “흐응? 너 나가면 안 되는데.”

    여인이 길게 콧소리를 냈다.

    “좋아. 기분이다. 오늘은 기분도 좋고 하니. 며칠 동안 함께 다닌 정도 없지는 않고……어이. 무식한 나무꾼 자식아. 거기서 다섯 발자국 이상 움직이지 마라.”

    “예이예이. 아주 자알 나셨습니다요. 따라오려면 네 마음대로…….”

    “나는 다섯 발자국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였다.

    ─ 싹둑.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가던 리프의 발목이 '무언가'에 잘렸다.

    “……어?”

    리프가 맥없이 넘어졌다. 꼴불견 사납게 엎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갑자기 오른쪽 발목 아래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왼발과 양손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낙법을 펼쳤다.

    “어? 크흥? 웬 힘이…….”

    전쟁터의 피로가 뒤늦게 밀려왔나, 하고 리프가 인상을 썼다.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려 시도했다. 그러나 오른쪽 발목과 발바닥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바닥이 대지를 굳건하게 밟아 온몸을 지탱하는 감각도, 뒤꿈치부터 종아리로 전달되는 근육의 긴장도, 아무것도.

    “씨발, 이게 무슨.”

    “난 분명히 경고했어.”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프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이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히죽 웃고 있었다.

    “인간들 대부분이 귀를 가졌는데도 이상하게 그 귀가 뇌까지 이어진 경우는 얼마 없단 말이지.”

    “썅, 네 년이 장난친 거냐?”

    리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으르렁거렸다.

    “당장 원상복귀 해둬라. 안 그러면 그 잘난 머리팍이 도끼날 구경하는 줄 알어.”

    “흐응. 난 당당한 놈이 좋긴 한데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애송이까지 좋아하진 않아서. 패배한 개가 월월 짖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더라. 뭐, 기분이야. 이번에도 친절하게 미리 말해줄게. 존댓말 써.”

    “개후라질 년이 어디서 되도 않는 수작질을――.”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오른손 검지를 휘둘렀다.

    ─ 싹둑.

    또 다시 무언가가 허리를 지나갔다, 하고 리프가 느낀 순간이었다. 그가 별안간 바닥에 뒹굴었다. 종아리, 허벅지, 허리까지 하반신 전체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어? 어?”

    아픔이나 고통이 없었다.

    단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하반신이 아예 사라진 것처럼.

    “아우, 역시 나한텐 이게 적성이 맞는다니까. 존나 평생 배워본 적도 없는 사대원소 마법 쓰느라 대가리 터지는 줄 알았네. 좇 같은 사대원소 마법 같으니! 애새끼들이 낭만을 몰라, 낭만을. 응? 옛날에는 사대원소 마법은 마법 취급도 안 했어.”

    “……개 씨발 호구 썅년, 지금 뭔 짓거리를 처짓거리 한 거냐.”

    “영혼을 잘랐지.”

    여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세히 설명해봤자 쌀벌레 같은 두뇌로는 절대 못 알아먹으니까 대충 그렇게 알아둬. 지금 네 자식의 하반신은 죽어 있어. 반죽음 시체지.”

    “너 이 년, 대체…….”

    “그래 그래. 우리 애새끼, 궁금한 거 많지?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까짓 거 다 말해줄게.”

    땅바닥에 누운 리프를 향해 여인이 허리를 구부렸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한 번만 말해줄 거니까 잘 들어. 뒈지기 전에 너 새끼만큼 내 친절을 받은 새끼가 달리 없어요. 자아. 나는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이고요, 파이몬 빠돌이 정박아 새끼가 단탈리안한테 괜히 헛짓거리 하는 게 눈구녕에 띄었고요, 혹시 단탈리안이 좇 될까봐 몰래 도와주려고 했고요, 인간으로 둔갑한 다음 너 새끼한테 일부러 접근했고요, 다행히 넌 내가 호구인 줄 알고 덥썩 미끼를 문 호구였고요.”

    “뭐? 마왕? 무슨.”

    “의외로 단탈리안이 잘 싸워서 등장할 차례가 없었고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마왕 후배 만나서 지금 기분이 참 좋고요, 사자가 새끼 무럭무럭 자라라고 벼랑에다 처넣듯이 나도 앞으로 그럴까 생각 중이고요, 이 기회에 마왕 같지도 않은 별 쓰레기들을 단탈리안한테 청소해주라고 부탁할 생각이고요. 됐지? 다 말했다.”

    잠깐――하고 리프가 손을 들었다.

    여인,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가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말했다.

    “싫어. 내가 존댓말 쓰라고 했지, 썅놈아.”

    바르바토스의 검지손가락이 장난스럽게 까닥거렸다.

    약한 바람과 비슷한 것이 이마를 관통하는 것을 리프는 느꼈다. 그것이 끝이었다. 리프는 무언가를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죽음이었다.

    “끄으으읏.”

    바르바토스가 일어서서 허리운동을 했다. 목운동까지 끝마치고, 그녀가 리프의 시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흐음. 어떻게 단탈리안 애기한테 힌트를 준담.”

    그녀가 턱을 괴고 고민했다.

    한참 뒤에 아, 하고 그녀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여인은 자신을 천재라고 노래하면서 리프의 가슴팍에 모종의 문양을 새겼다. 그녀는 문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시체 주변에 짐승과 벌레를 쫓는 마법을 풀어놓았다.

    “좋아. 완벽해. 오늘따라 기분 좋은 일만 생기는군. 이런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만 있어도 참 좋을 텐데 말이지, 시발.”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걸음걸이로 숲속을 향해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여인의 모습은 곧 숲의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 매앰, 맴, 매애앰.

    시체를 둘러싼 전나무 숲에는 매미소리만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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