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발푸르기스의 밤 =========================================================================
마르바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가 곧바로 참석할 수 있는가?”
“예. 토르켈은 무도회장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사와요. 부르면 언제라도……!”
“승락한다. 단, 오 분 이내로 증인이 출석하지 않을 경우 청문회는 폐한다. 그리고 본인의 임의대로 단탈리안이 승리했음을 선언하겠다.”
파이몬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무도회장 출구로 바삐 나갔다. 어디에선가 대기하고 있을 자신의 전담원을 찾으러. 마왕들은 수군거리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청문회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나는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멍청하기는.’
파이몬은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다. 생각해보자. 토르켈은 상인의 의무까지 저버리면서 파이몬에게 정보를 건네주었다. 요컨대 토르켈은 파이몬의 비밀 공작원이다.
정보를 제공해준 자가 '상회의 간부'라는 애매한 명칭에서 '토르켈'이라고 특징지어지면, 그 순간부터 상인의 의무를 어긴 것은 쿤쿠스카 상회 전체가 아니라 토르켈 개인이 되어버린다. 지금 그자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상인으로서 토르켈의 생명을 무참하게 끝장낸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종의 생존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자기 아군이 되어줄 마인 하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여인, 그것이 서열 제9위의 파이몬이었다.
<던전 어택>에서도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 용사가 위험에 처하자, 파이몬은 군세를 이끌고 나타나서 애써 다른 마왕이 정교하게 마련해둔 함정을 깨부수고 용사 일행을 탈출시켰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역시 파이몬! 희대의 순정녀!' 하고 환호하는 장면이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마인 입장에서 용사는 흑사병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악몽 덩어리이다. 일흔두 명의 마왕이 한 인간의 손에 죽어나가다니, 블랙 조크라기에는 적이 재앙스러운 일 아닌가.
주인공 일행이 서열 30위 권을 돌파하는 시기부터 게임 난이도가 가파르게 상승한다. 설정에 따르면 마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대대적으로 인간계를 침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열 제9위나 하는 파이몬이 몇몇 마왕과 함께 도리어 같은 편을 방해해버리니, 마인은 인간종보다 훨씬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뿔뿔이 세력이 나뉘어 그만 인간-아인종 연합에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결국 마인은 지상계에 거점을 상실하고 마계로 완전히 후퇴한다. 그리고 마왕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 통합과 평화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린 채 영원히 양육강식의 수레바퀴에 갇힌다.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자취를 감춘 아수라장에.
플레이어 입장에서 순정녀이고 뭐고.
‘매국노. 아니, 한술 더 떠서 매종노(賣種奴).’
서열 제8위 마왕 바르바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이몬은 창녀보다 더한 년이다.
차라리 쿤쿠스카 상회의 이바르처럼 정당한 이유가 있어 작심하여 마왕군에 배신 때린 것이라면 또 모른다. 파이몬은 그냥 인간이 재밌어서, 용사가 마음에 들어서 분탕질을 쳤다. 그래서 난 예전부터 파이몬이라는 캐릭터가 싫었다.
파이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솔직히 라피스한테 돌아가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진행자인 마르바스가 바로 옆에서 눈을 딱 감고 무게를 잡으면서 서 있는데 마음대로 행동하기가 껄쩍지근했다.
‘젠장. 하다못해 만지작거릴 물건이 있어야겠어.’
내일이라도 상점가에 가서 지팡이 같은 것을 사두어야겠다. 그렇게 뻘쭘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고맙게도 말상대가 저절로 나타났다.
“이봐, 너. 서열은 낮은 주제에 말빨은 꽤 되네.”
청문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줄기차게 파이몬한테 시비를 건 마왕 바르바토스였다. 빨간색 위주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에 걸어왔다. 외양은 어린데도 걸음걸이나 분위기가 어른스러워서 살짝 무언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송합니다. 바르바토스 전하.”
아무튼 서열로 따져서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파이몬과 대적하게 된 지금, 조금이라도 나에게 호의를 품어주는 고위 마왕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 됐어, 됐어. 나 그런 예의 딱 질색이야.”
그녀가 '에엑' 하고 입가를 비틀면서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마왕들은 패기가 없어! 예전에는 만나자마자 인사 대신 파이어볼부터 나눴는데. 도무지 친교하는 방법이라는 걸 모른다니까.”
……겉모습이 꼬맹이에 불과한 아가씨가 요즘 젊은이 운운하니 묘했다. 참고로 바르바토스도 팬층이 제법 두꺼운 캐릭터였다. 공략 팬사이트에서 SM 로리라나 뭐라나 찬양하는 글이 곧잘 올라오곤 했는데 솔직히 무슨 헛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즐겼어. 아아, 고 창녀 년이 분해하는 꼬라지란!”
“파이몬 전하와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아. 전하가 뭐야, 전하가?”
바르바토스의 조그맣고 옅은 눈썹이 찡그려졌다.
“새끼가 되도 않는 예의를 차려서는. 기둥에 머리라도 박았어? 야, 너 마왕 아니야?”
“맞습니다.”
“그래. 대답은 빠릿빠릿해서 좋네. 야, 너도 마왕이고 그 년도 마왕이야. 왜 같은 급수끼리 서로 존댓말을 써?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네가 그 년 신하야?”
“아닙니다.”
“그래, 아니잖아! 여기서도 전하 저기서도 전하 그러니까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에 온 건지 내 마왕성에 온 건지 도대체가 모르겠어.”
외관이 여린 소녀인데 말투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험상궂었다. 뭐라고 할까. 이렇게 표현하면 바르바토스의 외모와 정말 동떨어지지만……꼭 조폭 두목, 마피아 보스 같았다.
“앞으로 바르바토스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냥 반말 써, 애송이 새끼야. 지금 내가 네보다 나이 많다고 깔보는 거야? 경로우대 따위 엿이나 처먹으라지.”
“하핫.”
내가 재밌어서 웃었다. 게임 속에서도 태생부터 반골 기질인 캐릭터였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권위를 깨부숨으로써 오히려 자신만의 권위를 수립한다. 나는 권위를 깔아뭉갤 정도로 강하다, 라는 인상을 주변에 심어줌으로써.
바르바토스의 호감을 사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알겠어, 바르바토스. 나는 단탈리안이야.”
“헤에? 그렇다고 정말로 말 놓네?”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마주잡았다. 그녀는 하얀 손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면의 촉감이 부드럽게 나의 손안에 들어왔다.
“아무렴 서열 제8위의 발언을 헛소리로 들을까.”
“뭐?”
바르바토스가 꺄르르 웃었다. 존댓말을 쓰지 않는 편이 도리어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결과다, 라는 내 의도를 곧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거 애송이 자식, 정말 혓바닥에다 올리브 기름을 처발랐나.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파이몬 그 년의 뺨따귀에 쓴맛을 보여주지. 좋아. 내 이름은 바르바토스. 좋을 대로 부르라고, 애송이.”
악수에 힘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홀로그램이 떴다.
「마왕 바르바토스의 호감도가 5 오릅니다.」
그렇다. 바르바토스는 용감하고 솔직한 자를 좋아했다. 아무런 잡념 없이 올곧게 싸움을 걸어오는 용사 또한 바르바토스는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딱히 호의를 품는 데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 역시 로리콘들의 지지도와 별개로, 나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싫지 않았다. 가장 적극적으로 용사 일행에 맞서 싸운 마왕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사 일행을 곤경으로 몰아붙였다.
‘얼른 죽여라. 개 같은 자식.’
그녀는 최후마저 파이몬과 여러모로 대조되었다. 파이몬이 마지막 순간까지 입맞춤을 요구하며 용사한테 될 수 있는 한 짙은 인상을 남기려 했다면, 바르바토스는 화까지 내며 빨리 죽이라고 보챘다. 개 같은 자식, 하고 말하는 순간 게임화면에 일러스트가 뜨는데 놀랍게도 바르바토스는 시원하게 웃고 있다.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조폭 아가씨가 아니고 뭔가.
“잘 들어. 파이몬 걔가 재수없긴 해도 뒤끝 때문에 남 괴롭힐 년은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뒤끝 걱정하지 말고 확실하게 파이몬을 끝장내라는 소리겠지.”
“와아!”
바르바토스가 눈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마르바스의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영감탱이! 얘 봐! 말귀 겁나게 잘 알아듣는데.”
“……생각에 잠기고 있다. 방해하지 마라.”
“와 씨발, 이런 새끼가 왜 여태까지 고작 71위지? 그 눈치로 밥을 빌어먹고 살았어도 진즉에 40위는 됐겠다. 뭐하고 살았니? 영감탱이야. 댁이 좀 키워봐. 요즘 50위 권 애새끼들이 영 마뜩치 않다고 비온 날 영감탱이처럼 투덜거렸잖아.”
“마왕은 홀로 서는 존재여야 한다고 그대가 주장해왔을 터.”
마르바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방해하지 마라.”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쌍놈아. 정박아 같은 새끼들만 상대하다가 좀 싹수 있는 애송이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랬다. 무게 잡는 거 졸라게 좋아해요.”
아, 눈썹 또 꿈틀거렸다.
그래도 꿋꿋하게 눈을 감기는 감았다.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 대결을 펼치네, 이 사람.
“하여간 그래. 뒤는 걱정하지 말고 저질러. 만에 하나라도 창녀 년이 보복할라치면 내가 막아줄 테니까. 응? 알았지?”
“고마워.”
“얼씨구. 내가 네 좋으라고 이러는 줄 아냐? 재수떼기라곤 콧구멍에 쑤셔넣을래도 없는 창녀 년 물 좀 맥이려고 이러는 거지. 잘 해봐, 단탈리안인가 뭔가. 인격도 꽤나 안정되어 보이는 것이 너 잘하면 오래 살겠다.”
하고 바르바토스가 등을 휙 돌려 저편으로 걸어갔다. 올 때만큼이나 갈 때도 쿨했다.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완벽한 자기만족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녀가 다 가버리자 돌연 마르바스가 한숨을 쉬었다.
음, 대충 둘 사이에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겠다. 아까 전에 마르바스와 파이몬이 나눈 대화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이 양반은 전통을 무척 중시하는 듯했다. 그런 성격에 저기 바르바토스 같은 파천황은 독약이지.
“……슬슬 오 분이군.”
마르바스가 눈을 떴다.
세상에. 이제보니 눈을 감은 것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속으로 딱 정확하게 오 분을 센 모양이었다. 점점 더 이 양반의 성격이 손에 잡히듯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증인이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청문회는 폐해야 마땅하나.”
마르바스가 슬쩍 무도회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추었으므로 넘어가도록 한다.”
그 순간, 대리석 정문 아래로 두 인영이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파이몬. 나머지 한 명은 파이몬보다 한참 키가 작은 고블린 토르켈이었다. 토르켈은 무척 진중하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파이몬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자! 여기 이 자가 토르켈이에요.”
파이몬이 마치 이제 다 이겼다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무거나 이 자에게 물어보세요.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토르켈이 보장해줄 테니까요!”
“흠.”
마르바스가 고개를 이바르 쪽으로 향했다.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맞느냐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바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늙은 고블린이여, 그대는 이번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앞으로 나오라.”
“이렇게 전하 여러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토르켈이 무도회장 가운데로 나왔다. 그는 저번에 봤을 때처럼 자기 키보다 두 배는 큼직한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그 지팡이에 기대어서 사방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매우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흐음.’
나는 다소 궁금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토르켈이 상황을 역전시킬 것 같지가 않았다. 일단 내가 흑사병을 퍼트리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라고 해봤자 없는 일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세계 최고의 거짓말 탐지기들이 눈앞에 있는 곳에서.
그런데도 토르켈은 전장에 나선 기사처럼 가슴속에 용기를 품고 있었다. 이미 어떤 단호한 결정을 내린 듯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파이몬으로 인하여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번 사건의 책임이 쿤쿠스카 상회에서 토르켈 개인에게로 넘어갔다. 여기에 더해 쿤쿠스카의 또 다른 최고 간부인 이바르는 현재 내 협박에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토르켈로서는 상회의 조력도 얻지 못할 판국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토르켈이 할 수 있는 짓이 떠오르지 않았다. 판은 결정되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저 멍청한 파이몬을 포함하여 고작 몇 명에 불과하리라.
혹시라도 내가 모르는 비장의 수를 토르켈이 가진 것 아닌가 불안감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사회자인 마르바스를 협박해서 청문회를 강제로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문하겠다. 흑사병 발발의 장본인이 여기 단탈리안이라고 그대가 말했는가?”
“예, 소인이 그렇게 말했사옵니다.”
“어떠한 경위로 그렇게 말하였는가? 증거가 있다면 증거를 말해보아라.”
“예에.”
토르켈이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가 마르바스를 보고 또박또박 읊조렸다. 그 모습을 뒤편에서 파이몬이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가 충격으로 바뀌는 데엔 채 십 초가 걸리지 않았다.
“저는 틀림없이 단탈리안 전하가 흑사병을 일으켰다고, 파이몬 전하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새빨간 모함이었지요.”
“뭐, 뭐라고요!”
파이몬이 경악했다. 마르바스는 표정에 미동도 하지 않고 토르켈을 노려보았다. 아마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건 말건, 토르켈은 자기가 할 말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저와 단탈리안 전하는 작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전하가 흑사병에 효과가 있는 약제를 찾아내자, 저는 전하에게서 상품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전하에게 접근하여 이제부터는 제가 당신의 전담원이 되겠노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자신에겐 이미 전담원이 있다면서 저를 거부하셨지요.”
토르켈이 지팡이를 들어 무도회장 구석을 가리켰다.
“그 전담원이 바로 저기에 있는 소녀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하급 직원에 불과하지요. 저는 하급 직원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지독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래봬도 누 백 년을 헤쳐온 상인. 단탈리안 전하의 거부는 상인으로서의 제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토르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토르켈!”
파이몬은 이제 아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녀를 보세요! 어서! 당장 소녀를 보라고요!”
“……그래서 단탈리안 전하에게 감히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쿤쿠스카의 상인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일종의 보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이쯤에서 토르켈의 의중을 파악했다.
――무서운 녀석.
한번 이바르가 뭘 하고 있나 시선을 돌려봤다. 이바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빌어먹을! 방귀라도 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다 이거지.
“저는 파이몬 전하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탈리안이 인간을 싸그리 멸종시키려고 한다. 전무후무한 전염병을 만들어낸 것도 단탈리안이다. 마침 안드로말리우스 전하의 살해사건이 있으니 그걸 적극적으로 걸고 넘어지면 단탈리안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마르바스 전하. 소인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요?”
“으음.”
“감히 없으리라 사료하옵니다. 그야 당연합니다. 소인은 진실만을 말했기 때문이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홀로 실행한 계략이었습니다. 소인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전하에게 원한을 품었고, 또한 단탈리안 전하에게 해를 가하기 위하여 행동했습니다. 저희 쿤쿠스카 상회의 고객인 단탈리안 전하의 정보를 파이몬 전하에게 누설한 것도 저였습니다. 만일 파이몬 전하에게 죄가 있다면 단지 이 늙은이의 말을 신뢰해주신 죄밖에 없나이다. 이렇듯 모든 과오가 저에게 있는바, 지극히 미천하오나.”
손 쓸 틈도 없었다.
“제 목숨으로써 이번 일을 사죄드리고자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토르켈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자신의 목 정중앙을 찔렀다. 단검은 늙은 고블린의 얇은 목줄기를 너무나도 쉽게 꿰뚫었다. 검끝이 마치 가시처럼 목덜미로 튀어나왔다.
자그마한 고블린의 몸뚱어리가 서늘한 무도회장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