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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52화 (52/510)

00052 E급 모험대  =========================================================================

파르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더 뭐라 말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내리지 않는 걸 보아 본인도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었다.

던전에 쳐들어온 모험대도 그랬다. 잔인함과 순수함을 동시에 가졌다. 망설임 없이 화살을 날려대는가 하면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열기도 했다. 언젠가 중세의 농민이란 이미지와 다르게 무법자처럼 언제든 필요에 따라 도적으로 변모한다고 들은 적 있었다. 그같은 양면성이 이 시대 인간의 특징이겠지.

─ 키르르륵!

마을은 금세 거대한 식당으로 전락했다. 쉰 구에 이르는 인육은 고블린 전원을 배불리 하고도 한참 남았다.

“대승이옵니다. 이로써 고블린 부락이 전투에 참여하는 정도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아아. 허나 저번에 논의한 대로 위장작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예, 골렘 부대에 명령하여 시체를 운반하겠습니다.”

우리는 마을광장에 서서 한가로이 앞으로 할 일을 얘기했다. 딱히 새로운 화제거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전투에서 이긴 장병들에게 약간의 연회를 즐기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근방 산맥에는 열네 채 남짓의 고블린 부락이 분포했다. 부족을 전부 합치면 너끈히 오백 마리를 헤아렸다. 그들 전부가 전투에 나설 수는 없겠으나, 오늘 전투에 동원된 백 마리보다야 훨씬 더 많은 숫자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겨우 백 마리밖에 끌고오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고블린 부족은 자기네가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했다.

당연했다. 고블린들은 산적같이 인간마을을 기습하여 약탈한 적은 있었어도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동수의 고블린과 산사람이 맞붙을 경우 유리한 쪽은 후자였다. 특히 목책 등의 방어시설을 갖춘 인간마을을 공격하기란 고블린들에게 무척 어려웠다.

인간을 토벌하자는 내 제안에 고블린 부락은 다소 시큰둥했다. 골렘 부대를 앞세워서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요지부동했다. 고블린들에게 인간은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일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가끔씩 약탈해보는 대상이었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아니 몬스터이기에 더더욱 과거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나마 내가 몬스터한테 천성적으로 호감을 주는 마왕이라서 백 마리라도 끌어왔지, 아니면 얄짤도 없었을 거다.

라우라가 지도를 꺼내들었다.

“곧바로 다음 마을로 쳐들어가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완성본은 아니었으나 파르시 등 우리측에 우호적인 인간한테 도움받아서 대충이나마 만들어낸 지도였다. 그곳에는 인간마을과 고블린 부락의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 마왕군은 시계방향 순서대로 마을들을 초토화시킬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험대가 알아차리는 것은 최소 두 번째 마을이 점령된 이후일 터. 전쟁에서 기습이 기본적인 묘리라 해도 우리에겐 약간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라우라가 지도상의 고블린 마을을 하나씩 짚었다.

“고로 지금 당장 고블린 군단을 해산합니다.”

“에, 뭐요?”

파르시가 어리둥절해 했다.

“기껏 며칠 내내 고생해서 백 마리 모았는데 해산하라니 뭔 소리외까!”

아무리 지도가 있다 해도 미완성본일뿐더러 라우라나 내가 산길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파르시가 안내원이 되어 산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그 고생을 한 파르시로서는 이제 와서 다시 부대를 해산하라니 기가 찬 것이었다.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마왕 전하께서 발품을 팔아가시며 고블린들을 모아야 했던 까닭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다릅니다. 오늘 공방전에서 고블린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녀 말대로 마을에는 인간의 시체가 즐비할 따름이었다. 목책 근처에나 고블린 시체가 두어 개 널부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피해가 아예 없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오로지 이득만 얻었습니다. 수십 구의 인간시체는 고블린들로서는 감히 기대해본 적도 없는 수확입니다. 묻겠습니다.”

라우라가 파르시를 봤다.

“여기의 고블린들에게 다음 전투까지 어디에서 모이라고 지시한 다음, 그들을 해산시킨다고 합시다. 다음 전투에는 얼마나 많은 고블린을 동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 어……그렇게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겠수?”

파르시가 좀체 라우라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라우라는 귀족영애 아니랄까봐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해서 아무래도 산골청년이 상대하기에 버거웠다. 으이구, 마왕인 나한테는 할 말 다하던 인간이 정작 미인한테는 힘을 못 쓰네.

“오늘 크게 한탕 했으니 관두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소.”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이 있다면 언제고 달려들기 마련입니다. 고블린들은 자기 부족에 가서 오늘 전투가 얼마나 쉬웠고, 얼마나 많은 시체를 얻었는지 자랑하겠지요. 그걸 들은 나머지 고블린들이 어떻게 나오리라 생각합니까?”

라우라는 더 이상 파르시와 대화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감히 장담하옵니다. 주군께서 다음 전투에서 거느리실 부대는 족히 삼백에 이를 것이나이다.”

나는 그녀의 진언을 받아들여 부대를 모두 해산시켰다. 그 와중에도 파르시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틀 뒤.

라우라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 마을로 가는 길목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수백 마리의 고블린이 득실득실거리고 있었다. 산골짜기가 녹색 물결로 넘쳤다.

파르시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라우라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군대를 지휘했고, 우리는 두 번째 마을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간단하게 점령했다.

*  *  *

“개 같은 새끼가!”

리프가 나무탁자를 뒤엎었다. 탁자가 요란하게 뒹굴었다.

모험대 간부가 머무르는 주택. 원래 이곳에 살던 마을주민에게 협박하다시피 얻어낸 곳이었지만, 집안의 가구를 마음대로 집어던지는 데 리프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생존자에 의해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지자, 리프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했다.

“니미, 개육시랄 시버럴 놈! 감히 제깟것이, 개새끼가!”

동료 간부들이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불과 몇 달만에 별 볼 일 없는 시골마을 모험자 떨거지를 수준급 모험대로 키워내고 여기에 타 지역의 자경단까지 포섭시킨 리프는 절대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 지금처럼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대장을 말려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하리란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씨발, 연장 챙겨! 당장 던전으로 쳐들어간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간부 중 한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마을이 두 개나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자경단원이랑 애들이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기를 추스르는 편이…….”

리프가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먹으로 사내의 배를 때렸다. 사내가 신음을 참으면서 허리를 굽혔다. 다른 간부들이 더더욱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등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뭘 모르겠다는 표정인 간부들을 향해 리프가 소리쳤다.

“병신 머저리 새끼야! 지금 아니면 언제 쳐들어가! 마왕 새끼가 마을을 공격하잖아! 그럼 씨바알, 지금 던전은 비었냐 안 비었냐!”

“아!”

“대가리 비우고 사는 새끼들……! 쳐나가서 애들한테 말해.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

간부들이 허겁지겁 집에서 나갔다. 딱 한 명, 우락부락한 남정네로 이루어진 리프의 모험대에 어울리지 않게 여인이 집안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리프가 그녀를 신경쓰지 않고 생각에 들어갔다. 불과 수십 초 전에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쉽게 화내는 겉모습과 달리 생각이 깊었다. 방금도 마을이 떼로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질려버린 간부들을 정신차리게 하려고 일부러 분노하고 난리쳤다. 동료들은 실력에 있어서 꽤나 믿음직스러웠지만 머리 쓰는 일에 관해서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럴 때 애꾸눈 그 자식이 있었다면.’

지난 번 단탈리안의 마왕성에서 잃은 동료가 생각났다. 그와 리프는 절호의 콤비였다. 리프가 분위기를 잡으면 애꾸눈이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그처럼 역할분담이 딱딱 이루어져야 머리 나쁜 모험자들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지금은 리프가 모든 역할을 떠맡았고, 그로 인해 리프의 피곤함은 날로 더해갔다. 이것이 전부 그 마왕 새끼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열이 뻗었다.

마을 두 개가 전멸된 것은 뼈아팠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한테 피해가 생긴 건 아니다.’

그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리프에게는 믿을 구석이 세 개나 되었다.

첫 번째, 마을이 사라졌다지만 그렇다고 모험대에 인명피해가 나진 않았다.

자경단원은 모두 모험대와 같은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리프로서는 솔직히 자경단원이라는 전력만 무사하다면 마을 따위 몇 개가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자기 마을도 아닌데 신경쓸 것이 뭐 있겠는가.

두 번째, 마법사를 고용했다.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인이 바로 마법사였다. 그것도 1서클, 2서클 같은 초짜가 아니라 자그마치 3서클! 제대로 된 전투마법사로서 최하급골렘 정도는 우습게 상대할 수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마왕군은 골렘, 고블린, 요정, 총 세 종류의 몬스터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모험자들이 골렘과 고블린을 방어해내는 사이 마법사가 골렘들을 처치해주면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풀릴 것이다.

리프처럼 급이 낮은 모험자가 마법사를 고용한 데에는 행운이 함께했다. 하급 마법사들은 자신의 공방을 갖지 못하고 마탑에서 배우고 일하는데, 서클이 올라갈수록 마법을 배우는 데 드는 교육비가 기하급수로 올랐다. 하급 마법사들은 한철 장사를 노리는 식으로 모험대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리프가 판단하기로 여인도 그런 마법사에 속했다.

‘저런 얼탱이가 걸릴 줄은 나도 몰랐지. 크흐.’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할까. 때때로 마법사 중에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 사회가 어디까지 악독해질 수 있는지 무지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마법사를 모험자들은 호구라 불렀다.

여인은 호구의 대표주자였다. 모험자 길드에 들어와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딱 '저는 호구입니다 어서 낚아가세요'라고 광고하는 꼬락서니여서, 리프는 주저없이 여인에게 접근했다. 단탈리안 마왕성은 재화는 넘치는데 함정도 없다느니, 몬스터라곤 최하급밖에 없다느니, 온갖 사탕발림으로 불공평 서류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데까지 불과 오 분이 걸렸다.

여인에게는 총 수익의 5푼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3서클 마법사의 고용비로는 거저나 다름없었지만 여인은 좋다고 따라왔다. 리프는 속으로 그녀를 백 번은 비웃었다. 결국 세상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을 속이는 자였다.

‘그 마왕 새끼처럼 말이지.’

까득, 하고 리프가 이빨을 갈았다. 그놈의 연기에 홀라당 속아넘은 것을 생각하니 아직도 속이 쓰렸다. 돌이켜보건대 자기가 얼마나 멍청했던가! 상식적으로, 마왕이 발 벗고 나서서 모험대를 위해 행동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리프를 비롯한 잘센 모험대는 마왕을 철썩처럼 믿었다. 말 그대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육시랄 놈. 창자를 도려내서 회쳐주마.’

그쯤에서 리프가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지금 느끼는 분노를 곧 갚아줄 거라 확신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대, 대장님.”

간부가 돌아왔다. 아까 전에 리프에게 한 대 얻어맞은 사내였다. 그는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엉? 왜 벌써 돌아와? 준비 다 끝냈냐?”

“그게, 저어……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썅, 무슨 문제?”

리프가 당장이라도 씹어먹을 기세로 되물었다. 사내는 왜 자신이 이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세상을 원망하면서 대답했다.

“그것이……자경단원들이…….”

“자경단원들이 뭐 이 새끼야!”

“자, 자경단원들이 절대로 던전에 가지 않겠다 그럽니다!”

리프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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