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E급 모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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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대는 분명 혼란에 빠질 것이옵니다.”
라우라가 옆머리를 꼬면서 말했다. 산맥의 무더운 햇살이 그녀에게 비추었다. 여자아이라면 으레 피부 탓에라도 신경쓰기 마련인 햇볕에 그녀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라우라는 녹색빛 눈동자에 지도만을 담고 있었다.
“배신자라 생각했던 이들이 도리어 적군한테 당해버렸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둔한 자라면 그저 무시하고 넘어갔으나, 리프라는 사내는 인근 마을을 규합할 정도로 썩 머리가 좋은 인간입니다. 그 남자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르겠지요.”
마왕군이 배신자마저 해치워버렸나?
어쩌면 사실 배신한 것이 아니었나?
“적군이 자기 살을 갉아먹으리라 생각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고로 그 남자는…….”
* * *
‘배신자가 없었다.’
리프의 눈에 참혹한 광경이 들어왔다.
리프 일행이 마을을 쑥 둘러보았다. 마을, 아니 마을이었던 공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목책 주변에는 고블린 시체 몇 구가 놓여 있었다. 울타리를 제외하고는 마을 안의 건물 중에 크게 손상을 입은 곳은 없었다. 군데군데 참혹하게 널브러진 살덩이와 핏자국이 없었다면 마을사람 모두 일터에 나갔다고 착각할 법했다.
그것이 더 으스스했다. 고블린들이 인간의 시체를 남김없이 해치웠다는 뜻이니까.
일행 모험자가 혀를 내둘렀다.
“고블린 새끼들이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으면 어째 제대로 된 시체 하나 없냐.”
“으휴, 거진 뼈밖에 안 남았네. 그래도 사람 숫자가 오십은 넘었을 텐데 이 자리에서 다 먹어버린 거여?”
“그게 아니지. 다 못 먹은 인간은 지네 부락으로…….”
“하이고, 신이시여!”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리프 일행이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자경단장 한 명이 리프에게 말했다.
“아우. 당최 영문을 모르겠네. 마왕이 왜 여기 마을까지 공격했을까?”
“아마도……끄응. 배신자가 없었던 것 같구랴. 적어도 자경단이 없는 모든 마을이 배신한 건 아니었수다. 내 형님들을 혼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요.”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하필 자경단이 있는 마을이 공격당한 것은 단순한 우연인 듯싶었다. 리프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형님들. 이건 오히려 기회요!”
“기회?”
자경단장들은 마을의 참상을 목격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분위기를 쇄신할 겸 리프가 밝게 소리치자, 사람들이 물음표 섞인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프가 한번도 헛소리를 지껄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이 사내라면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하고.
“멍청하게도 마왕 새끼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르고 닥치는 대로 마을을 습격하는 거 아닙니까요. 이 사실을 다른 마을들에 뿌려보십쇼. 걔네가 어떻게 반응하겠소?”
“아!”
자경단장들과 주변의 모험자들이 뭔가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수다.”
리프가 씩 웃었다.
“당장 우리와 함께 힘을 합치려 들겠지. 안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콧구멍 하나 안 풀고 아군을 만들게 된 겁니다요. 지금까지야 식량 좀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바람에 관계가 영 불편했지만,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어디 과거지사가 중요하겠소.”
“맞아. 무릇 공통의 적이 생기면 연합하게 되지!”
사람들이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끌끌, 마왕이라더니 멍청하구만 그래!”
“알아서 우리를 도와주고 말이야!”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지. 악마 자식.”
리프가 혀를 찰 뻔했다. 자기가 없었다면 현재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했을 양반들이 희희덕거리니까 심기가 뒤틀렸다. 호사는 호사였으므로, 리프는 굳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았다.
모험대에선 곧바로 소식을 퍼트렸다. 마왕군이 미친 듯이 인간의 마을을 공격하고 있으며 거기에 예외는 없다고.
리프가 기대한 대로 마을들은 격하게 반응해왔다. 마왕타도를 울부짖으면서 자기네 편에 합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홀로 막을 수 없다면 여럿이서 막으면 되오!”
“아쉽지만 지금 마을을 버리고 한곳으로 모입시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생각합시다.”
촌장들이 속속들이 리프의 모험대에 지휘를 받겠노라고 약속했다. 이같은 호재가 달리 없었다. 합류하지 않은 마을이 딱 두 군데 있었지만 리프는 개의치 않았다.
‘그놈들이 배신자였군!’
리프는 마왕군이 산맥의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음을 이미 파악했다. 우연치 않게도 합류하지 않은 두 군데의 마을은 동쪽 방향으로 맨 끝에 위치했다. 그제서 만사가 명확해졌다. 산맥에 있는 열두 개 마을 중에서 두 곳이 배신했다. 마왕군은 배신자 마을이 밝혀지지 않도록 일부러 서쪽부터 행군한 것이었다.
‘그게 네놈의 패착이다, 겁쟁이 새끼야.’
리프가 단탈리안을 비웃었다.
그가 생각했다. 만일 자기가 단탈리안이었다면 자경단이 없는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을 것이다.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의심암귀에 빠트렸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자그마치 일곱 마을――열두 마을에서 세 마을이 초토화됐고 두 마을이 배신했기에, 남은 마을은 일곱이었다――이 연합하는 일도 없었으리라. 물경 사백 명에 이르는 인간이 집합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드는 일도 없었으리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행군할 시 차례상 네 번째 관문에 해당하는 마을로, 리프가 모든 인간을 집결시켰다. 견고한 목책이 겹겹이 세워졌다. 해자 역할을 하는 구덩이까지 팠다.
‘이제 망치와 모루가 완벽해졌다!’
망치는 칠십 명에 이르는 모험대-자경단. 전원 중장갑으로 무장했다. 고블린쯤이야 백 마리이든 이백 마리이든 두렵지 않았다. 망치의 핵심이 공격력에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모루는 사백 명에 이르는 마을사람. 장비가 형편없어도 그들에게는 굳건한 목책과 깊은 해자가 있었다. '모루가 적군을 방어해내는 사이에 망치가 기습한다'라는 작전의 핵심에 비추어볼 때, 사백 명의 인간-목책-해자는 충분한 방어력을 갖추었다. 고블린 사백 마리?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얼마든지 막아낸다!
리프가 목책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려 4중으로 된 목책은 웬만한 정규군조차 막아낼 것처럼 튼튼했다. 그는 뿌듯함과 흥분, 그리고 얼마간의 서글픔에 젖어들었다.
“……다네프. 이제 네 복수를 할 수 있게 됐다.”
간악한 마왕에게 속아서 희생당한 마을 동료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복수의 다짐으로 지새웠던가.
“마왕 단탈리안의 모가지를……우리 잘센 마을의 영정에 갖다바치마!”
리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날 새벽, 태양이 뜨기 전에 리프는 칠십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던전에 침입했다. 리프가 예상한 그대로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들은 마음껏 마왕방을 약탈하고, 어떠한 사상자도 내지 않은 채 유유히 던전에서 빠져나갔다.
리프가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이겼다!’
* * *
“이겼다고 생각하겠지요.”
라우라가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주군, 얼마 전 제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아군을 속이려면 나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마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행동을 보여주되 그 행동이 쌓이고 중첩되어 이윽고 마지막에 가서는 한 덩어리의 계책으로 승화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라에 의해 레벨을 광업한 날, 내 흑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되는 대로 횡설수설한 것이었다. 하지만 라우라는 거기서 무언가 대단한 진리를 찾은 듯했다.
“상대방은 잔뜩 방심했다가 최후에서야 그때까지 일어난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나,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주군께서는 그리 가르침을 베푸셨사옵니다. 소신 라우라 데 파르네세, 주군의 혜안에 감탄할 도리밖에 없나이다.”
그녀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크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알!”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뭐든지 드릴 테니, 제발――.”
“엄마! 으아앙! 엄마! 엄마!”
아비규환.
수백 명에 이르는 인간이 역시 수백 명에 이르는 고블린에 의해 도륙되었다. 어떻게든 마을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향해 고블린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허벅지가 쑤셔지고, 팔뚝이 잘리고, 목덜미가 물리자 제아무리 힘쎈 장정이라도 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몸의 반쪽이 시체가 되어 사람들이 땅에 꼬꾸라졌다. 죽이는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소리와 환성이 동시에 이루었고, 대지에는 피가 개천을 이루었다.
나와 라우라는 마을 정문에 서서 인세의 지옥을 관람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용자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골렘과 고블린의 벽에 막혀 결국 오다가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다. 그들의 용기에 대가로 주어진 것은 흉악한 고블린의 이빨뿐이었다. 와그작, 와그작――거의 통뼈까지 씹어먹을 기세로 고블린 두세 마리가 시체 하나에 달라붙어 쉬지 않고 살점을 뜯었다.
“모험대의 패배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사옵니다.”
라우라가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아마 살점과 뼈가 씹히는 소리가 그녀에게는 새소리쯤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라. 어디서부터를 얘기하는 것이냐?”
“모험대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마을을 핍박했을 때부터입니다. 모험대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지요. 그 결과 모험대에 참여한 인간과 모험대에 갈취당한 인간, 이렇게 인간이 두 부류로 갈렸습니다. 애시당초 내분이 생긴 것이옵니다.”
그것이 지금의 광경을 만들어냈다.
과연 네 겹의 목책 그리고 해자로 이루어진 방어선은 두터웠다. 설령 골렘 부대를 동원하더라도 해자에 걸려 쉽사리 돌진하지 못했을 터. 골렘의 돌파력이 상실된다면 믿을 것은 고블린밖에 없는데 사백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 대부대도 저만한 요새를 뚫기란 요원했다. 내 마왕군은 인간의 격렬한 대항에 돈좌했을 것이고, 리프 모험대가 돌아올 때까지 지지부진하게 공방전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왕군이 방어선을 뚫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에서나 그러했다.
공방전은 지극히 쉬웠다. 우리는 고블린을 돌격시켰다. 몬스터 대부대가 목책에 당도했을 쯤――정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마을에 섞여들어간 소위 배신자들이 안에서부터 내응한 것이었다.
‘뭐, 뭐야!?’
‘시발 왜 문이 열렸어!?’
‘배신자가 있다!’
수비측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마을 두 개 인원에 달하는 인간들이 파르시를 선두로 하여 일구간의 목책을 점령했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놓여진 목책이었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유유히 정문까지 통과했다. 누가 배신자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맞서싸울지 도망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무리들로 순식간에 몬스터가 밀어닥쳤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할 수밖에.
강인한 산사람 사백 명――그중 백 명은 배신자였지만――이 지키는 요새였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전투가 빠르게 끝났다.
“마왕 나으리이이! 하하!”
파르시가 마을 대로를 통해 걸어왔다. 그가 촌장으로 있는 마을의 인간들이 파르시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양쪽 팔뚝에 노끈을 묶었는데 그것이 고블린에게 '먹으면 안 되는 인간'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들이 잔뜩 늙은 노인들을 줄줄이 끌었다.
“보소! 이 늙은이들이 마왕 나으리한테 창을 겨눈 촌장들이외다. 마왕 나으리 집안의 재산에 관심이 다대하여 모험자 나부랭이한테 홀라당 넘어갔지. 우리 마을의 소중한 밀을 빼앗아간 천하의 후레 자식들이기도 하고 말이오! 개새끼들!”
파르시가 촌장들의 등을 빵 찼다. 촌장들은 노인답지 않게 몸이 강건했지만 팔이 묶인 상태로 등뒤가 차이자 맥없이 넘어졌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목청이 찢어지라 소리질렀다.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용서해주십소서!”
“마귀, 마귀가 우리 눈에 끼었나이다! 감히 위대한 존재의――!”
말을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파르시 일행이 기다렸다는 듯 도끼나 창 따위로 촌장들의 등허리를 찔렀다. 날카로운 창날이 노인들의 가슴팍으로 튀어나왔다. 노인들은 피를 쏟아내며 머리를 땅 위 먼지 속으로 떨구었다. 그리하여 영원한 밤이 그들의 눈을 덮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진절머리 쳤다.
“어리석다. 어찌 공생의 길을 버리고 멸망을 택했는가.”
“심려치 마시옵소서. 주군의 자비심을 모욕한 이들에게 응분의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겠나이다.”
라우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한치 망설임 없이 참혹한 미래를 예언했다.
“모든 것은 주군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들은 최후에서야 이때까지 일어난 모든 행동의 의미를 파악할 것이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달을 것이옵니다.”
나는 가을의 산자락을 바라보듯이 피바다가 된 마을을 지켜보았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비명소리가 사라지는 데엔 아직 여분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