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8화 (48/510)
  • 00048 E급 모험대  =========================================================================

    “…….”

    리프라.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들어버렸다.

    새삼 회한에 젖었다.

    잘센마을의 리프, 그 남자를 어떻게 잊을까. 가장 처음으로 격파한 모험대의 대장이자, 가장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만난 사람이다.

    “……정확히 몇 개의 마을이 모험대에 넘어갔는지 말하라.”

    “다섯 마을입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모두 자경단을 보유하고 있나이다.”

    “그놈들이 우리를 제멋대로 협박하고 있수다!”

    별안간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터질 듯한 근육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구리빛 상반신을 드러내고 내쪽으로 고개를 슬쩍 숙였다. 눈동자에 투기가 넘치고 있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하외다! 하지만 거 늙은이한테만 맡겨둬서야 해가 져도 말이 안 끝날 거요. 소인이 다 설명해드리겠소.”

    “여기 노인장은 한 마을의 지도자이다. 너에게 그를 대신할 자격이 있느냐?”

    “어린놈이라지만 나도 한 마을을 이끌고 있소.”

    사신단 중 아무도 반발하지 않는 걸 보니 사실이었다. 내가 노인장을 쳐다보니 그가 한숨을 쉬며 스스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신에 청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마왕 나으리! 나같이 어린 자식이 우두머리가 된 게 바로 모험자 새끼들 때문이오. 그놈들이 자경단과 함께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자기네한테 합류하라지 않소? 촌장인 우리 아버지야 단박에 거절했지만.”

    청년이 이를 빠득 갈았다.

    “놈들도 단박에 아버지의 목을 날려버리더라 이 말씀이요. 나으리, 무슨 말인지 알겠소? 거절하자니 우리 모가지가 몸덩어리랑 작별할 참이고, 승락하자니 변변한 자경단원이 별로 없는 우리로서는 나으리와 싸우는 거에 목숨을 걸어야 하오. 어느 쪽이든 재수탱이라곤 없는 것이외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노인장이 허리를 굽신거렸다.

    “저 미천한 아이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배운 게 없는지라 말이 험하나, 본시 천성이 악하게 타고나진 않았나이다.”

    “거 노인네 뭐 그렇소? 지금 말투 따위가 중요할 때요?”

    “떼끼! 이 천하의 벌거숭이 같은 자식아!”

    노인장이 어디서 그런 목청을 뒀는지 버럭 소리질렀다.

    “언제 어디서나 윗분께 예의와 절차를 지켜야 하는 것이야!”

    “흥. 난 예의도 모르고 절차란 건 배운 적도 없소.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알겠소.”

    청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마왕 나으리한테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이요. 그럼 지금 상황이 어떤지 얼른얼른 알리는 게 마왕 나으리한테도 좋지 않겠소?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 아니오? 누가 노인네 아니랄까봐 쓸데없는 것만 찾는구랴.”

    “허, 이 놈이 그래도!”

    내가 속으로 혀를 찼다. 청년과 노인은 낡아빠진 주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흥미 깊은 토론이었고 청년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시기와 장소가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쿠우웅.

    서른 마리나 되는 골렘이 한꺼번에 발을 굴렸다. 갑작스레 땅이 흔들리자 사람들이 비틀거렸다. 넘어진 이도 있었다. 그들이 황망하게 날 바라보았다.

    “누구 앞에서 감히 허락치도 않은 논쟁을 벌이는가.”

    “송구하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위대한 존재이시여!”

    스무 명에 가까운 사신단이 일제히 땅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어느 때건 적법한 예의가 있음은 물론이다. 시기가 다급하여 상황을 빠르게 전달해야 함도 옳다. 짐이 보아하니 젊은 촌장이여, 너는 달리 예를 배운 적이 없으니 나에게 예를 갖추고 싶다한들 어쩔 도리가 없음이라. 오늘만큼은 예를 생략하는 것을 허하노라.”

    “역시, 말이 통하는구랴!”

    청년이 엎드린 자세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이구, 인간이라기보다 거의 짐승에 가까웠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허나 옳은 말로 너에게 조언한 노인장을 핍박함은 그릇되었다. 짐에게 상황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노인장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어억?”

    청년이 정말로 싫은 듯 인상을 구겼다.

    “그, 나으리? 소인도 명색에 같은 촌장이온데.”

    “짐이 친히 하나의 예를 너에게 가르쳐주마. 짐의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마라. 앞으로 만일 짐의 말을 쓸데없이 되풀이하게 만든다면 응당 대가가 주어질 것이다.”

    나로서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노인장이 설명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노인장이 뭔가 스스로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청년의 의견이 옳았다. 지금은 그런 대화법이 어울릴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청년을 두둔해줄 경우, 마을 촌장들 간의 서열이 어그러진다. 아마 노인장이 사신단 대표로 선출된 까닭은 그가 나이가 제일 많기 때문이리라. 즉 나이란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이고 전통적으로 정해진 기준이었다. 그런 기준이 무너진다면 촌장들은 누구를 대표자로 내세워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의견을 절충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할 게 뻔했다. 그같이 혼란을 초래한 나에게 반감을 품겠지.

    그들이 권위로 인정하는 바를 나 역시 권위로 인정한다. 청년에게 사죄를 명령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다만 노인장보다 청년이 설명을 훨씬 더 잘할 것 같으니까, 설명은 청년한테 듣고 말이다. 명분과 실리 둘 다 얻는다고 표현할까.

    “그……죄송하오, 노인네.”

    “쯧.”

    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예의 진동이 다시금 땅에 울렸다. 그러자 청년이 정신을 차렸는지 아예 넙죽 엎드려서 노인을 향해 큰절했다.

    “건방지게 말해서 죄송하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외다.”

    노인장이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몸소 체면을 챙겨줘서 황공하다는 낯빛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한 짓이 아니지만 착각을 정정해줄 필요가 없었다. 뒤쪽에서 사신단의 나머지 촌장들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들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내 행동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제 네가 자신 있다는 설명을 해보아라, 젊은 촌장.”

    “으. 소인이 말했다시피 리프인가 뭔가 하는 잡놈이 모험대와 자경단을 이끌고 있소외다. 다 합쳐서 적어도 일흔 명은 넘소. 나으리, 아시련지 모르겠소만 잘 단련된 전사 일흔 명이면 병사들도 토벌하기 어렵수다.”

    “일흔 명이 몰려다니면서 식량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눈을 치켜세웠다.

    칠십 명이나 되는 전투 집단이 위협하는 가운데, 이들 마을이 살아남았다. 나에게 대항하는 것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생명을 부지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제공한 거다.

    “어떻게 된 것이냐.”

    “먹을거리를 바쳤소. 목숨과 밀을 양자택일하라는데 어쩌겠수까. 그거 사죄할 겸해서 온 것이오외다.”

    사신단 일행이 또 다시 엎드렸다. 용서하라느니 사죄하라느니 떠들었다.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자기네 마을을 살리겠다고 식량을 바친 것에 대하여 뭐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들이 내 신하인가 뭔가. 이들의 마을이 내 영지인가 뭔가. 이렇게 사과하고 정보를 알려주러 온 걸로 그들은 의리를 다했다. 대충 겉모습으로 겁을 주고 돌려보내면 그만이겠지. 촌장들도 그걸 알고 온 것이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의리를 다했다.

    그러니 설령 모험대와 당신의 전투에서 당신이 승리하더라도, 우리를 따로 벌하지 말아달라. 대신 우리에게도 사정이 있으니 식량은 상대쪽에 바칠 수밖에 없다.

    사신단은 자신의 마을을 위해 최선의 수, 즉 모험대가 이기든 내가 이기든 어찌되었든 생존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냈다. 만일 여기서 내가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겁박한다면? 보나마나 태도가 돌변하여 우리도 모험대에 합류하겠다고 협박해올 거다. 간단한 비즈니스였다.

    “…….”

    내 눈길을 끈 것은 그처럼 당연하고 시시한 거래를 암묵적으로 제시해오는 사신단 일행이 아니라 청년이었다. 오직 청년만이 허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하게 양발로 서 있었다.

    내가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청년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소. 난 현재 상황이 진짜 마음에 안 드오.”

    “네, 네놈이 정녕!”

    노인장이 경악했다.

    “아, 노인장. 조금만 가만히 있을 수 없소? 난 이런 수작이 영 싫단 말이외다.”

    “수작이라니 그 무슨…….”

    “아 그만. 일단 내 말부터 합세다. 보소. 아재들, 보소! 그놈들한테는 일 년 내내 고생해서 일군 밀알을 바치고, 마왕 나으리에겐 정보를 꼰지르고. 그렇게 해서 댁들이야 잘 살았다 똑똑하게 처신했다 그렇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거든!”

    청년이 사신단을 주욱 둘러보았다.

    “모험대 놈들이 이긴다손 쳐보자고. 그럼 끝이요? 거 다섯 마을이 연합해서 만들어낸 자경단은 그대로 순순히 헤어져서 다시 남남이 될 것 같소? 놈들은 이미 한번 우리를 호구로 만들었소. 염병할, 지들이 직접 수확하지도 않은 밀알을 챙겼다고! 칠십 명이 모이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놈들은 벌써 맛본 거요. 과연 놈들이 해산하겠소, 아니면 계속 작당질해서 우릴 벳겨 먹으려 들겠소?”

    내가 다소 놀랐다. 아까도 그랬고, 청년은 거친 말투로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연기> 스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아재들. 아니라고 말하지 마시오! 우리는 그딴 짓거리에 언 놈보다 이골나지 않았소외까? 거 죽여도 시원찮을 영주 새끼들이 만날 하던 짓이 그거요. 우리는 지금 영주 새끼를 한 마리 더 키우고 있는 거나 진배없소.”

    “…….”

    “그놈들은 마을 간에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겼소! 규칙을 어긴 자에겐 징벌이 필요하오. 알겠소? 호구가 안 되려면 놈들을 족쳐야 하오. 그렇다면 우리끼리 힘을 합치는 게 좋겠소까, 아니면 여기 마왕 나으리와 힘을 합치는 게 좋겠소까?”

    촌장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혹스러워 하는 얼굴이었으나 머릿속에서 한창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거 살아온 세월은 뒀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소. 만약 마왕 나으리가 이겨도 사정은 나빠지지 않겠소? 여차하면 이쪽에 붙고 저쪽에 붙는 박쥐 새끼란 게 밝혀졌는데, 마왕 나으리가 우리를 신뢰하겠소? 언젠가 큰코 다칠 거라고 내 불알을 걸고 맹세할 수 있소외다.”

    “크하하하하!”

    내가 크게 웃었다. 청년과 사신단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젊은 촌장. 짐에게 이름을 밝히라.”

    “파, 파르시라고 하오.”

    청년이 어딘지 겁 먹은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씨익 웃었다.

    “파르시. 예의법도를 모르는 애송이인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작은 범이었도다. 그렇다. 네 말 그대로이다. 짐은 그대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허나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 젊은 촌장이여.”

    “무, 무엇이오?”

    “짐이 그대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은 모험대를 토벌한 다음이 아니다. 토벌하기 전이지. 적군의 보급을 끊는 것은 병법의 기본 중 기본. 그대들이 병참을 맡는다는 게 알려진 터에 짐이 그대들부터 노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짐은 그대들의 마을을 먼저 궤멸함으로써 적군의 식량을 메마르게 할 것이다!”

    노인들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또 다시 사죄의 행진이 이어졌다. 그러건 말건 그들의 머리 위로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되었다. 그대들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짐에게 조력할지, 아니면 모험대와 함께 역도의 무리가 될지. 지금 선택하라!”

    “위, 위대한 존재이시여……! 설령 저희가 당신께 보, 복종할지라도……당장 역도의 무리로부터 마을을 지킬……방도가 없나이다!”

    노인이 오들오들 떨었다.

    “통촉……통촉하여주시옵소서……!”

    “걱정하지 마라. 짐이라고 그대들을 단순히 화살받이로 쓰겠는가.”

    죽음의 위협을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살 길을 터주어야 했다.

    “하, 하옵시면?”

    “짐에게 조력할 것을 맹세하라. 짐이 친히 그대들에게 광명을 보여줄지어다.”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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