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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0화 (40/510)

00040 발푸르기스의 밤  =========================================================================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목소리가 앵앵거리는 여자가 대놓고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삼백 년은 말도 안 된다는 얘기였다. 소란 속에서 파이몬은 할 말 전부 했다는 자세로 잠자코 눈을 감았다.

나같은 하위 마왕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면을 무척 중시한다는 게 느껴졌다. 본인이야 제법 쿨한 태도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도, 내 감상을 말하자면 그저 재수없었다.

“조용. 조용하라.”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손을 저으며 소란을 잠재웠다. 무도회장이 잠잠해졌다.

“파이몬. 그대가 할 말은 끝났는가?”

“예, 소녀는 더 이상 부연할 것이 없사와요.”

“그렇다면 단탈리안측의 반론을 들어보겠다. 단탈리안은 파이몬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고,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대답할 권리가 있다.”

좋아, 하고 내가 숨을 들이쉬었다.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이라, 변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 상태를 살펴봤다. 이곳 마왕들이 가지고 있을, 정체 모를 패시브 스킬들 때문에 능력치가 큰 폭으로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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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 단탈리안

종족: 마왕   소속: 단탈리안 마왕군

속성: 중립(-10)

레벨: 4    악명: 253

직업: 던전운영자(F), 마왕(F)

통솔: 15/15  무력: 5/5   지력: 20(-5)/25

정치: 13/15  매력: 5(-5)/10  기술: 4/10

*칭호: 칭호가 없습니다.

*능력: 전술(F), 사격술(F), 채광술(F)

*스킬: 연기

[업적: 0개]

[부하: 42개체/50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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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능력치. 그래도 라피스의 말없는 응원에 마음이 편했다. 지금도 내게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 중에 자그맣지만 또렷하게 날 걱정하는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리고――잘센 마을 모험대가 쳐들어왔을 때는 이보다도 상황이 안 좋았다!

지금도 바닥인 능력치가 그때는 땅을 뚫고 지하 암반수를 퍼낼 지경이었다. 막 이 세계에 떨어진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력으로 정보를 모아야만 했다. 익숙치도 않은 연기를 펼쳐가며 생존을 갈구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나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충분히 알고 있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다. 파이몬은 수십수백 번 동안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맞닥뜨린 보스 중 한 명이다.

당신이 어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눈에 빤하다 이 말이다.

“단탈리안은 질문하라.”

마르바스가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약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주변을 향해 말했다.

“먼저, 저로서는 무척 난감하다는 사실을 밝혀야겠습니다. 첫 번째로 지금 여기 계시는 파이몬 전하께서 저 따위보다 훨씬 더 고귀하시고 강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콧방구 소리가 들렸다. 아마 회합 초반부터 사사건건 파이몬과 대립하던 제8위의 바르바토스이리라. 내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로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 전하께서 이토록 신경 쓰실 만큼 품격 높은 인물이었는지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파이몬 전하의 위상과 안드로말리우스의 인격 사이에는 도무지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저는 지금까지 정말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파이몬 전하께서 그 간극을 뛰어넘어, 다른 마왕도 아니고 하필이면 안드로말리우스, 우리 일흔두 명의 동지 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차마 동지라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자를 옹호하시니……저로서는 파이몬 전하의 행동에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싸해졌다. 여전히 입가가 올라가 있었으나 눈빛이 차가웠다. 마계 최강의 무표정 소녀인 라피스를 만날 보고 지내온 나에게 이 정도 표정쯤이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내가 거의 직접적으로 자기의 명성을 모욕했음을 그녀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소녀는 그 점에 대해 분명히 말했사와요. 마왕은 마왕이란 이유만으로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고요.”

“그렇습니까?”

내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정말로 그렇다는 말입니까? 파이몬 님. 설마 진심으로 그리 믿고 계십니까?”

“예, 진심이랍니다. 혹시 소녀가 실없이 공언했다고 생각하는지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전 파이몬 님을 모욕할 의도가 눈꼽만큼도 없어요. 파이몬 님께서 실언하실 일이 전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놀란 것입니다.”

하고 내가 육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자아. 그렇다면 제게 주어진 권리대로 파이몬 님께 감히 질문하겠습니다. 파이몬 님. 마왕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다소 모호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다시 물어보죠. 마계에 있어 우리 마왕의 존재의의는 무엇입니까?”

“소녀를 지금 무시하는 건가요? 그야 당연히 마인을 인도하고 통합하여 지상계로 이끄는 것이와요.”

“훌륭한 대답입니다. 무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파이몬 님께서 약간의 수고를 마다하시어 몇 가지 질문에만 대답해주시면 더없이 영광이겠습니다.”

내가 두 손바닥을 내보이고 살갑게 미소 지었다.

“파이몬 님. 마왕은 마인을 인도하고 통합하여 지상계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인을 인도하거나 통합하지 않고, 지상계로 이끌지 않는다면 마왕으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이겠군요?”

“그래요.”

“사실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거짓말이었다. 마왕의 직분이 뭔지 알게 무엇인가. 내가 잘 살아남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거짓말하는 데엔 돈이 들지 않았다.

“마계에 있어 마왕의 존재의의란 사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실례합니다만, 마계의 지옥을 다스리는 대공들에 비하자면 마왕 중에는 도리어 세력이 약한 분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작과 대공보다 윗줄인 제왕으로 대접받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실로 파이몬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내가 고개를 주위로 돌렸다.

“강자존(强者存)이 법도이고 이기심이 진리인 마계에서 오직 우리 마왕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위하고 또 타인을 이끌 수 있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만 마인이 기꺼이 고개를 숙입니다. 지옥의 대공이 제아무리 수십 군단을 이끈다 할지라도 그들 중 누가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자신밖에 모르는 이 아귀 소굴에서 마왕은 마인들에게 유일한 희망으로 오롯이 빛납니다.”

절대적인 상징.

마인이 현실적으로는 피 튀기는 싸움을 수천 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가 될 날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증거. 그것이 <던전 어택>의 마왕이다.

“자아. 그런데 여기 한 마왕이 있습니다. 그는 마인을 통합하지도 이끌지도 않습니다. 수백의 고블린을 그냥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애당초 인간계에 머물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유흥과 쾌락을 위해 마계에서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사치에 들어가는 유흥비가 고블린들의 피와 땀에서 나왔음은 물론이지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그자는 그러한 상징과 희망을 배신했다.

“이 자가 과연 마왕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잠깐의 휴지(休止)를 두고 입을 열었다.

“이 자가 과연 우리의 동지라 할 수 있습니까?”

무도회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나는 여태까지 이런저런 몸짓을 동원하던 것과 정반대로, 무척 진중하고 느릿느릿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여러분. 저는 오히려 감히 여러분을 성토하고 싶습니다. 한낱 대공보다 못한 우리가 누구보다 존귀한 대접을 받은 까닭은 우리가 마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왕이기를 포기한 자가 생겨났습니다. 그자를 방치하고 용납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이대로 가다가는 기세에서 밀릴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파이몬이 말에 끼어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천박할지라도 세상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오, 파이몬 전하.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흔두 명의 마왕이란 말입니까?”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언제부터 마왕이 마왕을 위해서 마왕이었습니까? 언제부터 마왕이 마인을 위하기를 그만두고 그들만의 계급을 만든 것입니까?”

“…….”

“우리는 외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타인도 자아도 불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함께' 있다는 감정 또한 느끼기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나와 타인이란 단순히 덩어리에 가깝지요. 좋습니다. 우리는 외롭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마왕은 무조건 살려두어야 합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파이몬.

내 첫 번째 질문에 대답했을 때부터 너는 끝장났다. 마왕의 직분이 마인을 이끄는 것이라고, 지극히 교과서에 가까운 답안지를 제출하면 안 되었다. 차라리 낯짝을 두껍게 회칠하고 마왕의 직분 따위는 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것은 이기심입니다! 파이몬 전하께선 너무나도 명백한 모순을 저질렀습니다. 전하께선 마치 안드로말리우스를 위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다는 듯한 어투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지 자신의 외로움을 피하기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낯짝이 두껍지 못한 네 성격이 패배의 원인이다.

“안드로말리우스는 두 가지의 대죄를 범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울분이라도 토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첫 번째, 그는 마왕의 직분을 어겼다. 명분을 잃는 이상 마왕은 모든 마인의 위에 군림할 자격을 잃게 된다. 고로 그는 마왕이 아니다.

두 번째, 그는 마왕 전체에 대한 마인들의 기대와 희망을 적잖게 훼손했다. 우리가 훗날 대의를 도모하기 위해 마인들에게 호소해도 일부 마인들은 안드로말리우스의 예를 떠올리며 우릴 의심할 것이다. 이것이 마왕 전체에게 해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는 안드로말리우스를 멈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슨 부끄러운 짓입니까. 마왕들 스스로 마왕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서열 제9위나 되시는 분께서 마왕과 정반대되는 가치, 이기심을 옹호하다니!”

“……읏.”

“저는 이 자리에서 요구합니다.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는 마왕이라는 이름을 명분상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더럽힌바, 오로지 죽음만이 그에게 어울리는 대가입니다. 또한 더불어서 요구합니다. 스스로 위엄을 지켜야 마땅한 고위 마왕이 자신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동한바, 마왕 파이몬으로 하여금 니블헤임 시민 전체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이제 파이몬은 입가의 미소조차 유지하지 않았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이쪽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녀와 내가 시선을 부닥치는 와중에 주위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조용한 침묵이 아니라 흥분에 찬 침묵이었다. 양쪽이 서로에게 죄를 추궁하고 있으니 결론이 어떻게 나든 구경꾼들 입장에선 그만큼 재미난 일이 없었다.

그때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꺄하하! 쟤 말이 맞네, 저 애송이 말이 맞아. 저 창녀 년은 평소에도 마왕은 모름지기 격이 높아야 한다느니 뭐니 떠벌리고 다녔잖아.”

내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로만 듣던 바르바토스를 눈으로 보았다. 게임에서 나온 것과 똑같이 바르바토스는 키가 작은 소녀였다. 붉은색이 도드라지고 프릴이 잔뜩 장식된 드레스를 입었는데, 꼭 인형놀이에 등장하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

“평생토록 지가 해온 말을 여기서 부정해버리면 저 년 꼬라지만 나빠지니 이거 영락없이 마인 찌그래기들한테 사과해야겠어. 꺄르륵, 그거 참 꿀맛이네!”

“바르바토스.”

진행자 역할을 맡은 마르바스가 그녀를 흘겼다.

“부외자는 허락없이 문답에 끼어들지 마라.”

“하, 문답은 끝났는걸. 더 볼 것이 있나? 창녀 년, 냉큼 도시로 달려가서 그 풍만한 엉덩이를 바닥에 깔아뭉개고 사죄해버려. 혹시 몰라? 색에 굶주린 부랑자 새끼들이 친히 육봉을 박아줌으로써 네 죄를 사해줄지?”

“바르바토스!”

마르바스의 음색이 거새졌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면서 여린 입술을 닫았다. 도가 지나친 빈정거림이었지만, 파이몬은 바르바토스 쪽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해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

나도 지지 않고 마주보았다. 내가 삼백 년 동안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서 감금될 것이냐, 댁이 자기 권위를 짓밟아가며 시민들에게 사과할 것이냐, 이제 양자택일이다. 기세싸움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다. 가만히 있는 나를 당신이 건드렸다. 만약 이렇게 공적인 장소에서 청문회씩이나 열어가며 날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나도 굳이 강자인 당신에게 적대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눈 좀 깔아라.’

게임에서 나한테 열두 번 넘게 썰린 년 주제에.

난 댁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왕을 죄다 싸그리 죽여본 적 있는 플레이어란 말이다, 인간성애자 쩌리 마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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