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7화 (47/510)
  • 00047 E급 모험대  =========================================================================

    일단 생각에 잠길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라우라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다. 굳이 존댓말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느니 하면서 대충대충 대화했다. 라우라가 존댓말을 쓰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사실 나이로 위아래를 따질 시엔 라피스가 내게 반말을 써야 옳은데…….

    한번 상상해봤다.

    ‘단탈리안? 또 왜 이랬어? 생각이 있는 거야? 정말 한심하다. 그러고도 마왕이라고 말할 수 있어? 아예 나를 실망시키려고 작정하지 그래?’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웠다.

    라우라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군신 사이에는 확고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경어를 쓰십시오. 하지만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편히 말을 나누는 겁니다.”

    “그렇다면 좋다.”

    그녀가 눈을 빛냈다.

    “군주가 사적으로 고민하는 바를 풀어주는 것 역시 신하된 도리. 부족한 몸이다만 단탈리안, 공사 양쪽에서 주군을 전력으로 섬기겠다.”

    “의욕이 넘쳐서 좋네요…….”

    그때 던전에 모험대가 침입했다는 알리미가 떴다. 라우라도 그걸 알아챘는데, 그녀는 던전에 누군가가 쳐들어오면 자동으로 비상음을 내는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내 품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흠, 다녀오겠다.”

    “각인을 해주하느라 체력이 많이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수고해도 괜찮습니다.”

    “아니. 주군이 걱정해준 덕택에 벌써 쾌유했다. 왕은 함부로 거동하지 않는 법, 소녀가 냉큼 적의 목을 따올 테니 기다려주게. 가신이 된 이후로 맞이하는 첫 번째 전투를 내 멋지게 장식하겠다.”

    라우라가 정말 건강해졌는지 당찬 걸음으로 마왕방을 나섰다. 어딘지 신나보이기도 했다.

    여하간 감사한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절실했으니까.

    현재 상황부터 확인하자.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이 있는 곳에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하지만 홀로 남았는데 혼잣말을 가릴 것도 없었다.

    “사, 상태창.”

    현 상황의 심각함과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게 띠링! 하고 소리가 울렸다. 이 세계에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을 하나 뽑으라면 설정창이 있어 저 빌어먹을 효과음을 당장 바꾸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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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20    악명: 1120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E)

    통솔: 25/30  무력: 7/10   지력: 29/30

    정치: 24/30  매력: 15/20  기술: 4/10

    *칭호: 1.공포의 마왕

    *능력: 전술(F),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2개]

    [부하: 42개체/21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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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과 비교해서 능력치 자릿수가 달라졌다. 직업레벨(마왕)이 상승함으로써 능력치 한계선이 대폭 올라갔다. 직업레벨은 한 단계 올라갈수록 플레이어의 성장 한계치를 높여주었다. 그렇다 쳐도 지나치게 한계치가 높아진 감이 있었다. 직업레벨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가 영향을 끼쳤다는 뜻.

    얼른 칭호란을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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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1. 공포의 마왕. 세계의 거대한 질서를 붕괴시켰다. 마인에게 경의를, 인간종에게 두려움을 받는다: 통솔 한계치+10, 지력 한계치+10, 매력 한계치+10, 부하개체 한계치+100, 악명+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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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상당히 좋은 칭호였다.

    캐릭터가 노가다를 뛰든지 퀘스트를 깨든지 해서 기본레벨을 아무리 높여봤자 한계치 이상으로는 능력치를 올릴 수 없다. 가령 무력 능력치의 한계치가 30이라면, 기본레벨이 99여도 절대 30 이상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직업레벨을 적절히 올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직업레벨은 F, E, D, C, B, A, S, SS, SSS, 총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직업레벨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특정 능력들의 한계치를 5씩 올려준다.

    기본레벨이 실질적인 능력치를 높이고, 직업레벨이 능력의 한계치를 높인다. 무조건 노가다를 뛴다고 좋은 게 아니다. 한계치가 꽉 찬 상태에서 기본레벨을 올려봤자 아무 능력도 오르지 않고, 다만 잠재적인 능력치로 저장되기만 한다. 플레이어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업그레이드 해주듯 양쪽의 레벨을 끊임없이 신경써가며 캐릭터를 육성해야 한다.

    이같은 점에서, 통상 직업레벨로밖에 올릴 수 없는 한계치를 대폭 상승시켜주는 <공포의 마왕> 칭호는 너무나도 좋았다. 원래대로라면 직업레벨을 올리려고 별에 별 생쑈를 다해야 한다. 예컨대 직업레벨(검사)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유파의 무술인과 대결해야 하고……으으, 예전의 캐릭터를 키우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자니 치가 떨린다.

    간단히 계산해서 <공포의 마왕>은 직업레벨을 2개나 공짜로 올려준 거다.

    “이거, 원.”

    허탈했다.

    놀라웠으나 기쁘지 않았다. 기본레벨과 직업레벨이 높아진 것은 분명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대체 왜 올랐는지 모르겠다. 원인도 모르는 행운을 마음놓고 기뻐할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일억 원을 준다고 제안한다. 왜 일억 원을 주냐고 물어도 타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그 타인을 전혀 모르고, 어떤 목적으로 일억 원이나 되는 돈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순수하게 기뻐하며 일억 원을 덥썩 물겠는가.

    문제는 내가 이미 일억 원을 받아버렸다는 것. 이제 어떻게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차례였다.

    ─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 A급 시나리오 <철혈의 여재상>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 B급 시나리오 <적의 적은 아군>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 S급 시나리오 <인간계의 분열>이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한데…….”

    가만히 네 개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고민은 의외로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자 네 개의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곧바로 깨달았다. 까다로운 추리를 거칠 이유도 없었다.

    “이거 게임 시나리오네.”

    라우라를 부하로 만들자마자 알림말들이 떴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장들은 전부 라우라와 연결지어서 해석해야 했다.

    철혈의 여재상은 라우라를 뜻한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것 또한 라우라와 관련된 시나리오일 텐데, 아마도 라우라가 일부 마왕과 합심해서 용사측 세력을 공격한 이벤트를 가리키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인간계의 분열>은 말 그대로 인간계가 용사가 속한 제국 그리고 라우라가 이끄는 왕국을 중심으로 해서 뿔뿔이 갈라지는 걸 뜻하리라. A급, B급, S급은 아마 어느 사건이 더 메인 시나리오에 가까운가에 따라 정해지지 않았을까?

    즉 라우라를 부하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원래 게임상 일어날 예정이었던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하는 얘기였다.

    “왜 이렇게 당연한 일이 나한테 도움을 준 거냐.”

    의문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이 역시 답안을 제출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알리미가 떠올랐다는 것은, 바꿔 말해 게임에서의 '나'와 이 세계에서의 '나' 사이에 놓여져 있는 차이점이 새로운 알림말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였다. 용사는 볼 수 없고 마왕만이 볼 수 있는 알림말을.

    용사는 무엇인가?

    용사란 퀘스트를 진행해나가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마왕은 무엇인가? 다름아니라 퀘스트를 방해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용사의 사명이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마왕의 사명은 퀘스트를 해결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고로 용사가 퀘스트를 통해 경험치를 얻는 반면에――.

    “마왕은, 퀘스트를 깨부숨으로써 경험치를 얻는 거로군.”

    사태가 명확해졌다.

    왜 게임과 달리 이 세계에는 퀘스트 같은 게 발생하지 않은지 이해했다. 예전에는 그저 게임과 현실이 다르니까 그런 것 아니겠냐고 납득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왕에게는 애시당초 퀘스트가 뜨지 않았다. 오히려 시나리오와 관련된 퀘스트를 찾아내서 파괴하는 것이 마왕의 '보이지 않는 퀘스트'였다!

    퀘스트를 깨는 것이 마왕 본연의 임무.

    역설적으로, 퀘스트를 '깨다'라는 표현에는 해결한다는 의미도 정말로 깨부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그럼 안드로말리우스 때는 왜 아무것도 안 뜬 거야?”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자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안드로말리우스였다. 만일 퀘스트를 깨부숨으로써 내가 경험치를 얻는다면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사건이야말로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설마 안드로말리우스는 용사가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데 생각보다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젠장. 뭐가 뭔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항복! 더 이상 모르겠다. 정보가 지나치게 부족했다. 언젠가 메인 시나리오와 관련된 인물을 또 하나 찾아내서 족치든가 부하로 만드든가 해봐야지 나머지 의문점이 해결될 듯했다.

    그렇게 머리를 박박 긁고 있을 때였다. 라우라가 마왕방으로 돌아왔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그럴 만한 사정이 생겼다.”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모험대가 전멸했다는 알림창도 아직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금 마왕성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

    “대기한다고요? 쳐들어오지 않고?”

    “그렇다. 침입자가 아니다, 단탈리안.”

    침입자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내가 궁금한 얼굴로 라우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한결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신단이다. 그들 말에 따르면 인근 마을들을 대표해서 찾아왔다 하네. 주군에게 중대히 드릴 말이 있다는군.”

    *  *  *

    사신단은 주요 인원이 노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호위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제외하고는 전원 촌장 혹은 촌장에 버금가는 이들인 듯했다.

    내가 골렘 서른 마리와 요정 열 마리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노인들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말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지 지팡이에 기대어 몸을 아래로 낮추기만 했는데, 그것이 나이든 이가 내보일 수 있는 거의 최대한의 예의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예를 거두어라.”

    “황공하나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선두에 선 노인이 느릿느릿하게 상체를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니블헤임에 가기 전 복속시킨 마을들의 촌장 중 한 명이었다. 화전촌이 아니라 제법 번듯한 마을의 촌장인 걸로 기억했다.

    “용건만 간단히 듣겠다. 짐의 거처에는 무슨 일로 방문했는가.”

    “위대한 존재이시여……!”

    노인이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보는 내쪽이 무릎이 깨질까 놀랄 정도로 급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아이구, 노인장. 그러다 황천행 열차가 정시에 도착하지 않고 일찍 와버리겠습니다!

    허나 의도조차 모르는 상대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되었기에 나는 냉정하게 되물었다.

    “용건을 듣겠다 했노라.”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나이다! 소인은 라우크 산아래 마을의 촌장이옵고, 여기 있는 노인들 역시 저와 같은 촌장이옵니다. 위대한 존재께서 요구하신 대로 저희 마을들에선 모험자들을 철저히 박멸했나이다. 하지만 그중 한 모험대를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그야 마을사람들로는 감당치 못하는 모험대도 있으리라. 아마 E급 모험대쯤 되는 모양이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구나 실수는 저지를 수 있다. 지금 너희가 내게 보이는 사죄는 실수의 무게에 비해 무겁구나.”

    “그, 그 모험대가 몇몇 마을을 규합해서 일종의 연합군을 만들었사옵니다.”

    “뭐라고?”

    내가 인상을 썼다.

    노인이 안 그래도 낮춘 몸을 이제는 아예 땅바닥에 갖다댔다.

    “송구하나이다……대부분의 마을은 위대한 존재께서 명하신 바에 복종했습니다만, 몇몇 마을은 처음부터 역심을 품고 있었사옵니다. 그들이 모험대의 꾀임에 넘어가…….”

    “넘어가? 넘어가 무엇이냐.”

    “위, 위대한 존재의 재산을……노린다고…….”

    “하.”

    어이가 없었다.

    상황은 대충 짐작됐다. 아마 모험대가 마을사람들에게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을 게다. 던전에는 산더미 같은 금화가 있다던지, 뻔한 레퍼토리를 사용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마을놈들은 거기에 넘어갔겠고.

    그래봤자 마을사람들과 E급 모험대. 약간 불쾌했지만 그 사실을 알리러 온 노인장들을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도의 무리를 이끄는 자는 잘센마을의 리프라고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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