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화 (39/510)

00039 발푸르기스의 밤  =========================================================================

“…….”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 하면, 뭐라도 만지작거릴 물건이 손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사건을 이리 걸고 넘어질 줄은 몰랐다. 마왕이 동족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저 창녀 또 헌소리 하고 앉았네. 청문회라니 그딴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서열 제10위부터 청문회를 요구할 권리가 있기는 하다.”

“에? 진짜로?”

“실제로 쓰인 것은 벌써 오백 년이 훌쩍 넘은 듯하다마는. 파이몬, 고작 부랑자 새끼가 하나 죽은 것 갖고 일을 크게…….”

마왕들끼리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생각. 생각을 하자.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저들이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어떻게든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몇몇 마왕이 청문회에 반대하는 까닭은 내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파이몬이 싫어서이다. 그들이 나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어린애처럼 유치한 말투를 써가면서 앵앵거리는 여자는 아마도 서열 제8위의 마왕 바르바토스, 진중하게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남자는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 저마다 <던전 어택>에서 한가닥하는 양반들이다. 제9위의 파이몬이 인간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마족 세력을 대표하고, 제8위의 바르바토스는 무조건 인간에게 적대적인 축에 속한다. 제5위의 마르바스는 중립이다. 성향 간의 차이가 여기서도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째서 초면에 불과한 나를 파이몬이 공격하는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기랄, 지력 능력치가 떨어진 탓인지 평소보다 머리 회전이 느렸다. 나는 얼굴에 있는 주름이란 주름은 죄다 구겨 가면서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의 계파에 속했는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지금 청문회 어쩌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 계파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제스처를 표하기 위해서?

‘게임에서 파이몬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만한 위인이었나?’

내 머릿속에서 '아니다'라고 대답이 나왔다.

파이몬은 능글거리는 어투답게 변태적인 캐릭터이다. 인간으로 분장하고 인간의 도시로 가서 남녀를 헌팅하는 게 취미일 정도로. 게임 시나리오상 파이몬과 주인공이 처음 맞닥뜨리는 곳도 인간의 도시인데, 놀랍게도 주인공에게 추파를 던졌다가 그만 마왕이란 사실이 발각되고 만다.

이후 파이몬은 제 미모에 넘어가지 않은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라는 컨셉으로 끈질기게 주인공한테 들러붙는다. 그 들러붙는다는 의미가 통상적이진 않고 쉴 새 없이 몬스터 군단을 보내온다는 것이지만.

─ 죽는 순간인데, 소녀에게 입맞춤 정도는 하사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용사에게 들이대기를 멈추지 않는다. 용사는 허둥지둥 고민하다가 결국 여인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못 이겨서 파이몬한테 키스한다. 그것이 주인공의 첫키스이다. 주인공을 둘러싼 수십 명의 하렘에서 역설적으로 마왕이 먼저 첫키스를 따낸 것.

언젠가 플레이어들이 과연 파이몬이 희대의 순정녀인가 혹은 단순한 걸레인가 열띠게 논쟁한 적도 있었는데, 아무튼 간에 역대 히로인 인기투표에서 단 한 번도 10위권 바깥으로 퉁겨나가지 않았으며, 라우라 데 파르네세와 더불어 공략 가능 캐릭터로 만들어달라고 주기적으로 요구가 이루어지곤 했다.

참고로 나는 파이몬을 싫어했다. 그녀 때문에 게임오버를 두 번이나 당했거든. 다른 마왕에게 패배할 시 죽임을 당하는데 파이몬한테 패배하면 그녀의 성노예가 된다는 점이 색달랐지.

‘파이몬은 변태이지만 행동 원리가 간단하다.’

요컨대 친인간주의.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을 따라하고, 인간을 보호하려 한다. 마족과 인간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내달릴 때도 파이몬만큼은 소수의 마왕과 함께 무분별한 학살을 자제했다.

인간이 멸망하면 자기가 즐길 거리가 사라진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마왕 된 자로서 학살을 즐기면 위엄이 사라진다'라고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다른 사람에겐 자기가 마치 권위나 품격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행동하는 여인. 여하간 특이한 마왕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안드로말리우스는 대표적으로 인간을 벌레로 취급하는 놈.’

나는 판단했다. 안드로말리우스가 파이몬의 계파에 속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따라서 파이몬이 청문회를 열자고 제안한 것도 사실은 안드로말리우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인 게 분명했다. 즉――목표는 안드로말리우스가 아니라 바로 나이다.

어째서?

‘내가 파이몬에게 적대적인 짓을 했나? 그럴 리 없는데.’

애당초 다른 마왕과 조우한 것 자체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바에 따르자면 안드로말리우스는 현재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파이몬과 내가 직접적으로 얽혀들 일은 아예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모르니까 마치 심해의 가오리처럼 어두컴컴한 바다 밑바닥을 헤엄치며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제기랄, 대체 어디에서…….’

그때였다. 작은 무언가가 살그머니 내 오른손을 감쌌다.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라피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투명하지만 단단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에 놀라운 일을 겪었다. 일생에 많아봤자 대여섯 번 정도밖에 일어나지 않을 그런 일 말이다. 당신이 지금 무슨 심정인지 아무런 과장도 축소도 없이, 당신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당신을 이해하고, 바로 그 까닭에 나로서는 당신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노라고, 두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말도 표정도 제스처도 없이 라피스는 그렇게 웅변했다. 말이 없기에 오해가 없었고, 표정이 없기에 감정의 과다가 없었으며, 제스처가 없기에 오직 진심만이 자리했다.

일순 조급한 마음이 사라졌다.

한없이 부드러운 마음이 대신 생겨났다. 그것은 겉과 속이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상대방, 그것도 나에게 호의적인 상대방을 만났을 때 생겨나는 일종의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마왕의 능력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만 있게 하지 않았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일치시킬 수도 있었다.

“…….”

라피스와 내가 잠시간 마주보았다. 그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문득 파이몬의 성향이니 무엇이니 하는 생각이 갑자기 우습게 여겨졌다. 지금까지 한 생각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위쪽에서 그 생각을 관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 파이몬이 날 적대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미소 지었다. 당연했다. 내가 여태껏 누군가의 눈에 띌 만하게 행동한 적이 딱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의 행동과 파이몬이 가진 성향을 연결시킨다면, 왜 안드로말리우스를 명목으로 내세워 날 압박하려 드는지 쉽게 이해되었다.

마왕들 사이에서 벌어진 설전도 슬슬 정리되고 있었다. 서열 제5위의 마왕 마르바스가 예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중에서 서열이 제일 높은 것은 나다. 내가 청문회의 진행을 맡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서열이 낮은 이가 진행자가 되면 어떤 사고가 연출될지 걱정스럽군.”

그가 쿤쿠스카 상회의 이바르를 힐끗 쳐다봤다. 이바르가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본래 사회자는 이바르였다. 그가 마왕들의 소란을 전혀 무마시키지 못했던 것을 마르바스는 힐책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마 쿤쿠스카 상회에선 일부러 사태를 방관했어.’

내가 조용히 라피스에게 물었다.

“파이몬도 쿤쿠스카 상회에서 담당하지?”

“예. 상회 최고 간부 중 하나인 토르켈이 전담자입니다. 단탈리안 님도 한번 본 적 있는 인물이지요.”

“그 늙은이 고블린이로군.”

한 달 조금 전, 전염병에 대해 논의할 게 있느니 뭐니 불쑥 찾아온 고블린이 있었다. 그 녀석이 파이몬의 전담자라 이 말이지. 라피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얘기 나눌 생각이 없다고 문전박대했더니 이딴 식으로 보복해올 줄이야.

마르바스가 무도회장 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서열 제9위, 파멸을 관장하는 마왕 파이몬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는 서열 제5위, 지배를 관장하는 나 마르바스의 이름으로 승인된 것이다. 대상은 서열 제71위, 이면(裏面)의 마왕 단탈리안.”

그가 나를 보았다. 나 역시 그곳으로 나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라피스의 손을 놓았고, 약간 긴장하면서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등 뒤에서 라피스가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라피스.

‘게임 속의 NPC 따위에게 발릴 정도로 무성의하게 게임을 한 적 없다.’

마르바스를 사이에 두고 파이몬과 내가 마주섰다. 파이몬이 변태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날 꼬아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이쪽도 미소로 응대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질문할 권리가 있고, 단탈리안은 파이몬에게 대답할 권리가 있다. 발푸르기스의 밤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청문회는 길게 이어지지 않도록 하겠다. 고로 양측에선 되도록 긴 연설보다 짧은 즉문즉답의 형태로 청문회에 임해주길 바란다. 둘 중 누구의 의견이 옳은지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겠다.”

무도회장 이곳저곳에 널려 있던 마왕들이 천천히 몰려왔다. 복싱을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와서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먼저 청문회를 요청한 파이몬에게 질문의 권리를 부여한다. 파이몬은 질문하라.”

“소녀의 요구를 들어주어 감사하와요.”

파이몬이 주위에 눈웃음을 쳤다. 어느 때건 교태를 부리는 게 그녀의 버릇인 것 같았다. 내 오른쪽 방향에서 '어휴, 창녀 년' 하고 서열 제8위의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회합이 시작하고 나서 큰소리로 말한 마왕은 모두 서열 제10위 안에 드는 이들뿐이었다. 그보다 서열이 낮은 마왕들은 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이란 의미겠지, 내 눈앞에 계신 파이몬께서도.

“우선 사실관계부터 확인하고 싶사와요.”

파이몬의 미소가 날 향했다. 눈웃음 속에 적의가 넘실거리는 것이 빤히 보였다.

“단탈리안, 당신은 아흐레 전에 서열 제72위, 마왕 안드로말리우스를 살해했습니다. 맞나요?”

“맞습니다.”

내가 덤덤하게 수긍했다.

“당신은 상대방이 마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해했습니다. 그렇지요?”

“그것도 맞습니다.”

“즉 당신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마왕을 살해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마왕임에도 불구하고요.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하신 여러분, 세상의 그 누구보다 우리는 잘 알고 있사와요. 마왕이란 빌어먹을 직업이란 사실을 말이지요.”

파이몬이 돌연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 와서 사람의 인격이 하나라느니 하는 논쟁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사와요. 그래도 이건 확실하지요.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가 너무 많아요. 나와 타인의 감정이 뒤섞이고 또 뒤섞여서 누가 나이고 누가 타인인지 당최 구분할 수가 없지요. 마왕인 우리에게는 '나'라고 부를 만큼 확고한 무언가가 전무하며――.”

무도회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로 '너'라고 거리낌 없이 부를 만한 무언가도 없어요. 오직 우리라는 이름의 인칭대명사가 유일하게 허락되었지요. 그것이 마왕의 숙명. 마왕 된 자로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업이라고 소녀는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지요. 바로 우리와 똑같은 마왕이 그것이와요.”

그녀가 과장스럽게 팔을 벌려가며 역설했다. 그같은 제스처가 그녀에겐 자연스러웠다. 몸짓이 연설에 무척 익숙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조차 내 것인지 아닌지 노심초사해야만 하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른 마왕 곁에서는, 다른 마왕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마치 평범한 사람이라도 된 양 평범하게 자신을 느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끼리 함께할 때만 비로소 '나'를 느낍니다. 그렇기에 마왕은 소중해요.”

파이몬이 목소리에 박차를 가했다.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고, 싸울지언정 우리는 서로를 인정합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세상에서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니까. 그래요. 안드로말리우스는 마왕 중에서도 쓰레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구도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이자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당연하지요! 우리는 같은 마왕, 똑같은 업을 지고 이 세상에 떨어진 종자 아니겠사와요.”

그녀가 제스처를 거두고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이제 그녀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주위에 보란 듯이 나를 성토하고 있었다.

“헌데 단탈리안은 주저없이 안드로말리우스를 격살했습니다. 소녀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답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마왕의 일원일까? 만일 마왕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쉽게 다른 마왕을 살해할까. 소녀는 단지 한낱 개인으로서 단탈리안을 추궁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왕을 대표하여, 그에게 과연 애시당초 마왕의 자격이 있는지 추궁하고 있사와요.”

약간이나마 숙덕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우리를 지켜보는 가운데, 파이몬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녀는 단탈리안을 삼백 년 동안 영원한 동토(冬土)의 감옥에 가둘 것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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