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발푸르기스의 밤 =========================================================================
“이쯤에서 청문회를 끝마쳐도 좋을 듯싶군.”
사회자인 마르바스가 말했다.
“청문회의 승패 여부는 전통에 따라 투표에 의해 정해진다. 진행자인 본인을 포함해서 파이몬과 단탈리안은 투표에서 제외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잠시만요!”
파이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르바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흠, 더 할 말이 남았는가?”
“소녀에겐 아직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 남았어요!”
“파이몬. ”
마르바스가 안경을 빼서 비단 손수건에 닦았다. 그는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비록 친우는 아닐지라도 수백 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대가 본인을 알고 있듯 본인 또한 그대를 아는바. 진행자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나, 본인의 감정을 토로하자면…….”
마르바스가 천천히 안경을 다시 썼다. 그가 파이몬을 슬쩍 노려보았다. 만사가 귀찮다는 눈초리였다.
“그대가 솔직하게 의도를 밝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녀는…….”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파이몬, 발푸르기스의 밤이야. 한때 모든 마왕이 의무인양 모였던 회합이 현재에 와서는 과거의 영광을 잃고 간신히 과반수나 만족시키고 있다. 본인이 누구인가? 서열 제5위의 마왕이다. 바알, 아가레스, 바싸고, 가미긴. 본인보다 서열이 높은 마왕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가.”
파이몬이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대가 누구보다 우리에게 헌신적임을……잘 알고 있어요.”
“회합에 참여하지 않은 마왕들이 우리를 비웃게 만들고 싶지 않다. 만일 그대가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라는 것이 시시하거나 가당치 않은 종류라면, 나는 독단적으로 청문회를 여기서 끝낼 심산이다.”
“소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세요. 제가 안드로말리우스의 사건을 진심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에 대해서는 그대와 단탈리안 그리고 이곳에 모인 모든 분께 사죄드려요.”
파이몬이 드레스 끄트머리를 잡고 동서남북으로 한 번씩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고위 마왕이 솔직하게 사과한 게 의외였는지, 마왕들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흠.”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의미였다. 파이몬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더 이상 미소를 짓거나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지한 자세로 날 직시했다. 괜히 여유로운 척을 하던 방금 전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드디어 본론이로군.’
1차전은 내가 이겼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승리할 수밖에. 안드로말리우스를 옹호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제부터 펼쳐질 2차전이 중요했다.
“소녀가 쿤쿠스카 상회를 상담원으로 두고 있음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와요. 소녀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쿤쿠스카 상회에서도 고위 간부가 전담원으로 배정되어 있지요. 그 간부한테서 얼마 전 놀라운 얘기를 들었답니다.”
설마했더니 역시, 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예상한 그대로 파이몬이 화제를 꺼냈다. 그녀가 마왕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얼마 전부터 대륙을 휩쓸고 있는 하나의 재앙에 대해 여러분도 익히 들어 아시겠지요. 검은 죽음, 그 가공스러운 저주가 인간, 아인종, 마인을 가리지 않고 숨결을 앗아가고 있사와요. 소녀의 충성스러운 부하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요.”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나타냈다.
이때쯤 흑사병은 본격적으로 대륙 전역에 퍼졌다. 유일하게 피해가 적은 지역이 사르데냐 왕국이었다. 의학 지식이 전수되어 남아 있는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초반에 감염지를 격리시키고 불태워버리는 등 적극 조치를 취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반면에 원래 세계의 중세와 같이 의학 지식이 왜곡되어 있는 여타 지역에서는 피해가 속출했다. 고양이가 감염원으로 여겨져서 때아닌 고양이 대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주 감염원은 고양이가 아니라 쥐였다. 즉 인간들은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몰살시킴으로써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을 되레 도와주었다.
블랙 허브가 치료제로써 각광받았으나, 한 뿌리에 몇 골드 가량이 나가는지라 웬만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민들은 영주에게 내년 추수량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돈을 빌렸다. 그나마 자기 농토를 갖기 못한 민초들은 돈을 구할 방도조차 없었다. 세계사적인 대재앙 속에서도 영주와 약제사 길드만 떼돈을 벌고 있었다.
마인은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강해서 인간종에 비해선 피해가 적었다. 그것도 인간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 인간계에서 상주하는 마왕들로서는 몬스터 부대의 피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들에게도 흑사병은 크나큰 관심사였다.
“불운 중 다행이라고 대재앙에도 특효약은 있었지요. 그런데 블랙 허브가 흑사병을 치료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냈는지 아시나요? 바로 여기 있는 단탈리안입니다.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저에게 알려준 사실이지요.”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애써 무표정을 연기했다.
“단탈리안은 어떻게 역사상 처음 발생한 전염병의 특효약을 그리도 금방 발견했을까요? 소녀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청문회에서 왜 그런 것을 공론화시키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약초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발병했을 때 이런저런 약초를 잡다하게 써봤지요. 그중에 블랙 허브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소녀가 들은 것과는 이야기가 꽤나 다른걸요.”
파이몬이 내 쪽을 지긋이 바라봤다.
“제가 들은바에 따르면 당신은 흑사병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블랙 허브를 비축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흑사병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확하게 짚었다지요.”
마왕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파이몬이 부채의 끝으로 날 가리켰다.
“즉, 단탈리안. 당신은 흑사병이 언제 퍼질지 알았을뿐더러, 우연치 않게도 흑사병의 특효약이 무엇인지도 알았어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탈리안, 당신이 바로 흑사병을 퍼트린 장본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얘기예요!”
“…….”
하, 웃기는군.
내가 힐끗 무도회장 가운데에서 살짝 왼편으로 떨어진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 쿤쿠스카 최고 간부, 이바르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이 무척 험악해졌다.
당연했다. 고객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지키는 것은 상인의 기본 중 기본. 파이몬은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한테서 정보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달리 말해, 쿤쿠스카 상회에서 고객 정보를 마음대로 빼돌렸다고 말한 셈이었다. 망신살도 이런 망신살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바르가 의심스러웠다.
‘저 표정이 연기인지 아닌지…….’
내가 예측한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쿤쿠스카 상회와 나는 안드로말리우스 사건으로 인해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내가 행했다. 상회에서 마왕의 죽음을 방관했음을 폭로할 수도 있다고 협박한 것이었다.
그러자 상회에서는 자신의 세력에 동조하는 유력가의 딸을 내 애첩으로 들이라고 제안했다. 나를 아예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협박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이 제안을 나는 거부했다. 다만 상회 직원인 라피스를 파트너로 대동함으로써 '너희와 척을 질 생각은 없다'라고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그런데 쿤쿠스카 상회 입장에서는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협박의 위험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이에 마왕들 중에서 친인간주의를 표방하는 마왕 파이몬에게 접근했다. 다름아니라 나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상회 쪽에서 파이몬한테 파견한 인물은 토르켈.
그 늙은 고블린은 나와 껄끄러운 사이였다. 아마 기꺼이 날 곤궁에 처하게 만들었겠지. 친인간주의인 파이몬으로서 흑사병은 인간들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중대 사태였고, 당연히 돌림병을 퍼트린 장본인한테 적대심을 품었다.
쿤쿠스카 상회는 토르켈을 통하여 파이몬을 부추겼다. 마침 안드로말리우스라는 껀수도 있겠다, 나한테 한번 쓴맛을 보여주겠다는 의도이리라.
나는 조용히 분노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이딴 짓거리를 벌인단 말인가? 설령 이바르 본인이 정보를 팔아넘기지 않았을지라도 쿤쿠스카 상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네놈이 장본인이든 아니든 이번 일은 톡톡히 대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바르.’
물론 지금 나에겐 대가를 치르게 만들 힘이 없었다. 설령 청문회에서 승리할지라도 약간의 보상을 받아내는 게 전부겠지. 그러나 먼 훗날까지도 나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도회장이 떠들썩했다. 파이몬의 폭로에 마왕들이 난리쳤다. 그게 진실이냐면서 나한테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진행자인 마르바스만이 한결같이 심드렁한 눈동자를 유지했다.
“파이몬, 이 자리에 유언비어는 어울리지 않음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소녀는 공언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흑사병을 예언했음을 어찌 일개 쿤쿠스카 상회의 간부가 알 수 있는가?”
“단탈리안도 저와 마찬가지로 쿤쿠스카 상회를 조력자로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단탈리안은 쿤쿠스카 상회를 통해서 블랙 허브를 모았고, 그로써 이만 골드에 달하는 이득을 챙겼사와요.”
“이바르.”
마르바스가 이바르를 불렀다.
“사실인가?”
“……송구하옵니다만, 마르바스 전하. 저희 상회에서는 고객의 정보를 결코 유출하지 않사옵니다.”
“사실이로군.”
마르바스 역시 마왕,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쉽게 읽어낸 모양이었다. 나는 문득 이바르가 가능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마왕이 감정을 읽어낼 테니, 입으로만 상인의 의무이니 뭐니 떠들어댄 것 아니냐는 말이다.
마르바스가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았다. 탁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또렷한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했다.
“단탈리안. 사실인가?”
“…….”
“참고로 말하자면 그대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 또한 있다. 청문회에서 마왕은 서열에 상관없이 동등하다. 그대가 파이몬의 질문에 반드시 응답해야 하는 의무는 없다.”
내가 그를 마주보았다. 무도회장은 다시금 조용해져서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지금 여기서 대답하길 거부한다면 청문회는 흐지부지 끝날 것이고, 나에 대한 의심과 오해만이 남을 것이다. 그것이 쿤쿠스카 상회와 파이몬이 노리는 바이다. 상대편에 끌려다니는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초강수를 두기로 했다.
“전하. 그 전에 저도 이바르에게 한 가지를 하문해도 좋겠습니까?”
“허락한다.”
“제가 여쭐 것은 다소 비밀을 요하는 일입니다. 이바르에게 귓속말로 대화할 수 있도록 허해주십시오.”
“그 역시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이바르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가 대뜸 사과부터 건냈다.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 측에서 누군가가 대죄를 저지른 듯합니다.”
“초면인데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무척 안타깝소.”
“반드시 범인을 색출하여 처단하겠습니다.”
“그렇소?”
범인이야 뻔히 정해져 있는데 발뺌하기는.
“그거 참 안심이오외다. 헌데, 내 이바르 상주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피식 웃고 허리를 숙였다.
이바르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그대의 본체는 잘 있는가 모르겠구려.”
“……!?”
경악이.
생생하게 경악이 전달되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금발이 무척 아름답더군. 알아서 잘 처신하시오.”
딱 그것만 말하고 내가 허리를 들었다.
눈동자에 비춘 이바르의 모습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내가 이 자의 정체를 모를 리 없었다. <던전 어택>에서 마왕을 배신하고 용사 측으로 돌아선, 유일무이한 마족이 바로 이 작자였으니까.
이바르는 옛날에 한 마왕을 진심으로 섬겼으나 그 마왕이 자신을 한낱 도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 대륙의 모든 마왕을 증오하기에 이른다. 특기인 인형술과 강신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분신을 여럿 만들어내고 진짜 진심, 마왕에 대한 역심을 마지막까지 숨기는 데 성공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마왕군을 배반해서 주인공인 용사가 승리를 거두는 것에 크게 일조하지.
처음에 이 노신사가 이바르라는 걸 알고 놀란 까닭이 여기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점잖은 할아버지가 아니라――외양으로 보면 갓 열 두살은 되었을까 싶은, 완전히 꼬맹이 여자애 캐릭터거든.
무얼 숨기랴. 나는 녀석의 전용 시나리오와 전용 엔딩까지 다 봤다. 이바르의 본체가 모스크바 왕국의 설원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어딘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지금 이바르가 그런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어째서인지 최하위 마왕이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 마왕은, 일찍이 전염병을 예측한 적도 있다.
단언컨대 이바르 입장에서 지금 내가 무시무시한 대마왕으로 비출 게 틀림없다. 내가 한 말도 너의 본체를 당장에라도 없앨 수 있노라는 협박으로 들렸을 거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몇몇 마왕의 볼멘소리가 무도회장에 울렸다. 흑사병의 진범이 밝혀질지도 모르는 순간에 침묵이 이어지고 있으니 답답하리라.
마침내 이바르가 입을 열었다.
“파이몬 전하의 말씀은 거짓입니다.”
파이몬이 충격에 의해 그 여린 입술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이바르의 말은 곧바로 무도회장에 폭탄을 터트렸다.
“저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박쥐 새끼,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가!”
마왕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외쳐대며 소란을 일으켰다. 개중에 당장 이바르한테 달려들 기세로 욕지거리를 퍼붓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바르는 눈을 감은 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난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손을 들어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흠.”
마르바스가 오른발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 쿠웅.
무도회장 전체가 흔들렸다.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마왕들이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방금 그것이 마르바스가 건낸 경고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들이 멍청하진 않았다. 서열 제5위의 마왕은 여기 모인 마왕 절반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정숙. 앞으로 진행자인 본인이 허락하지 않은 자가 떠드는 것을 금한다.”
마르바스가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쿤쿠스카의 상주여. 그대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전하. 송구하오나 저는 무도회장에 들어선 이후로 단 한 마디도 거짓이라곤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에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저 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사와요, 마르바스.”
“파이몬 전하. 마왕의 능력은 가히 대단하나 그렇다고 감정을 속속들이 구분하여 파악할 수는 없는 걸로 아옵니다. 단탈리안 전하가 흑사병을 대비하여 블랙 허브를 사들인 것은 맞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흑사병을 퍼트렸다니……소인으로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마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만한 업적을 달성하겠나이까.”
마르바스가 생각에 잠긴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바르가 금방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느껴서겠지.
내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바르는 말을 묘하게 꼬았다. '그렇다고 흑사병을 퍼트렸다니, 소인으로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매우 어중지간했다. 당연히 이바르로서도 내가 흑사병을 퍼트렸다고 의심을 할 뿐이지, 실제로 내가 퍼트린 장면 따위는 목격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알지 못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마왕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능력을 신뢰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면서. 바로 그 점을 파고들어서 이바르는 마왕의 의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제법이었다.
마르바스가 침음을 뱉어내듯 말했다.
“이바르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소녀는 분명 그렇게 들었사와요.”
파이몬이 말했다.
“증인을 요청합니다. 쿤쿠스카 상회의 최고 간부인 토르켈을 증인으로 요청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