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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6화 (46/510)
  • 00046 Quest Break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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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우라의 노예각인.

    니블헤임을 방문한 데에는 그것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 이후, 마왕 바르바토스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온갖 장소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자기 던전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나를 시종으로 부려먹었다. 하루를 꼬박 말이다!

    그녀는 레즈비언 전용 창관에 날 데려가기도 했는데 우선 그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다음으로 나를 노리개로 삼아 즐기려 했다는 것에 경악했고,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가 양성애자라는 점에 기절했다. 필사적으로 반항하지 않았으면 나는 레즈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했으리라.

    하루 내내 재미나게 놀아준 대가라고 해야할까. 바르바토스는 고위 마법사를 소개해주었다. 그녀가 중개해준 덕택에 나는 물건을 쉽게 구했다.

    “자아.”

    황금 마석의 파편을 돌멩이로 잘게 빻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금빛 가루에다 물을 조금 섞어내자 도자기 유약같이 끈적끈적거리는 액체가 완성됐다. 노예각인을 해주하는 데 사용하는 마석 액체였다.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겠다. 여기면 되는가?”

    라우라가 얌전히 동굴 바닥에 앉았다. 하얀 드레스가 곱게 바닥에 퍼졌다. 저것 역시 니블헤임에서 선물로 사온 물건으로써 딱히 빨래를 하지 않아도 청결한 상태가 유지되는 옷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라우라가 던전을 수비했으니 당연히 보답해야 마땅했다.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에 기하학적으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두루마리를 힐끔거리면서 땅바닥에다 그림을 배껴 그렸는데, 처음에는 분필을 썼다. 혹시라도 그림을 잘못 그리면 다시 니블헤임까지 가서 마석부터 구해와야 할 판국이었다. 참고로 이 마석, 특수한 마법으로 처리된지라 겁나게 비쌌다. 먼저 분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다 금빛 액체를 붓칠했다. 천천히 라우라를 중심으로 해서 둥그런 마법진이 그려졌다.

    “음.”

    한참이 지나고 내가 기지개를 주욱 폈다. 전부 완성했다. 작품에 대해 솔직한 감상을 토로하자면, 미적 센스가 넘쳐났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태어났더라면 일약 스타덤에 오를 게 확실한 회화적 재능이었다.

    재료가 갖추어졌다.

    노예로 종속된 라우라.

    노예각인을 해주하는 마법진.

    그리고 노예각인이 새겨진――인간의 팔뚝.

    “…….”

    침대 밑에서 상자를 꺼냈다. 철재로 된 곽을 열어재끼자, 라피스가 보존마법을 걸어둔 잭의 팔뚝이 나타났다. 마치 조금 전에 자른 듯 근육이 도드라졌고 살색이 짙었다.

    약간 슬펐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슬픔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기가 살았다는 증거를 이런 식으로밖에 남기지 못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연유하는 감정이었다. 그 인간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당사자가 느끼기에는 적이 사치스러운 감정임에는 확실했다.

    “고대의 것은 고대의 것에. 먼지의 것은 먼지의 것에. 원인이 아닌 것은 원인이 아닌 것에. 감옥에 갇힌 정령에게 명하노니, 이제 그대가 왔던 장소로 되돌아가라.”

    노예각인이 새겨진 팔뚝을 마법진 정면에 내려놓은 다음, 마법사가 알려준 대로 주문을 외웠다. 소절을 덧붙일수록 마법진에서 환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가 미리 준비한 단검으로 잭의 팔뚝을 찍었다.

    “읏, 우으으읏……!”

    라우라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녀의 등에도 노예각인이 그려져 있다. 잭의 팔뚝에서 각인과 함께 그녀의 것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법사 말에 따르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과정이었으므로 계속해서 주문을 읊었다.

    “아윽, 흐으읏……으으읏……!”

    라우라의 하얀 이마와 목덜미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가끔씩 고통을 견딜 수 없었는지 스프링처럼 허리가 튀어올랐다. 그때마다 아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겨우 주문이 끝났을 무렵, 그녀는 기력이 다 빠져서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잭의 팔뚝에서 문신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라우라한테 다가갔다. 라우라가 미약한 숨결을 연신 내뱉었다. 오 분 정도가 흘러서야 그녀가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했다.

    “……문제없다.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이 정도야.”

    “미안합니다. 최대한 편한 방법을 찾았지만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알고 있다.”

    라우라가 눈물 맺힌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나도 알고 있다. 각인이 새겨질 때는 이것보다 다섯 배는 아팠으니……단탈리안, 이제 그대가 나의 주인인 것인가?”

    “저는 당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주인입니다. 우리 둘은 각자가 주인된 자로서 정당하게 계약을 맺을 따름이지요.”

    “계약…….”

    그녀가 멍하게 말을 따라했다.

    “예. 라우라, 다시 한번 제안하겠습니다. 당신의 지략을 저에게 바치십시오. 저는 당신을 충실한 가신으로 예우하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제가 당신을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니, 당신을 버리고 모욕한 세상에 함께 보복할 것을 저 단탈리안이 약속드립니다.”

    “우둔한 제안이다.”

    라우라가 실낱처럼 가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대의 부하임을 받아들였다. 각인이 없을 따름이지 내 머리, 내 몸, 나의 영혼은 오로지 그대의 영광을 위해 쓰일지어니. 나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영원토록 그대 단탈리안의 것이다.”

    그 순간, 여태까지 들어본 어느 효과음보다 화려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부하로 영입했습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상태창에 충성도가 추가로 생성됩니다.」

    「지고지순한 충성! 상대방은 처음부터 당신을 완전한 군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충성심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환희가 가슴에 벅차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던전 어택> 최강의 캐릭터 중 한 명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이제 라우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좋았다. 칭호마저 새로 생길 정도의 충성심이라니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상태창!’

    당장 라우라의 상태창을 확인해봤다. 호감도가 50 초과여서 이전보다 한결 상세하게 정보가 표시되었다. <던전 어택>의 호감도 시스템은 까다로워서 모종의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호감도가 일정 한계선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의 정보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라우라는 이제 나의 부하가 됨으로써 50이라는 최초의 한계선이 깨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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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라우라 데 파르네세

    종족: 인간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5)

    레벨: 10    명성: 492

    직업: 책사(D), 학자(D), 성노예(E)

    통솔: 41  무력: 10  지력: 44

    정치: 9   매력: 54  기술: 1

    호감도: 51

    충성도: 95

    *칭호: 1.공작 영애(廢) 2.천재 3.충신

    *능력: 승마술B, 수사학C, 음악C, 전술C, 기하학D, 작전술E

    *스킬: -

    현재심리: ‘그대가 보고자 하는 곳을 나 역시 볼 것이요, 그대가 걸어갈 길을 나 역시 뒤따라 걸을 것이다. 그대의 시선을 산맥이 막는다면 산맥을 부수겠다. 그대의 발길을 대양이 막는다면 대양을 메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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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했다. 흠 잡을 구석 없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레벨이 고작 10인데도 불구하고 무려 세 개의 능력치가 40을 넘어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칭호의 효과를 받았으리라. 예컨대 천재라는 칭호는 캐릭터를 키우는 초중반에 아주 좋게 작용하는, 대표적인 사기 칭호였다. <던전 어택>에서 저 칭호를 붙이고 시작하는 캐릭터는 아군과 적군을 통틀어 많아봤자 열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칭호가 꼭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마왕인 내가 아직도 칭호 하나 얻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칭호라 써진 부분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따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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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1. 공작 영애(廢). 멸문한 대귀족의 영애. 사교계에서 추방되었다. 성노예 직업을 얻음으로써 현재 디메리트 효과 적용 중: 정치-20, 매력-10, 명성-500

    2. 천재. 유례없이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 능력치와 숙련도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레벨업 시 능력치 +4, 숙련도 성장 속도 x2, 직업 레벨 성장 속도 x2

    3. 충신. 지고지순한 충성심의 보유자. 군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 통솔+5, 지력+5, 매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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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나 다를까 초반에 한정해서 최고급의 칭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작 영애(폐)가 옥의 티였으나, 당장은 쓸모없는 정치력과 매력 그리고 명성에만 효과를 미치니 상관없었다. 내가 라우라에게 기대하는 바는 정해져 있었다.

    통솔과 지력!

    책사에게 필요한 두 가지 능력만 출중하면 다른 요소는 솔직히 알 바 아니었다. 내가 언제 라우라를 영입하면서 초패왕 항우와 같은 무력을 기대했는가, 팜므파탈처럼 적군을 싸그리 매혹하는 매력을 기대했는가. 내게 부족한 책략과 모략의 부분을 채워주길 바라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우라는 훌륭하게 기대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내가 한창 감동에 감싸여 있을 때였다.

    「시나리오가 예정된 운명의 조각을 파괴했습니다!」

    이 세계에서도, <던전 어택>에서도 본 적 없는 알림말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

    이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곧바로 음울한 효과음과 함께 서너 개의 홀로그램이 중첩되어 나타났다. 나는 정신없이 현란하게 반짝거리는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좀체 알아먹을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A급 시나리오 <철혈의 여재상>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S급 시나리오 <인간계의 분열>이 '심각하게' 파괴됩니다!」

    「B급 시나리오 <적의 적은 아군>이 '완전하게' 파괴됩니다!」

    A급 시나리오? S급 시나리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철혈의 여재상이란 물론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파괴되다니?

    여태까지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알림말은 기본적으로 <던전 어택>과 똑같았다. 게임에선 모니터에 뜨던 것이 여기선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떠오른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런 알림말은 오직 <던전 어택>으로 향하는 외길을 고집해서 걸어온 나같은 폐인조차 처음 봤다.

    제일 황당한 사건은 직후에 일어났다. 이번에는 음울한 효과음과 정반대로 활기차고 당당한 빵빠레가 울려퍼진 것이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뭐라고?

    턱뼈가 빠질 정도로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똑같은 소리가 무수하게 중복되어 울릴 때 그러하듯, 효과음이 빠바바방 하고 내 귓가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직업 레벨(마왕)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

    ·

    ·

    「레벨이 올라갑니다!」

    “…….”

    나는 완전히 얼이 빠져서 홀로그램의 행진곡을 듣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효과음이 멎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비벼봤지만, 연한 푸른색의 홀로그램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가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홀로그램의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일곱, 여덟……열넷, 열다섯…….

    열여섯.

    한꺼번에 기본 레벨이 열여섯 개 올랐다.

    지난 몇 달 동안 개고생해도 고작 서너 개밖에 오르지 않은 레벨이――생전 처음 보는 문구와 함께, 단 한순간에 열여섯 개가 올랐다.

    이것 또한 끝이 아니었다. 이미 그로기에 빠져버린 나에게 마치 어퍼컷이라도 먹이겠다는 듯 효과음이 웅장하게 터졌다. 과장 좀 보태서 두개골까지 흔들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축하드립니다! B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습니다. 이 놀라운 업적으로 인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칭호 <유능한 마왕>이 생성됩니다!」

    「축하드립니다! A급 시나리오를 파괴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업적으로 인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칭호 <공포의 마왕>이 생성됩니다! 기존의 칭호가 새로운 칭호로 대체됩니다.」

    …….

    “단탈리안. 왜 그런가? 아까부터 멍하게 있고.”

    아득히 머나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그 목소리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신하가 군주에게 하대하는 것도, 군주가 신하에게 존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대에게 경어를 쓰겠다. 그대도 부디 나를 거리낌없이 대해주었으면 한다.”

    끼이익.

    내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난잡하게 떠오른 홀로그램의 장벽 너머로, 금발의 소녀가 살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가 부끄러운지 볼에 홍조까지 띄우고 있었다. 그제야 내 입밖으로 간신히 한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헐.”

    그것을 한마디 말로 취급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금 도대체……무슨 짓거리를 저지른 겁니까, 라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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