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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53화 (53/510)

00053 E급 모험대  =========================================================================

“무슨 개놈이 지랄발정하는 소리야?”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자경단원들이 절대로…….”

“썅, 누구 귀가 병신인 줄 아나.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좋다고 따라온 놈들이 왜 가자니까 안 간다 지랄이냐는 말이다.”

사내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경단원들이 출정하길 거부한다는 것만 알았지 어째서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대장한테 알려줘야겠다고 달려온 것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리프는 사내의 낯빛에서 알아냈다. 요컨대 그는 자기 동료들이 어느 정도로 무능하고 무식한지 또 한번 확인해야만 했다. 리프가 한숨을 참고 말했다.

“너 진짜……젠장, 왜 안 간다는 건지 알아와.”

“알겠습니다.”

사내가 풀죽은 모습으로 뒤돌아섰다.

“아니, 아니다. 그냥 자경단원 대빵 새끼한테 직접 오라 그래.”

리프가 서둘러서 말을 정정했다. 사내의 태도를 보자니 이유도 제대로 알아오지 못할 듯싶었다. 대장이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전혀 모른 채,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본부에서 나갔다.

‘빌어먹을. 이 모험대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

리프가 신경질적으로 옆머리를 긁었다.

사내가 나가고 잠시 후, 남자 다섯 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각 마을의 자경단을 대표했다. 그중 두 명은 고블린 군단에 고향을 잃었다. 동향 친구와 부모 그리고 처자식까지 죽어버리자 그들은 가슴이 새까만 분노로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지상에서 고블린을 멸종시키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리프가 영리하게도 그들의 심정을 파악했다.

‘불난 집에 기름기를 퍼부을 필요는 없지.’

그는 즉각 자기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제일 처량하고 처참한 표정을 만들었다. 원래 천직이 나무꾼인 리프는 생김새가 투박했다. 투박한 자의 처량한 얼굴만큼이나 진솔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리프가 형님, 하고 운을 뗐다. 리프와 자경단 대장끼리는 형아우 하는 사이였다.

“소식은 들었수다……뭐라 드릴 말씀이 없구랴.”

“드릴 말씀이 없다고? 지금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나?”

마을을 잃어버린 남자가 목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듣기로 아우는 저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던데!”

“형님, 진정하십쇼. 뭐 때문에 화나셨는가 몰라도 분명…….”

“뭐 때문에 화났는지 몰라? 뭐 때문에 화났는지 모른다고!”

남자들이 리프에게 삿대질했다.

“네 자식이 말했어, 던전을 털면 크게 한몫 챙길 거라고! 팔자를 고칠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뭐야! 네 자식의 꾐에 넘어가니까 마왕이 보복했잖아. 팔자를 고치기는커녕 완전히 망가졌어! 완전히!……그분을 화내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자네가 우리를 끌어들이지만 않았으면 이딴 일도 없었을 걸세. 모두 자네 잘못이야!”

리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뭔.’

아니, 마왕에 대적하면서도 자기네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말인가. 심지어 자신들은 군량미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마을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 마을들이 마왕에게 빌붙어서 무언가 계략을 세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정녕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요?”

리프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우가 사죄라도 해드릴까? 그러면 분이 풀리겠소?”

“뭐?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버르장머리는 개 시버럴 후장에 쑤셔넣을 버르장머리요. 나도 마왕 자식한테 동향 친구 절반을 잃었수다.”

리프가 으르렁거렸다. 웬만하면 존대해주려는 마음이 사라졌다.

“마왕을 털어먹으려는데 그럼 저쪽에서 아이고 모험자님 아이고 인간님 얼른 제가 모은 금화를 챙겨드시고 가십시요 할 줄 알았소. 하이고 허파에 쉰바람 들어가고 앉았네, 뭔가를 뺏으려면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도 안 배웠어?”

“하, 개만도 못한 자식! 이제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본성은 니미 네 새끼들이 노출하고 지랄입니다.”

리프가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들더니 단번에 바닥에 던졌다. 도끼날이 와직, 하고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자들이 움찔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프가 한 발짝 걸어나가 자경단 일행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돈 좀 만질 수 있다는 말에 좋아라 하면서 따라온 건 언제고 이제 쫄리나 봅니다, 형님들? 응? 사내 새끼들이 한번 입에 담으면 뒈질 때 뒈져도 뒷말은 없어야지 뭐하는 거요? 하, 그쪽만 피해자인 척하니 시발 역겨워서 내 혓바닥이 형님 소리를 못할 지경이구만.”

“네놈이 뭐라 씨부려도 던전에는 못 간다.”

한 남자가 리프의 시선을 받아내며 말했다.

“다음에는 어떤 마을이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 설령 부자가 되더라도 고향이 없고 가족이 없는데 소용이 무에야. 갈려면 네놈이나 가라. 우리는 고향을 지킬 것이야.”

화제를 바꾸어야 한다.

리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흐름이 좋지 않았다. 자경단이 자기 마을을 우선시 하는 것은 당연했다. 리프 자신도 만약 고향이 위험에 처한다면 만사 제치고 고향으로 달려갈 것이었다. 이방인만큼 서러운 작자가 어디 있는가. 가족과 동료, 집을 잃은 채 정처없이 떠도는 것은 모든 남성이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리프는 희생양을, 저들이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았다.

“형님들, 누가 보면 아우가 죽을 죄라도 지은 줄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보십쇼. 여기 계신 형님들 마을을 조진 게 누구입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그야 마왕 아니냐. 네놈이 그분을 진노하게 만들었어.”

그분이라니! 리프는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분이라니! 어째서인지 이 작자들은 마왕을 증오하면서도 묘하게 존중했다. 살기 위해 울고불면서 달라붙고, 철면피가 되어 인간을 속이고, 비겁하게도 등 뒤에 비수를 날리는 그딴 개자식을 말이다!

리프는 바닥에 꽂힌 손도끼를 잡아들어 남자의 두개골에 박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으로 내버려두고, 그가 냉정하게 말했다.

“거 참 신기하구랴. 궁금하지도 않소? 마왕이 어떻게 자경단원 형님들의 마을만 싹 골라서 조졌는지?”

“……무슨 소리냐.”

“형님들 보고 일자무식이라는 거요. 하, 머리통이 있으면 굴려보쇼. 언 개새끼가 형님들이 나한테 붙었다는 사실을 꼰지르지 않았다면 마왕놈이 어떻게 형님들의 마을만 딱딱 공격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남자들이 충격을 받아 눈이 커졌다.

“그, 그러면?”

“배신자가 있소! 우리 인간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거요! 보나마나 뻔하지. 우리한테 군량미를 바친 마을 중에 어떤 한곳이 마왕한테 빌붙은 거지.”

리프가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아니, 혹시 모르오? 한곳이 아니라 싸그리 배신자 짓거리를 했는지.”

“지옥불에 타죽을 개자식들!”

자경단 대장들이 분노했다.

“그놈들이 그럴 줄 알았어!”

“지들만 살겠다고 똑같은 인간을 몬스터한테 팔아넘겼어!”

리프가 적당히 남자들에게 맞장구쳤다. 그들 사이에 어느새 공감대, 즉 마왕이나 다른 자가 아니라――그 다른 자 중에는 물론 리프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적군에게 정보를 팔아넘긴 동족이야말로 천하의 원수라는 견해가 굳어졌다. 리프가 보기에 한몫 벌어보겠다고 다른 마을을 핍박하여 식량을 뜯어낸 자경단도 배신자이긴 마찬가지였으나, 굳이 그런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불이익을 자초하지 않았다.

“형님들. 사나이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리프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찌됐든 그 배신자 새끼들의 마을에는 병력이 없습니다. 우리랑 맞붙어서 백이면 백 지는 것은 저쪽이요. 놈들은 마왕 새끼를 믿고 그렇게 까부는 것인데, 마왕만 일단 처리해버리면……예? 그놈들 죽여버리는 거 닭모가지 비트는 일보다 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우. 고블린이 물경 수백이라고 하네.”

남자는 분노와 슬픔, 무엇보다 걱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무장해 있다고 해도 고블린 수백을 무찌를 수는 없어.”

“허, 왜 피곤하게시리 고블린 새끼들이랑 싸웁니까?”

“뭐?”

리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쳤다.

“썅. 아까 전부터 생각 좀 해보라고 말하지 않았수까. 보십쇼. 고블린 그 새끼들이 어디 원래부터 수백 마리씩 뭉쳐다닙디까?”

“아, 우리도 그게 이상했어.”

남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거 고블린 놈들은 지네들 부족끼리만 다녀서 아무리 많아봐야 오십이 안 되는데 어떻게 수백 마리가…….”

“그게 다 마왕 때문입니다. 마왕이 몬스터들을 규합해서 이끄는 게지. 달리 말해 마왕만 없으면 고블린 놈들은 언제 모였냐는 듯 뿔뿔이 흩어지든가 예전처럼 지들끼리 싸우고 자빠질 겁니다.”

즉, 하고 리프가 손가락을 세웠다.

“마왕은 부대를 통솔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고블린들이랑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지. 수백 마리나 되는 놈들을 이끌고 댕기는데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고. 바로 그걸 노려서 우리는 빈집을 털러 던전에 쳐들어가야 합니다.”

“잠깐만. 문제의 초점을 자꾸 흐트러트리지 말게.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 마을이 공격이라도 당하면 어쩔 거냐는 말일세.”

“하, 진짜…….”

리프가 입가를 험악하게 비틀었다.

“형님들, 대가리는 뒀다 어디 씁니까? 형님들 마을사람들 전부 이동시키쇼. 한 마을에 몰아넣으라 이거요. 그러면 적어도 수백 명은 한 마을에 모일 거 아니겠수? 그 정도면 고블린 수백 마리쯤이야 며칠이고 막아낼 수 있을 테고, 우리는 그 사이 던전을 턴 다음에 다시 마을에 합류하면 되오.”

리프가 마룻바닥에서 손도끼를 빼냈다. 그리고 신묘한 손놀림으로 도끼를 연필이라도 굴리듯이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놀렸다.

“마을에서 고블린 부대랑 치고박고 싸우면, 응? 고블린 부대가 아주 지치겠지. 안 그렇겠소? 놈들이 마을에 신경이 팔렸을 때 우리가 그놈들의 헐거워진 후장을 뒤에서 박아주는 겁니다. 앞뒤로 공격을 받는 데 지깟 것들이 뭐라고 버티겠습니까요?”

“오오!”

남자들이 손뼉을 쳤다. 그들이 듣기에 리프의 주장이 사리에 맞았다. 리프는 자기가 설득을 거진 성공시켰다 판단하고 계속 말해나갔다. 여기에 그럴듯한 용어까지 섞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휘어잡을 생각이었다.

“이게 소위 망치와 모루라 불리는 작전입니다. 마을이 모루가 되고 우리 모험대와 자경단이 망치가 되서 고블린 애새끼들을 쑤셔받는 거지. 어때 형님들도 들어보지 않으셨소?”

“확실히 들어봤지! 그래, 괜찮아. 정말 괜찮구만.”

들어보긴 개뿔이 잘 들어봤겠다, 리프가 속으로 비웃었다.

“우리 작전에서 중요한 건 속전속결이요. 다들 얼른 연장을 챙기십쇼. 예? 한 시간 뒤에 다들 광장에 모여서 출발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요?”

남자들이 저마다 좋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던전의 재산을 가로채고 나중에 배신자의 마을에 복수하리라 다짐하면서 씩씩하게 걸어나갔다. 리프는 그들을 문가까지 배웅했다.

리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여자 마법사가 그 난리에도 상관하지 않고 잠자코 책을 읽고 있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전부 미쳤어. 리프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왠지 모르게 마법이 싫었고, 마왕 단탈리안이 흑마법이랍시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더더욱 싫어했다.

그가 차분히 전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무문이 열리고 예의 간부인 사내가 들어왔다.

“대, 대장님.”

“시부럴 개 같은 새끼.”

리프는 이제 사내만 보면 욕이 나왔다. 또 무슨 소식을 전해주려고 저리 말을 더듬는가 말이다. 이번에는 제발 자신을 화나게 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심정으로 리프가 물었다.

“뭐야? 응? 또 뭐야?”

“세 번째입니다. 또 마을 하나가 당했어요…….”

“제기랄.”

안 좋은 소식이었다.

망치와 모루 작전이 성공하려면 모루 역할을 해주는 마을사람들 쪽수가 최대한 많아야 했다.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마을 중 하나가 전멸했다는 것은 그만큼 작전이 불리해진다는 뜻이었다.

리프가 한숨을 쉬었다.

“으휴. 어디 마을이냐?”

사내가 마을이름을 읊어주자 리프의 표정은 기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마을은 자경단이 없는 마을――마왕한테 들러붙었다고 추정되는, 배신자의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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