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발푸르기스의 밤 =========================================================================
정적.
마르바스가 피곤해하며 외알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바르바토스가 무도회장 한켠에 마련된 케이크를 포크로 집어 먹고 피식 웃었다. 여타의 마왕들이 고블린 늙은이가 연출해낸, 진귀한 광경에 말없이 감탄했다. 놀랍도록 멋진 콘서트 음악이 끝나고 나서 관중들이 잠시간 숨을 들이키듯이.
“아……아아……?”
파이몬은.
파이몬은 시체 곁에 주저앉았다.
“아……아, 아…….”
그녀가 드문드문 신음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망가진 스피커의 언저리에 남는 기계음같이.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녀에게 몰아닥쳤다. 동정심이나 애틋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본래 행운은 빠르게 가고 불운은 빠르지 오지 않는가.
나는 다만 토르켈이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자살해버린 바람에 꼬여버린 일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토르켈, 녀석은 언사가 교묘했다.
‘저와 단탈리안 전하는 작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정말로 있었던 일을 서술했다. 흑사병 건으로 인해 우리 둘이 만났다는 것, 라피스와 관련해서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는 것. 전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거짓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입에 담지 않음으로써 초장부터 마왕들의 신뢰를 확보했다.
일단 신뢰를 얻은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단탈리안 전하의 거부는 상인으로서의 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단탈리안 전하에게 감히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아무튼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에 대해 진술하다가 어느새 심리에 대해 묘사했다. 자존심의 상처라느니, 마음을 먹었다느니, 몽땅 심리적인 것이었다. 그래, 아마 토르켈은 진짜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수백 년을 살아온 상인이다. 자기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지 상관없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무엇을 느끼느냐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별개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입장을 밝히는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게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압권인 것은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라는 부분이었다. 도대체가 여러모로는 무엇이고 일종이란 또 무엇인가. 그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구체적인 단어에서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로 갈아탔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홀로 실행한 계략이었습니다. 소인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전하에게 원한을 품었고, 또한 단탈리안 전하에게 해를 가하기 위하여 행동했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고객인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파이몬 전하에게 누설한 것도 저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지능적이게도 홀로 '실행'했다고 말했다. 홀로 '계획'했다가 아니었다. 그야 행동하는 것은 한 명이 할 수 있다. 여러 명이 계획에 참여했어도 실행하는 자는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
토르켈의 수사학은 이러했다.
첫 번째,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자기가 진실한 것처럼 위장한다.
두 번째, 그리하여 심리를 서술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을 서술하는 것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느껴지게 만든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사실관계를 애매모호한 단어로 얼버무린다.
“……완벽하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능구렁이 상인은 그토록 짦은 시간을 활용해서 수십 명의 마왕을 완벽하게 속인 것이었다.
화룡점정은 자살이다. 자칫 추궁을 허용했다가는 자기가 애매모호하게 덮어놓은 진실이 폭로될 수 있으니 아예 추궁이 불가능하도록 죽어버렸다.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이라면 응당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서열 제9위의 마왕이 서열 제71위의 마왕에게 당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도 토르켈은 침착하게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일지 알아냈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쿤쿠스카 상회 전체의 실책은 자기 개인의 실책으로. 파이몬의 실수는 일개 상인이 기획한 계략으로.
이같은 둔갑술을 성공시킬 수 있으면 목숨 정도야 타당한 대가라고 계산한 것일까.
‘이것이 마계 최고의 상인 중 한 명.’
만일 내가 처음부터 상대해야 했던 자가 파이몬이 아니라 토르켈이었다면……결코 쉽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리라.
‘좋아.’
파이몬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고블린한테 경의를 표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된 게 아까웠지만, 고블린의 필사적인 계책에 이대로 넘어가주고 싶은 마음이 어디엔가 있었다. 쿤쿠스카 상회와 파이몬은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세력.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도 후환이 두렵겠지, 하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판결을 집행한다.”
마르바스가 저녁이라도 먹겠다는 어투로 말했다.
“서열 제9위, 파멸을 관장하는 마왕 파이몬이 요청했으며 서열 제5위, 지배를 관장하는 나 마르바스의 이름으로 승인한 이번 청문회에서는 두 가지 사안이 논의되었다.”
평탄한 목소리가 무도회장 구석까지 흘러들었다. 음이 낮은데도 마르바스의 말소리는 한마디한마디가 똑바로 들렸다. 그 와중에 파이몬은 여전히 멍하게 시체 주변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사안은 서열 제72위, 겁을 관장하는 마왕 안드로말리우스에 대한 것이다. 안드로말리우스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파이몬은 서열 제71위,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에게 삼백 년의 감금형을 청구했다.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는바.”
마르바스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여기서 단탈리안이 유죄라고 생각하는 자는 오른손을 들라.”
나는 굳이 고개를 돌리거나 해서 주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행동하면 남한테 얕보일 거라 생각했으므로. 확신을 품고 잠자코 기다렸다.
마르바스가 대략 십 초 정도를 기다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0표. 첫 번째 사안에 관하여 단탈리안의 무죄를 선언한다.”
기쁜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결과.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었다. 얼마나 압도적으로 승리하느냐가 문제였다.
투표 결과는 암묵적으로 나에 대한 지지도로 이어진다. 여기 있는 마왕들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갖느냐 안 갖느냐와 상관없이, 앞으로 혹시나 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할 자는 청문회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그자에게 나는 타 마왕들한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마왕으로 기억될 테니까.
마르바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두 번째 사안은 흑사병에 대한 것이다. 파이몬은 흑사병을 일으키고 퍼트린 장본인이 단탈리안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오른손을 들라.”
다시 십 초의 시간이 흘렀다.
마르바스가 입을 열었다.
“0표.”
내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최고다!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제부터 적어도 마왕들과 척을 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곳에 자리한 마왕은 물론이고 결석한 마왕 또한 그러했다.
서열 제71위가 서열 제9위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서열 제71위가 너무나도 잘나서 제9위가 쪽도 못 썼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럴 확률은 낮았다.
서열이 높은 마왕일수록 실력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크다. 그렇기에 자신과 서열이 비슷한, 혹은 자신보다 높은 파이몬이 패배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리라. 다른 마왕이 도와주었다든지.
그들은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고위 마왕 간의 신경전으로 해석할 게 분명하다. 청문회의 쉬는 시간에 바르바토스가 나한테 접근했다는 얘기라도 떠돌면 더할 나위 없다!
바르바토스는 그저 혹시 모를 보복에서 지켜주려는 의도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다른 마왕들 눈에도 그리 비추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들은 파이몬과 바르바토스가 옛날부터 철천치원수였다는 점을 기억해내고,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바르바토스가 암중에서 계획한 것 아닌가 의심할지 모른다…….
허허실실과 의심암귀의 묘략.
마왕들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나의 배후세력에 주의하는 동안, 나는 안심하고 던전을 발전시킨다.
휴양이나 즐길 속셈으로 온 니블헤임에서 뜻하지도 않게 좋은 방패를 얻었다. 전부 파이몬이 나댄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에게 없던 호감까지 생길 것 같았다. 농담이지만.
“…….”
파이몬이 초점 없는 눈으로 토르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낼 힘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 옆에서 진행자인 마르바스가 다소 냉정하게, 그러나 그에게 어울리는 태도로 판결을 마무리 지었다.
“두 번째 사안에 관하여 단탈리안의 무죄를 선언한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고개를 돌리니, 바르바토스가 작고 하얀 손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두세 명이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절반이 넘는 마왕이 박수를 쳤다.
나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사방을 향하여 한 번씩 허리를 숙였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무도회장 한가운데 놓인 시신과 그 곁에 주저앉은 여인, 그리고 인사하는 남자라는 구도에 묘한 구석이 있었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승리한 검투사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지금부터 파이몬이 치를 형벌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마르바스 전하. 그에 대해서는 제가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윤허한다.”
“감사합니다. 소인이 비록 억울한 모함을 당했으나 여러분께서도 보셨다시피, 파이몬 전하는 쿤쿠스카의 상인에게 속았을 따름입니다. 파이몬 전하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호오, 하고 마르바스가 흥미로운 기색을 보였다.
“그 말인즉슨.”
“예. 저는 청문회의 당사자로서 파이몬 전하에게 어떠한 형벌도 내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애당초 우리는 신성한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형벌이란 축제의 공기를 망칠 뿐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서 마왕들이 웅성웅성거렸다. 의외라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반대하거나 그러는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고변을 당한 내가 도리어 이렇게 나오는데 부외자가 뭐라 할 수 없었다. 저어기 구석에서 바르바토스 아가씨가 불만스러운 듯 입가를 비트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표시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괜찮은 듯싶었다.
「마왕 마르바스의 호감도가 12 오릅니다.」
‘예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걸 노렸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르바스 이 아저씨가 전통적인 행사를 꽤나 중요시 여긴다는 것은 충분히 알았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해봤자, 자기가 주도적으로 개최한 행사가 뜬금없이 청문회 때문에 망가지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청문회 중간중간에 그런 제스처를 드러내기도 했고.
자그마치 서열 제9위가 요구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행사는 열어야겠고……그런데 당사자인 내가 청문회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행사에 집중하자 제안했다. 마른 밭에 물 뿌려준 격이었다.
“좋다. 단탈리안의 의견을 받아들여 처벌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도 단탈리안 그대의 관대함에 감사하는 바이다.”
아니나 다를까, 낚싯밥을 물었다.
다른 사람 눈에 단탈리안은 더 이상 서열 제71위의 날파리가 아니라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 두 명의 고위급 마왕에게 비호 받는 인물로 비출 터이다. 내 생존 확률이 오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군 그래.
“허나, 아무리 파이몬에게 잘못이 없다한들 완전히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는 법.”
마르바스가 한결 경쾌해진 말투로 말했다.
“파이몬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단탈리안에게 사과하라.”
그때까지 인형처럼 가만히 있던 파이몬이 어깨를 움찔했다.
“사……과……?”
“그렇다.”
“…….”
파이몬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실패했다.
“거짓말……토르켈이 그럴 리가…….”
“그대 역시 고블린의 감정을 읽었을 터. 저것이 그대를 속였음에는 일고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소녀를……배신한 거예요?”
“아아.”
파이몬이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상태로는 그 정도 몸짓이 최선인 듯했다.
“……무, 죄?”
“예. 파이몬 전하.”
내가 말했다.
“저는 흑사병을 만들어낸 적도, 고의로 퍼트린 적도 없습니다.”
“…….”
파이몬이 일시정지했다.
잠깐인 것 같기도, 한참인 것 같기도 한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죄……합니…….”
지나치게 작은 목소리. 무슨 말인지는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연거푸 소리내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대리석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파이몬은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고, 힘없이 무도회장을 걸어나갔다. 도중에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한 늑대인간이 아마도 파이몬의 무도회 파트너이리라.
기묘한 침묵이 공기를 눌렀다.
마르바스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오늘 본제가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그 순간, 야트막한 어둠에 덮인 무도회장이 갑자기 밝아졌다. 천장에 무수하게 달린 샹들리에가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어디에선가 온갖 악기가 날아오더니 허공에 떠오른 채 저절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마왕들이 웃어댔다. 그들은 아까 전에 침묵한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파이몬의 궁색 맞은 사죄에 대하여 떠들었다. 고위 마왕이 보인 추태는 무도회의 분위기를 달아올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나 역시 긴장을 풀었다.
이바르에게 블러프로 협박한 것, 쿤쿠스카 상회의 과오를 응징하는 것, 마르바스와 바르바토스에게 조금 더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 등, 아직까지 꽤나 많은 일이 남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선택한 일은, 무도회장의 기둥에 서서 날 걱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라피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라피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어.”
“…….”
“기껏 파트너로 데려왔는데 벽에만 둬서 미안해. 봐줄 거지?”
라피스는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지만 그쯤이야 이제 눈 감고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다가도, 분노하다가도, 고민하다가도, 여하간 몇 초 사이에 수없이 감정을 바꾸더니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라피스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런 과장이 없었지만, 아무런 과장이 없었기에 아름다웠다. 지금 가볍게 감동하는 것은 틀림없이 나의 감정이겠지. 나는 한손으로 라피스의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쓰다듬었다.
그렇게 청문회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