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6화 (56/510)
  • 00056 E급 모험대  =========================================================================

    “…….”

    리프는 물론 눈앞의 방해자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 몇 개 있긴 했다. 먼저 인간 백 명의 추격을 따돌리고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 중갑을 입어 몸이 무겁다는 것. 방금까지 전투를 치르느라 체력이 떨어졌다는 것. 결국 자기가 죽을 확률이 무척 높다는 것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리프가 오른팔을 늘어놓았다. 창끝이 땅바닥에 툭, 하고 부딪쳤다. 전장의 흥분에 도취된 바람에 힘든지도 몰랐던 근육통이 슬금슬금 기어왔다. 온몸이 피로로 신음하고 있었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저기 있는 애새끼들은 뭐하는 놈들이라요!?”

    모험자들이 리프 주변으로 달려왔다. 도망치라는 리프의 외침을 듣고 대열에서 부랴부랴 이탈해버린 자들이었다. 몇몇은 책임감 없이 전열을 망친 리프에게 욕지거리를 한바가지 퍼부었다.

    리프가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불안과 초조가 섞인 눈동자들. 일부의 모험자가 빠져나오자 급속도로 무너져내리고 있는, 중갑보병들의 전열. 그 사이로 뛰쳐나오는 고블린들.

    핏물이 튀는 허공 너머로 수백 명의 인간들이 점점 더 조여오고 있었다. 리프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후방에는 고블린 대부대가, 양옆에는 마을사람들이, 눈앞에는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백 명의 인간이.

    “……방진.”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방진을 짜…….”

    “방진을 짜라!”

    대장의 말을 알아들은 간부 사내가 외쳤다. 곧이어 명령이 퍼졌다. 삼십 명 남짓하는 모험자와 일부 자경단원이 리프를 중심으로 네모나게 진형을 짰다. 고블린들의 파상공세에 견디다 못해 전열을 이탈하고 도망쳐온 자경단원들도 끼어들었다.

    “싸게싸게 움직여!”

    “시발 이게 당최 뭔 난리여!”

    무사히 방진(方陣)에 합류한 부대원은 그러나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동료들의 무책임한 도주로 인해 전열이 헝클어져 죽었다. 그들이 죽어가는 순간에 모험대 대장을 향해 내뱉은 저주의 말들을, 리프는 물론이고 부대원 전원이 들었다.

    “리프 개새끼야아!”

    “좇 같은, 끄에엑! 끄악!”

    결국 부대원 절반이 전열을 사수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마른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바퀴벌레 같은 고블린 떼거리가 시체에 달라붙었다. 살점이 찢기었고 피가 낭자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방진이 완성되었으나 사기가 형편없었다.

    “대장님, 시방 뭔 난리라요……!”

    “마을 새끼들은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야! 언제까지 지켜볼 생각이냐고! 대장님! 당하고만 있을 겁니까!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에요, 전멸!”

    “형니이임!”

    리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진 한 가운데에 리프와 마법사가 서 있었다. 마법사는 중갑보병 돌격 때도, 전열 공격 때도 부대 맨 뒤에 위치했기에 쉽게 방진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항상 다른 생각에 잠겨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았던 그녀도 지금만큼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이곳저곳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호구년이 마지막 희망이다.’

    리프가 이를 빠득 갈았다. 골렘을 상대시키려고 마법사는 고이 아껴두었다. 덕택에 마법사는 지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꽤 위력적인 마법을 부담없이 써재낄 수 있으리라.

    그것을 '송곳'으로 삼는다. 포위망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향해 마법을 있는 대로 토해내게 만든다. 적군이 난데없는 마법의 향연에 혼이 싹 달아나면 그 틈새를 단박에 일점돌파한다.

    ‘육시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촉박했다. 벌써 고블린들이 들이닥쳤다. 당장은 튼튼한 방진에 막히고 있지만 고작 삼십오 명 정도가 이룬 진형이 길게 버틸 순 없었다. 되든 안 되든 밀어붙여야 했다.

    리프가 마법사에게 물었다.

    “어이, 제일 크고 센 마법으로 준비할 수 있겠냐.”

    “으으응. 있긴 있는데 그거 가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긴 힘들걸.”

    마법사가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양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일대일 전투는 특기여도 대군(對群)마법은 몰라서. 뭐어, 대군마법 자체가 5서클은 돼야 써먹을 수 있지만서도. 일단 그렇다고 알아둬.”

    “시발, 쓸데없는 군소리는 닥쳐. 얼른 준비나 해.”

    “이미 했어. 댁이 꽁지 빠진 개처럼 도망치다 멈췄을 때부터 미리 주문을 외워뒀는걸.”

    리프가 놀라서 여인을 쳐다봤다.

    “이 빌어먹을 전투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듣는 희소식이군.”

    “하아암. 한수두수 앞을 내다보는 건 기본 소양이라구, 무식한 모험자 씨. 당신 같은 족속과 다르게 마법사는 조금 똑똑하거든. 그중에서 특히 나는 똑똑한 축에 속하지. 결론적으로 당신보다 나는 훨씬 더 똑똑해. 이거 중요하니까 밑줄 쫘악.”

    “제길.”

    마법사 년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하고 리프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소모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눈동자를 번득거리면서 포위망 어느 부분이 가장 허약한지, 단 삼십여 명의 부대원으로 뚫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찾았다. 옆에서는 마법사가 끊임없이 흥얼거리듯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 나도 여기 몬스터를 이끄는 양반에겐 조오금 못 미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심리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용해먹네. 일부러 마을 두 군데를 모험대에 합류시키지 않은 건 그 마을들에 의심을 집중시키려는 책략이었어. 걔네들이 배신했으니까 합류하지 않는 거다, 하고 믿게 만든 거지.”

    그녀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삶 속에서 드디어 흥미거리를 찾아내 흥분했다. 긴 속눈썹 뒤편에서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반대인데 말이지. 배신자라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합류해와서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노리겠지. 만일 네 개의 마을이 전부 모험대에 호응했으면 의심이 들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영리하게도 두 개의 마을은 합류시키고, 두 개의 마을은 잔류시켰어……헤에. 심리적이야. 무척 심리적이야.”

    “정신 사나우니까 닥쳐!”

    “당신이야말로 닥쳐. 입냄새가 나잖아. 입냄새가 너무 심해서 솔직히 당신이 인간인지 음식물쓰레기인지 헷갈릴 정도인걸. 그나저나 왜 골렘을 동원하고 있지 않을까? 그게 궁금해. 인간의 중갑보병은 물론 강력하지만 골렘으로 대응하면 충분할 텐데. 흐으응.”

    리프가 여자 마법사의 입을 닥치게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도저히 포위망의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의 병력이 세워져 있었다. 어림잡아서 인간만 이백 명……고블린은 삼백 마리가 훌쩍 넘었다.

    그 와중에도 모험자가 한명한명 죽어나갔다. 어떤 부대원은 고블린 투석병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머리통이 깨졌다.

    “대장님! 더 이상 못 버텨요!”

    “혀, 형니임!”

    드디어 그들도 양옆에서 다가오는 마을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군이 저렇게 살기등등할 리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입밖으로 뱉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리프는 이판사판 해보자는 식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아그들아! 마법이 터지자마자 저쪽으로 내달려라! 절대로 멈추지 말고, 누가 뒈져도 신경쓰지 말고 달려! 알았냐!”

    “예! 대장!”

    “쏴갈겨!”

    리프가 여인한테 소리쳤다. 그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인이 땅바닥에 내리꽂은 지팡이 끝에서 검은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땅바닥에 마법진이 조그맣게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방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넓게 퍼졌다.

    “저주로 저주를 씻기리라.”

    그녀가 마법을 발동하는 데엔 한 소절밖에 소요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열두 개의 불덩어리가 생겼다. 그녀가 지팡이를 들어 방향을 가리키자, 투석기에서 쏘아진 바위같이 불덩어리들이 튀어나갔다. 그 방향에 있던 고블린과 인간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어?”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 사람 몸체만한 불덩어리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가속도가 붙은 불줄기들이 쭉쭉 뻗어나갔다. 삼십 마리의 고블린과 열 명의 인간이 불살라졌다. 순간적으로 포위망 한곳이 엷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본능적으로 불길을 두려워하는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골에 살며 평생 마법을 본 적 없는 인간들도 크게 당황했다. 그들에게 마법은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리프가 포효했다.

    “우아아아악!”

    그는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곧장 내달렸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대원들도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스물다섯 명으로 줄어든 전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러대며 오직 한 방향으로 뛰었다.

    “크아아아!”

    마법에 당황하지 않고 용감하게 모험대를 막아서는 인간도 있었다. 그런 작자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리프는 자동적으로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들었고, 길목을 막아선 인간한테 던졌다. 손도끼가 빙글빙글 날아 상대방의 이마에 푸욱, 하고 명중했다. 상대는 목뼈가 꺾어지면서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그 시체 위를 스물다섯 명의 부대원이 우르르 밟고 지나갔다.

    “씨이이발 한번 죽지 두번 죽냐!”

    “뒈져! 뒈져어억!”

    진형 따윈 없었다. 막무가내였다. 그저 경험과 본능만이 살아움직였다. 그들은 팔이 가는 대로 창을 휘둘렀고, 동료와 협동했으며, 눈앞의 몬스터와 인간을 처죽였다. 마법사 또한 자기 재량에 따라 불덩어리를 만들어내 가장 위협이 되는 방해물을 향해 쏘았다.

    앞으로, 그들은 꾸역꾸역 앞으로 뛰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대원이 한 명, 또 한 명 스러졌다. 마법은 제대로 공포심리를 일으켰지만 병력에서 지나치게 밀렸다. 투석병이 던진 돌멩이에 등뼈가 바스라져서, 고블린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바람에 넘어져서, 상대편 인간들이 내지른 창끝에 팔뚝이 째여서, 수없이 다양한 이유로 인해 부대원들이 쓰러졌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동료의 죽음을 밟고 포위망을 뚫어낸 이도 있었다. 인의 장벽을 뚫고 나왔을 때 생존자는 고작 세 명이었다. 리프, 마법사 그리고 간부인 사내.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나고도 한참 달려나갔다. 뒤편에 있는 몬스터와 인간이 언제라도 자신들을 쫓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  *  *

    “놀랍군. 마법사를 고용했을 줄이야.”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 세계에서 마법사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보통 마법사는 여러 세대를 거쳐서 체내에 가문의 비기를 축적했고, 그에 따라 강력한 마법을 발휘했다. 한 명의 쓸만한 마법사가 탄생하려면 수 세대에 이르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라우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적군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은 온전히 소신의 실책이옵니다.”

    “짐이라고 어찌 마법사의 존재를 파악했겠는가? 상대방이 예상 외의 한 수를 숨겨두었을 따름이라. 그대는 지나치게 스스로를 책망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마을 아래의 평원을 가리켰다.

    “도망쳤다 하나 고작 세 명에 불과하다. 아니, 이젠 두 명으로 줄었군.”

    멀리서 세 사람 중 한 명이 마침 쓰러졌다. 고블린이 쏘아낸 돌멩이에 맞은 모양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얼른 근처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도망치는 데 숲속이 유리하기 때문이리라.

    “네 겹의 목책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함락시켰다. 삼백에 이르는 인간을 도륙했다. 두 명을 제외하고 중갑보병대 전원을 몰살했다. 이것이 대승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평원에서 몬스터와 인간이 함성을 질렀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저녁하늘만큼이나 대지가 빨갛게 물들었고, 그 지상에 선 쪽은 적이 아니라 우리였다. 심지어 내 직속 부하인 골렘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라우라. 짐은 그대가 부하인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그녀를 손수 일으켜세웠다.

    진심이었다.

    이 놀라운 전적을 겨우 열여섯 살 소녀가 해냈다고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이번 전투를 통해 그녀가 바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임을 증명했고, 내 전적인 신뢰를 얻어냈다.

    몸을 일으켰는데도 라우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약하게, 아주 약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랬다. 십 년 후에 철혈의 재상이 될 운명이었다 해도 지금의 그녀는 영락한 귀족영애였고, 얼마 전까지 성노예로 취급받은 여자였고, 일생토록 군대를 이끌어본 적 없는 소녀였다.

    중압감이 있었으리라.

    내 믿음에 보답하고자 참았으리라.

    표현하지 않고 심장 한구석에 묻었으리라.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 한꺼번에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밀려온 것 아닐까. 그렇기에 단 두 명을 놓쳤는데도 내 기대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을까.

    내가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잘했습니다, 라우라. 정말로 잘했어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대가 무릎을 꿇을 일이 없도록 하라.”

    라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예. 나의 주군이시여.”

    그녀는 웃고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힌 채로.

    다섯 마을이 연합하고 칠십 명의 모험자-자경단원으로 이루어진 E급 모험대의 침략은, 우리 마왕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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