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50화 (50/510)

00050 E급 모험대  =========================================================================

그녀가 꺼내든 카드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우리 마왕성 근방에 여러 채의 고블린 부락이 있다. 그 고블린 부락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고블린 부락을 원군으로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다소 놀라서 되물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놀랐다. 대화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라우라는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한 지점을 찔렀다.

확실히 근처에 고블린 부락들이 있었다. 니블헤임으로 휴가를 가기 전, 나는 자리를 비운 사이 모험대가 침입하는 것을 걱정하여 인간 마을을 회유했다. 회유를 위한 떡밥으로 내건 것이 ‘더 이상 고블린들이 마을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우라. 길들여지지 않은 몬스터를 군대로 활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마왕인 저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휘하의 몬스터처럼 그들이 절 위해 목숨을 바칠지 의문이군요.”

“자경단원이라고 해서 모험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닐 터.”

“흐음.”

자경단원이 모험대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무언가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네 이익을 쫓고 있다. 꼭 그처럼 고블린에게 이익을 안겨준다면 고블린 역시 전투에 참여할 것이다.――라우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군은 고블린 부락들에 인간 사냥을 금지시켰다. 인간의 마을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허면 간단한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이제 적군으로 돌아선 인간 마을을 얼마든지 사냥해도 좋다고 말이다.”

“사냥과 전쟁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냥을 허락한다고 해서 고블린들한테 전쟁에 나서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라우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제가 잘못되었다.”

“전제라고요?”

내가 흥미롭게 되물었다.

“무슨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어째서 몬스터들에게 전쟁을 강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주군. 이것은 소녀의 간언이다. 주군은 몬스터한테 지나치게 상냥하다. 방금도 주군은 부지불식간에 몬스터를 싸움으로 내몬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착각인가.”

라우라가 내 어깨에 앉은 요정 한 마리를 척 가리켰다.

“잘못 생각해선 안 된다. 몬스터는 주군의 애완동물이 아니다! 몬스터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흉폭한 맹수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지 전쟁터에 뛰어들 전사이다.”

그녀의 일갈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불현듯 예전 노예경매소에서 라피스가 건넨 조언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아인종을 제 마음대로 부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분노했다. 그때 라피스가 말했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저잣거리 아낙네끼리 나누는 이해도, 법정의 재판관이 내리는 판정도,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왕은 이해하되 판정해야 합니다.”

그 말을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몬스터를 무조건 나의 편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던가?

“장담해도 좋다. 적절한 이익을 제시한다면 고블린들은 설령 우리가 하지 말라 자제시켜도 알아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주군, 부디 냉정해지길 바란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전쟁이라는 이름의 장기판 위에서는 한 개의 말에 불과하다.”

나는 라우라의 말이 백번 옳음을 인정했다.

마음속 어느 한 구석엔가 몬스터를 무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을들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칠십 명의 모험대가 자멸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몬스터를 이용할 계획 따윈 고려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다기보다 기뻤다.

‘군주가 간과해버린 부분을 보충하는 것 또한 책사의 역할.’

어차피 내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해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애시당초 라우라를 영입하지도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보다 불안함이 더 많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 불안감을 지금 라우라가 채워주고 있었다.

“주군.”

라우라의 초록색 눈동자가 똑바로 향해왔다.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고블린 부락을 이용한다 가정해보지요. 어떤 이득이 그들을 움직이겠습니까?”

“그 역시 간단하다.”

라우라가 일 초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인간이든 몬스터이든 남의 것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  *  *

질서없이 울창하게 자라난 숲. 젊은 촌장인 파르시가 지팡이로 수풀을 훅훅 걷어내며 나아갔다. 나무의 잔가지나 날카로운 풀 끄트머리에 살갗이 스칠 때마다 파르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우, 엠병할. 이놈의 벌레 새끼들!”

그가 내쪽을 돌아보았다. 앞머리가 딱풀 묻은 것처럼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으리! 제발 뭣 좀 물어보겠소.”

“질문을 허한다.”

“왜 하필 나요?”

파르시가 뚫어놓은 길을 편하게 뒤따라가면서 내가 말했다.

“그대가 제일 젊고 힘이 쎄니까. 노인장을 길잡이로 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 그럼 마을에서 아무 사냥꾼이나 골라 잡으면 될 것을…….”

“그리고 본인은 그대가 제법 마음에 든다.”

“엑.”

파르시가 질색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따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애꿎게 지팡이만 휘둘러댔다. 남한테는 직설적으로 하고 싶은 말 전부 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한테 솔직한 말 한 마디가 들어오면 부끄러워 하는 것이었다.

“귀엽군.”

“귀, 귀엽다고? 귀엽다고 했소, 방금?”

파르시가 대경실색했다. 아예 그 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산골청년답게 행동이 유치했다. 그게 또 나를 웃게 만들었다. 파르시처럼 과감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을 볼 보면 흐뭇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 그대 자신은 모르겠으나 꽤나 귀엽노라.”

“시발! 내 어머니도 평생토록 나보고 귀엽다 한 적이 없수다! 눈이 삐었소? 나으리가 눈이 안 삐었다고 이제 와서 말해도 난 나으리가 눈이 삐었다고 굳게 믿겠소!”

헉, 하고 파르시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혹시……나으리, 그, 그쪽 취향이신 거요?”

“그쪽 취향이라니?”

“거 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그런 사람도 있다지 않소.”

으이구.

내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파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본인도 머쓱했는지 뒤통수를 긁었다.

“허, 험. 아니라서 다행이구랴. 혹시나 싶었수다.”

“설령 본인이 남색가일지라도 그대의 뒷구멍만큼은 노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

“뒷구멍? 뒷구멍은 또 무슨 소리요?”

아무래도 이 산골청년, 남색이 있다는 사실만 알지 어떻게 남색이 이루어지는지는 일자무식인 듯했다.

내가 씩 웃었다.

“자고로 남자 두 명이서 진실하게, 정말로 진실하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나는 남이 모르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지식인적 사명과 산골청년에 대한 배려심으로 남색이 이뤄지는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대학교에서 성(性)에 대한 교양과목을 열심히 들은 적이 있었기에 나의 설명은 구체적이고도 섬세했다. 정말이지, 여기엔 사심이라곤 요만큼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에겐 순전히 지식인적인 사명과 배려심밖에 없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파르시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 그럴수가!”

그가 거의 졸도할 기세로 소리쳤다. 마치 여자에겐 꼬추가 없다는 사실을 난생 처음 깨달은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와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러니까, 거기를 그것으로 뚫는다, 이 말이요외까!?”

“정확하게 순화해서 말하자면 항문을…….”

“그만! 그마아안!”

파르시가 비명을 지르면서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요 녀석, 숫제 총각이었다. 말투는 건방진 주제에 아직 여자 맛도 보질 못했구만. 더더욱 귀엽게 보였다.

“제발 그렇게 저속한 말은 쓰지 말아주시오!”

“본인도 잘 모르지만 전해 듣는 이야기로 쾌감이 매우 크다 하더군.”

“믿고 싶지 않소! 나의 상식이, 상식이!”

“상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쿨하게 말했다.

“청년이여,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라.”

“그런 세계는 싫소!”

푸른 숲속에 순박한 청년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야기하다 알게 됐는데 이 털복숭이의 거한은 고작 열여섯 살에 지나지 않았다. 라우라와 동갑이었다. 어마어마한 노안이었다.

숲에는 녹음이 무성했다. 며칠 전 비가 내려서 녹색이 무섭도록 피어났다. 이끼가 끼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나뭇잎으로 제 몸을 가리지 않은 나무가 없었다. 곧 끝날 여름을 애써 붙잡아 두려는 것인지 숲은 더더욱 집요하게 녹색을 고집했다. 이 세계에 온 것이 봄이었는데 벌써 늦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 케르륵, 케르.

─ 케르르륵.

우리 뒤쪽으로 무수한 발걸음이 뒤따라왔다.

“내 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속셈일까. 파르시가 우리 뒤편을 슬쩍 쳐다보았다.

“내 평생 고블린이랑 편 먹을 줄은 몰랐소.”

백 마리 가량의 고블린.

대부대가 두 줄에 맞추어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손도끼나 돌창같이 꽤 원시적인 무기를 꼬나쥐었다. 특이한 점은 투석병이 많다는 것이었다. 돌팔매질에 쓰는 투석구(投石具)를 털레털레 흔들면서 걸었는데, 행군하는 도중에도 간간이 토끼나 매를 쏴잡았다. 참고로 내가 든 무기는 쇠뇌였다. 여기서 가장 고급스러운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아까 전에 농담삼아,

“저걸로 어떻게 싸울 수나 있으련지 모르겠다.”

하고 말하자 파르시가 인상을 쓰면서 반박했다.

“무슨 소리요? 난 다른 고블린은 안 무서워도 줄팔매하는 놈들은 사양하고 싶소만.”

“돌멩이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다고 그러는가?”

“이거 나으리, 의외로 돌맛을 모르는구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돌이요외다. 저거 한방 맞으면 제아무리 억센 놈이라도 황천길로 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오.”

나는 그런가? 싶었다. 솔직히 돌팔매질이 그렇게 위력적일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파르시가 하도 당당하게 말하는 터라 그냥 넘어갔다. 파르시의 호언장담이 맞는다면 전투에 이익이 되면 됐지 해가 될 게 없으므로 부디 고블린 투석병들이 분전해주기를 바랐다.

아무튼 무장 상태를 떠나서 고블린 백여 마리의 행군은 장관이었다.

“몬스터와 한편이라니 기분이 묘하오.”

“무서운가?”

“무섭다기보다 이상하구랴.”

파르시가 무언가 못 마땅한 듯 입가를 비틀었다.

“인간과 몬스터가 같은 편이 되어 싸운다니 누가 믿겠소? 그딴 망상 집어치우라고 타박이나 듣고 말겠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소.”

망상이라.

내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진지하게 망상을 논하는 자가 세상에 두 종류 있다. 하나는 혁명가이고, 다른 하나는 바보이다. 지금껏 나는 두 가지 부류를 모두 만났다. 잭이 후자에 해당했다. 그는 죽었다. 전자에 속하는 인물은――.

“누가 오는구랴.”

파르시가 말했다. 내 뒤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돌아보니, 라우라가 당나귀를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고블린 부대를 지나쳐서 금방 내게 도착했다.

라우라가 내 앞에서 우아하게 하마했다

“주군.”

문외한이 내가 봐도 그녀의 승마술은 경지에 이르른 것 같았다. 문제는 기술에 비해 탈 것이 지나치게 비루하다는 점이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당나귀는 너무했다.

라우라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내 발앞에 부복했다. 그녀 주변을 날아다니던 요정들이 내게로 옮겨왔다.

“지금까지 대열을 이탈한 고블린 부족은 전무하옵니다.”

라우라가 경어를 썼다. 옆에 파르시가 있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나 또한 공사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터라, 그녀의 존댓말이 약간 어색했지만 티내지 않았다.

“수고했다. 파르시, 마을까지 앞으로 얼마 남았는가?”

“어? 어? 아, 얼마 안 남았수다.”

라우라의 얼굴에 푹 빠져 있던 파르시가 허겁지겁 대답했다. 산골짜기에 살다가 공작영애의 미모를 보니까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그, 대충 한 식경만 더 걸으면 나올거요.”

“좋다. 라우라. 이것을 마지막 보고로 삼는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제부터는 짐의 곁에서 행군하라.”

“존명.”

나는 고블린 부대로 하여금 조용히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과연 파르시가 예고한 대로 잠시 후에 숲길이 끝났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무꾼인 듯했다. 그는 하늘이 떠나라 비명을 지르더니 날래 줄행랑을 쳐버렸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쇠뇌나 돌팔매로 저격할 수가 없었다.

“기습은 물 건너갔구랴. 괜찮겠수?”

“걱정없다.”

제깟 것들이 이제와서 준비한다고 뭘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대로 마을 앞까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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