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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4화 (44/510)

00044 Quest Breaker  =========================================================================

“부장님. 보고서 좀 검토해주십시오.”

터엉, 하고 청년이 서류뭉치를 내려놓았다.

책상에 쌓인 종이의 산맥을 보고 여인이 눈쌀을 찌푸렸다. 한참 재미난 만화를 읽는 참이었다. 여태까지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던 주인공이 어찌된 영문인지 여자로 바뀌어서, 정반대로 여자에게 공략 당할 처지가 되어버린 부분――만화에서 가장 두근거리면서도 흥분되는 장면을, 지금 막 읽고 있었다.

여인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만화를 읽다가 방해하는 놈이었다. 두 번째로 싫어하는 인간이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는 놈이었다. 우연하게도 눈앞의 청년은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고로 여인이 절간의 사천왕처럼 얼굴을 와락 구기고

“아앙? 시방 요단강에 코 박고 싶어 지랄 났냐?”

하고 청년을 노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아…….”

금발의 청년이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꽤나 공들여서 만든 보고서라구요, 이거.”

“네가 공들여 탑을 쌓건 똥을 퍼지르건 내가 그걸 봐줘야 하는 의무가 어디 있는데. 대갈통에다 핑크색 페인트를 부어주랴? 그럼 네놈 회백색 뇌수탱이도 조금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겠지, 앙?”

“부장님. 일이라는 게 기일을 정해서 딱딱 처리하지 않으면…….”

여인이 만화책을 덮었다.

“하 요거 요 새끼 봐라. 기일을 정해서 딱딱 처리해? 네놈은 애미 뱃속에서 아따 어머니 지 몇월며칠몇시몇분에 딱 맞춰서 나갈라요 입구 딱 벌리고 대기 타쇼 요렇게 통보하고 나갔냐? 새끼가 때가 무르익으면 만사가 형통이거늘, 시간 정하지 않으면 좆탱이 발딱 세우지도 못할 자식이 요 새끼네. 기일이 그렇게 좋으면 네 새끼 까꾸라질 기일도 내가 정해주마. 앙? 네 새끼는 지 기일이 언제인지 궁금해서 그동안은 어떻게 숨쉬고 살아왔냐? 면상이 참 안녕하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댁의 불알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심히 궁금한데 직접 확인해봐도 될련지요? 아앙?”

청년이 속으로 생각했다.

겁나게 무섭다.

여자는 미인이었다. 검은색 생머리가 자기는 단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꽤나 고급스러운 분이니 알아서 모시라 주장하고 있었다. 도저히 근무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회색 후드티를 입었으나 그것도 그녀의 몸에 걸쳐지니 왕비의 드레스가 부럽지 않았다. 그런 미인이 새끼이니 불알이니 욕지거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란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오, 오늘은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청년이 침을 삼켰다. 성격이 저따구니까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밀려날 대로 밀려나 여기 촌구석까지 좌천된 것이리라.

평소라면 지금쯤 독서를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얼른 사과한 다음 물러갔겠으나, 오늘만큼은 승부를 보고 싶었다.

“부장님! 그럼 도대체 언제 보고서를 봐주실 겁니까.”

“나도 몰라. 네 어머니는 언제 네가 태어날 줄 알아서 널 낳았겠다, 불효자 같은 새끼야? 일단 내가 책 좀 읽고나서 생각해볼 테니 얌전히 입구녕에 지퍼 채우고 저기 구석에 처박혀 있어.”

“어제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 그제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 그그저께도 책 읽고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놈의 책은 언제까지 읽어야 다 읽는 건데요!”

여인이 쿨하게 대답했다.

“내가 읽을 만화책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아니, 만화책은 매달 매년 새로 나오잖아요…….”

“그럼 세상에 만화가가 사라질 때까지 읽지 뭐.”

“일할 생각이 있기는 합니까!?”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뭔가 일을 시키지 마라.”

확실했다. 자신의 상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쓰레기였다. 인천 앞바다에 빠트리면 바다가 식겁해서 퉤 뱉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우주에 내던지면 이게 무슨 쓰레기냐고 경악하며 지구만 버려둔 채 은하계가 안드로메다까지 줄행랑치겠지…….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청년은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옛날엔 여인이 상사라는 것에 자긍심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체념과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 지구와 우주의 환경을 위하여 내 한몸 희생한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진즉 전신주에 목을 매달았으리라. 그러나 왜 하필 내가 희생해야 하는가?……청년은 벌써 수천수만 번 자문했으나 알 수 없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신의 장난이든 운명이든, 이 썩어빠진 상사의 엉덩이를 두들겨줄 사람은 자기뿐이었다.

청년이 책상에 엎어진 만화책을 낚아챘다. 여인이 어, 하고 입을 벌렸다.

“보고서 읽으실 때까지 만화책은 압수이지 말입니다!”

“…….”

여인이 지긋이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만화책을 허공에 들어올린 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났다.

“좋아.”

하고 여인이 말했다.

“봐주지.”

“저, 정말입니까!”

자신이 거둔 성공이 믿기지 않아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시에 감동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인간 쓰레기에다 욕쟁이이며 월급도둑이자 방구석폐인인 여인이었어도 역시 열 번, 아니 백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었다.

“감사합니다, 부장님! 전 언젠가 부장님이 제 진심을 알아주실 거라…….”

“별 내용 아니면 너 죽는다. 진짜로.”

“…….”

그 나무가 넘어오면서 아무래도 나무꾼을 깔아뭉갤 것 같아서 문제였다.

여인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의자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고개를 살짝 당긴 다음, 그녀가 양손으로 서류를 들고 한장한장 넘겼다.

초반에는 한 장의 서류를 넘기는 데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속도가 느려지더니 중반에 이르러서 한 쪽에 오 분 넘게 머무르기도 했다. 청년은 혹여 여인이 질문하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게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났다.

“……흐음.”

여인이 마지막 장에서 시선을 땠다. 그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청년을 올려다봤다.

“수명이 늘어나서 좋겠네.”

“감사합니다.”

“연기 스킬을 활용해서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이야.”

여인이 서류뭉치를 책상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허리를 기대었다. 거의 눕다시피 할 정도인 둔각으로. 여인은 하얗고 밋밋한 천장에 무언가 흥미로운 물건이라도 붙은 것처럼 위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것이 생각에 깊이 잠긴 상태임을 청년도 알았다.

“언제부터 관전했냐?”

“튜토리얼 때부터요. 그때부터 이 플레이어는 자기 특징을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진즉에 죽은 줄 알았는데.”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

“하긴 예전부터 말빨은 좋았지.”

라고 말한 다음에 또 입을 닫았다. 청년이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여인이 천장을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이십 분이 넘어가자 청년은 조급해졌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플레이어는 충분히 상위권 랭크로 등록될 만합니다. 그건 그대로 우리 지부의 실적으로 이어지고요.”

“…….”

“아무리 홧김에 보내버렸다고 해도 애프터 케어도 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더더욱 배려를 해야죠.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플레이어한테 필요한 정보 알려주고 그러겠습니다. 포인트 떨어지지 않게 할 자신 있습니다.”

“안돼.”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부장님!”

“오해하지 마. 네 보고서는 흥미롭게 읽었으니까.”

“예?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곁눈질로 청년을 쏘아보았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마. 최소한의 정보도. 우리가 플레이어와 접촉한다는 사실만으로 포인트가 깎인다. 앞으로 이 플레이어의 포인트를 깎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겠어. 아예 개입을 하지 마. 내버려둬.”

“네, 네에?”

“난이도가 지금 광란의 모드이지. 흐음. 더 난이도를 올릴 구석이 없나.”

여인이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지려 하자, 청년이 당황해서 말했다.

“저기, 부장님.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습니까?”

“말귀 못 알아먹네. 정보를 제공하려고 접촉하는 즉시 10 포인트 나가잖아.”

“……겨우 10 포인트잖아요.”

“아이고, 밥팅.”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역대 1위 플레이어랑 2위 플레이어 점수 격차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냐? 132점이다. 고작 132점이야. 최소한의 정보를 주겠답시고 개입하기 시작하면 100점은 금방 날아가.”

“하지만 그건, 진짜 최상위 플레이어들 아닙니까. 어차피 100점 1000점 따위는 천 위권 안에서도 별 거 아닌데…….”

청년이 말을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 설마 이 플레이어가 백위 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쳤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십 위권도 들어갈 거다. 밥팅아, 이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보고서 쓰기는 지가 전부 써놨으면서 정작 플레이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알아보질 못해.”

“허억. 시, 십 위권이요!?”

여인이 일어나서 청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네놈 생각은 뻔하지. 야, 얘가 파이몬한테 왜 죄과를 묻지 않은 건지 알겠냐?”

“그거야……파이몬이 워낙 불쌍해서 동정심이 든 거 아닐까요?”

“뭐? 동정심?”

여인이 눈을 크게 뜨더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전신을 떨어대며 웃어서 그만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크하하하하! 동정심이라니! 끄하하, 하필, 하필 동정심이라니!”

그녀가 한참을 웃었다.

청년이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낯을 붉혔다. 그가 다소 분이 치밀어서 되물었다.

“우씨. 그럼 뭡니까?”

“하이고, 부처님 할아범이 와도 구제할 도리가 없는 중생아. 낫 놓고 기역도 모른다니너 딱 네가 그꼴이야. 야, 얘가 파이몬을 족쳐서 얻을 게 뭐냐? 자존심? 금전적인 보상? 그딴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게 옆에 있어. 바로 고위 마왕의 지지야. 당장에야 자존심 세우고 보상 챙기면 좋겠지. 그렇지만 고위 마왕한테 면박을 준 하위 마왕을 누가 고운 눈으로 쳐다보겠어? 마왕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전부 계산된 행위라는 말씀이에요?”

“당근이지.”

청년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전 플레이어가 그렇게 계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잭 올란드의 경우를 보세요. 죽일 수도 있는데 죽이지 않았잖아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죽이든 죽이지 않든 상관없는 잔챙이였으니까 굳이 죽이지 않은 거다.”

여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인간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착하다는 보장이 있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그가 악한이라는 보장이 있어? 심리이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심리를 읽어라.”

“하지만 보세요. 잭이 죽고 난 다음 플레이어는 분명히 슬퍼했다고요!”

“네가 죽으면 나도 슬퍼할 거야.”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이어 그녀가 자신을 아낀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하고 청년이 얼굴을 붉혔다.

“에, 예에?”

“하지만 죽일 필요가 있으면 죽여.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가 미소 지었다.

“…….”

“성격은 다채로운 거다. 척 보기에는 사리에 맞지 않아 보여도 그 사람 내부에서는 완성되어 있어. 누구든 그렇지. 아후, 오랜만에 처웃었네. 동정심? 끄흐흐. 파리 새끼 간뎅이 붓는 소리하고 앉았네.”

여인이 다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래서 인간이 재밌다니까. 대체로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아주 가끔씩 생각지도 못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거든. 그걸 보고 배팅을 거는 거고. 감히 나한테 <던전 어택>의 시스템에 딴쭉을 걸길래 어느 정도 놈인가 했더니 생각 이상이네……야, 난이도 높일 수 있는 거는 전부 다 올려버려.”

“그, 부장님? 그렇지 않아도 루나틱 모드예요.”

“얘는 할 수 있어.”

그녀가 단언했다.

“내 눈은 틀림없어. 얘 물건이야.”

“그럼 적대적 관계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고, 이벤트도 너무 많이 일어나고. 뭐, 이미 만난 인물들과 호감도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또…….”

“까라면 깔 것이지 뭐 잔말이 많아? 요단강에서 샤워하게 해주랴?”

“하아. 알겠습니다.”

청년이 제자리로 돌아가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겼다. 난이도를 상향시키기 위해서.

그가 속으로 플레이어한테 사과했다. 미안, 네가 마음에 들어서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줄까 했는데 오히려 짐을 얹혀버렸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양해해달라…….

청년이 작업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여인이 책상에다 발을 올려놓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만화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자기만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는 생각에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또 또 만화책이에요? 그만 좀 읽으시죠.”

“난 지루할 때는 만화책을 읽어.”

“부장님은 맨날, 항상 만화책만 읽잖아요!”

“그러게.”

그뒤로 여인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릴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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