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E급 모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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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단을 돌려보내고.
마왕방으로 걸어갔다. 요정 서너 마리의 웃음소리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동굴에 자그맣게 울렸다. 마왕방까지 가는 데에 대략 한 시간이 걸리는데 오고가면 두 시간이었다.
두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험대에 어떻게 대항할지 깊이 생각에 빠져서 그렇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곳의 느릿느릿한 시간관념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어느새 나는 마왕방에 들어섰다.
“…….”
구석의 바윗돌.
라우라가 가만히 책을 읽고 있었다. 바위에 붉은 담요를 깔고 앉았다.
집게손가락이 한장한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빨간 담요 한장과 책소리, 단 두 개만으로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그녀가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시간이 길게 기지개 폈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마주쳤다. 내가 거기 있을 줄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다는 듯, 마치 지금까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지금 자연스럽게 다음 화제를 꺼냈다는 듯,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인간들이 뭐라 말하던가?”
인간들이라니. 꼭 자기는 인간이 아니라는 어투 아닌가. 라우라는 그녀 나름대로 자기 종족과 일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수수께끼라도 내는 심정으로 말했다.
“자아. 우리 마왕군은 칠십 명의 적군에 어떻게 대항해야 좋을까요?”
“간단한 전투이다.”
라우라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주군에게는 몬스터를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능력이 좋은 몬스터일수록 소환에 고가의 재료가 필요하다지만, 우리 마왕군에 아직 재정적인 여유가 충분할 터. 적군을 압도할 만큼 많은 병력을 소환해내면 그만이다. 인해전술에는 똑같이 인해전술로――이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라우라는 우리측도 병력을 충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실로 가능한 전략이었다. 나에게 현재 약 일만사천 골드가 있는데, 최하급골렘을 서른 마리나 더 충원하고도 재산에 여분이 남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왕군은 무려 일흔 마리의 골렘 부대를 보유한다. 여기에 요정 부대까지 섞어주면 그야말로 웬만한 모험대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대부대가 된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답안은 그런 게 아니었다.
“라우라. 하책입니다.”
“…….”
라우라는 의문을 표시하거나 불만 어린 눈초리로 항의하거나 하지 않았다. 곧장 내 대답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왜 내가 그렇게 말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면모에서 그녀가 얼마나 이쪽을 신뢰하는지가 엿보였다. 내가 충분한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라우라는 전적으로 믿는 것이었다.
라우라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병법에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을 헤아리라 말한다. 나는 오로지 사람만을 고려했다. 단순하게 칠십 명이라는 적군의 숫자를 판단 재료로 삼아, 그렇다면 우리도 칠십 명에 이르는 부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전투가 벌어질 지형도, 전투에 얽힌 도리도 고려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사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는 사람, 자기가 뭘 잘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 방금 라우라가 한 대답은 제가 기대하는 합격선에 미치지 못했네요.”
이제 라우라는 긴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옆머리를 빙빙 꼬았다. 본격적으로 고민에 들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사실 그녀가 하책이나 다름없는 계책을 내놓은 것은 자연스러웠다. 여태까지 그녀는 소규모 단위의 전투밖에 겪지 못했다. 서른 마리쯤의 몬스터를 이끌었고, 스무 명쯤의 모험대를 격파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고려해야 했던 사항은 기껏해야 어느 순간에 골렘 부대를 앞장 세우고 어느 순간에 요정 부대로 하여금 일제사격을 가하느냐 정도였다.
열여섯 살 소녀가 전투에 익숙해졌다는 사실도 대단하겠으나…….
‘지금 수준으론 어림도 없지.’
나는 열여섯 살 소녀가 아니라 열여섯 살의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영입했다. 내 기대치에 걸맞게 그녀는 자기 재능을 입증해줘야 했다.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믿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더욱 내가 그녀를 믿는다. 세계에서 라우라를 제일 신뢰하는 인간이 나다. 그녀가 어떤 인재인지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제게 보여주십시오.
“알겠다.”
라우라가 숨을 들이켰다.
“먼저 소녀가 어떤 점에서 부족했는지 짚어내고,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모험대를 효과적으로 무찌를지 말하고 싶다.”
“기대하겠습니다.”
“우선 병법의 첫 번째 차원인 천(天)을 논하자면.”
라우라가 검지손가락을 펼쳐보였다.
“하늘이란 세상만사를 비유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병법에서는 전투를 전쟁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전쟁을 국가의 차원에서 바라보라고 권고하는 의미로 쓰인다. 즉 우리 마왕군은 칠십 명의 모험대라는, 현재 맞닥트린 난관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마주치게 될 일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많은 숫자의 골렘 부대를 고용하면 필히 당장의 난관은 극복할 수 있다. 허나.”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올바른 결론을 추적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미소에 자신감이 더했는지 라우라가 한층 쾌활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훗날에도 지금처럼 허약한 모험대만이 공격해올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모험자들 중에는 골렘 정도는 수십 마리도 너끈히 감당해내는 자가 많다. 만일 마법사라도 고용해서 침입해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라우라가 옳게 지적했다.
우리 마왕성의 상태는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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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단탈리안의 마왕성]
랭크: 동네 뒷산(F)
기술연구: 0개
마법연구: 0개
*특수스킬: 없음
*몬스터부대: 42마리
*재산: 13900골드
※던전에 어떠한 방어시설도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막 도둑이 된 인간이 당신의 던전을 산책길로 여깁니다. 언제라도 돌파 당할 수 있습니다. 기술과 마법을 연구하여 던전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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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급골렘은 두당 사백 골드. 서른 마리 더 고용하면 만이천 골드가 들어간다.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고레벨 모험대를 맞이하고, 그때 가면 최하급골렘은 모험자의 손풀이 연습용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고레벨 모험대를 대비해야 할 판국에 대부분의 자금을 최하급골렘한테 쏟아붓는다? 무척 어리석다.
“우리 마왕군은 미래를 위해 군비를 비축해야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군을 물리침이 마땅하다. 고로――.”
* * *
“소개하겠습니다. 단탈리안 전하.”
라피스가 말했다. 그녀 뒤편에 난쟁이 두 명이 서 있었다.
“이들은 마계에서 실력 높은 지도장인입니다.”
“존안을 뵙게 되어 영광이나이다.”
손을 내밀어 그들과 악수했다.
“환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난쟁이들은 쓸데없이 격식 차리기를 천성적으로 혐오했다. 그들은 근본상 예술가이자 장인이었고, 자기들이 진심으로 열의를 바치기에 적합한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마왕성 주변의 지도를 제작해달라.”
“황송하옵니다. 전하께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달리 있으리라고는 감히 짐작조차 하지 않았나이다.”
난쟁이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전하께서 필요하신 지도를 그릴 것입니다. 하온데 전하께서 확언해주셔야 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사옵니다.”
“질문을 허하노라.”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지도에 포함시키기를 원하시는지요?”
“우선 본인이 여러 장의 지도를 원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난쟁이와 마주봤다.
“본인은 모두 다섯 장의 지도를 원한다. 첫 번째, 대륙 전도(全圖)가 필요하다. 두 번째, 튜튼 왕국 전도가 필요하다. 세 번째, 튜튼 왕국 중에서도 본인의 마왕성이 위치한 지방의 지도가 필요하다. 먼저 이 세 가지 지도를 구할 수 있겠는고?”
“물론입니다.”
난쟁이가 약간 놀라워했다.
“세 가지 모두 기존에 제작된 물건이 여럿 있사옵니다.”
“본인은 최고급 수준만을 원한다.”
“명심하겠나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무엇이옵니까?”
“네 번째로 마왕성 인근의 마을과 성을 포함하여 지도를 그리라. 이 지도에는 땅의 높낮이, 넓은 길과 좁은 길, 지형의 특징, 마을의 규모가 모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난쟁이가 눈빛이 달라졌다.
“……아주 본격적인 지도가 되리라 사료되옵니다.”
“다섯 번째로 마왕성 내부의 지도를 제작하라.”
“여부가 있겠나이까.”
난쟁이가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땅의 높낮이까지 요구하시매 지도에 대한 전하의 안목이 하늘과 같음을 헤아렸습니다. 과분하오나 저희 역시 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문가, 요구하신 바에 따르겠나이다.”
장인 난쟁이는 앞선 세 가지 종류의 지도를 곧장 매각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마왕성 인근의 지도부터 먼저 제작해달라고 요구하자 비록 완성본은 아니어도 부분적인 지도를 빠른 시일 안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해왔다.
* * *
“――우리 마왕군은 마왕성에서 벗어나 적군을 요격해야 한다. 본디 수비하는 측이 공격하는 측보다 세 배 유리한 법이나, 그것은 제대로 된 성채가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나 그러하다. 마왕성에는 이름과 달리 성책은커녕 번듯한 목책도 없다. 더군다가 통로가 지나치게 넓어 소수로 방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라우라가 차분하게 말해나갔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공격할 수 있는 적군이 훨씬 더 유리하다. 일단 마왕성에 들어오면 적군은 얼마든지 퇴각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그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적에게 그만한 자유를 허락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쪽에서 그들한테 불리한 전장을 강요해야 한다.”
라우라가 나를 직시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리군은 별동대를 운영한다. 모험대가 머무르는 마을들을 향해 오히려 우리가 공격해 들어간다. 이를 위하여 인근 마을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지도가 필요하다. 지도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도움이 될 터이니 투자해서 마련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잠시만요. 모험대가 마을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녀가 단언했다.
“왜입니까?”
“모험대의 과반수 이상이 현지 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모험대가 마을을 버린다는 것은 곧 마을 출신의 자경단원들을 모조리 배신함을 뜻한다. 전력이 단숨에 악화되는 것을 모험대는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칠십 명의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굳건하게 마을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 몸집을 불리느라 마을 자경단원을 흡수한 것이 도리어 그들의 기동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내가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지당한 의견이었다.
“마을을 포기하자니 병력이 대폭 줄어버리고, 마을을 수비하자니 마왕성에 처들어오지 못하니, 결국 모험대는 목적을 상실하고 자기 것을 지키기에 바빠지겠군요!”
“정확하게 말해 '자기' 것이 아니다. 마을 자경단의 것이다. 모험대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경단을 끌어들였다고 여겼겠으나――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한다. 자경단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모험대가 도와주는 격이 되어버리는 게다.”
상대방이 강점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약점으로 전환시켜라.
보병은 근접전에 강하다. 이에 궁병을 내세움으로써 보병의 강점을 '근접전밖에 하지 못한다'라는 약점으로 둔갑시킨다. 기사는 두꺼운 장갑을 갖추어 완벽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화살도 창날도 결코 기사의 갑옷을 뚫지 못한다. 이에 진창늪과 같은 전장을 선택함으로써 기사의 강점을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진창에서 이동하지 못한다'라는 약점으로 바꿔버린다.
병종, 군대, 국가. 어떤 것이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국토의 대부분이 험한 산지라는 것은 보통 약점일 수밖에 없다. 수확량이 적고 교통이 불편하니까. 그러나 병법에선 험악한 산지라는 약점을 수비에 사용함으로써 강점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병법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라우라가 말했다.
“허나 모험대에게 수비를 강요하는 데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골렘 부대를 충원한다면 본말전도이다. 우리의 전략은 골렘을 더 이상 추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여기까지가 지(地)의 차원이었다.”
그녀가 겁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인(人)의 차원을 논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