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화 (38/510)
  • 00038 발푸르기스의 밤  =========================================================================

    다음날 저녁이었다.

    우리가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길에 마차가 계속해서 흔들렸기 때문에 차분히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말이 없기는 라피스도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니블헤임의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 정문에 내리자 노파가 우리를 맞이했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져서 얼굴이 무릎에 닿을 지경인 마녀였다. 머리에 쓴 고깔모자는 어찌나 큰지 매부리코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얼굴 전체를 덮을 정도로 쑤욱 내려왔다.

    그녀가 쥐처럼 끽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전하?”

    “그러하다.”

    “으음, 단탈리안……단탈리안……오, 여기 있군요.”

    마녀가 양피지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맨 꼬라비라서 찾기 쉬웠습니다. 애매하게 32위이니 46위이니 하는 분들보다 전하가 훨씬 더 위치가 좋군요. 자고로 사람은 찾기 쉬운 위치에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히히. 자아, 전하. 이제부터 이 꼬맹이를 따라가시면 되겠습니다.”

    하고 마녀가 가리킨 곳에는 검은 고양이가 서 있었다. 고양이가 우리를 보자마자 두 다리를 쭉 뻗어서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마치 인형놀이의 병정처럼 빨간색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이런 귀여운 생명체를 보았나.

    나는 왠지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들어 고양이에게 마주 경례했다. 그러자 라피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마왕의 위엄을 지키라는 뜻이겠지.

    “꼬맹아, 잘 들어라. 히히.”

    마녀가 고양이의 턱을 장난스레 만졌다.

    “저쪽 골목에 들어가서 오르막길을 내려가고 내리막길을 올라가며 돌고 돌아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다해서 총합 아홉 번을 돌고 돌아 좁다란 길을 넓은 듯 거닐고 널따란 길을 비좁은 듯 빠져나가서 박차를 밟아 박차를 잊고 이윽고 걷는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박차의 박차를 밟아 네 박자로 춤추는 지경에 이른다면 어느새 골목의 끄트머리에 도착할 것이요, 그 끄드머리의 끄트머리까지 이 분을 안내하거라.”

    고양이가 알아들었다면서 다시 경례했다.

    “……저 장대한 헛소리는 뭐냐?”

    “정교한 마법입니다.”

    라피스가 속삭였다.

    “미로를 뚫고 지나갈 수 있게 해주는 주문이군요. 저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빠져나갈 수 없게 길을 꼬아 놓았을 것입니다.”

    “음, 딱히 마법을 쓴 것 같지는 않은데.”

    “마력을 쓰지 않고도 마법을 발현시킬 만큼 대단한 마녀라는 뜻이지요.”

    저 노파가?

    호기심이 생겨났다. 사실 지금까지 강자다운 강자는 한번도 마주친 적 없었다. 라피스 말대로 노파가 대마녀라면 여태껏 만나본 그 누구보다 휘황찬란한 능력치를 보여주리라.

    ‘상태창.’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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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체력] [공격] [방어]

    - 훔바바      65   109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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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죄송합니다. 사기캐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아니, 우리 던전은 무슨 얘 한 명만 처들어와도 싸그리 멸망하겠다. 마법 한방에 골렘이고 뭐고 부대 단위로 썰릴 게 뻔했다.

    이 정도 캐릭터가 마왕들의 회합에서는 단순히 안내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새삼 내가 F급 마왕이고 내 던전은 F급 던전이라는 사실이 시리게 느껴졌다.

    “히히. 부디 요 꼬맹이가 걸어간 길만 뒤따라 가시기를. 혹여라도 행로에서 벗어나시면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습니다.”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다. 그 재미난 일이란 게 무엇인가?”

    “입에서 팔이 돋아나는 정도로 재밌는 일이지요, 히히히.”

    단언컨대 재미라곤 전혀 없다.

    검은 고양이가 호두까기 인형의 병정처럼 척척걸음으로 앞장섰다. 나는 긴장감에 마음을 졸이면서 고양이가 밟은 곳을 정확하게 따라 밟으며 뒤따라갔다. 옆에서 라피스가 한심해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두 팔이에서 세 팔이가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을뿐더러 하물며 입속에서 팔뚝이 솟아나는 것만큼은 결단코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궁전의 화려한 정문, 어두컴컴한 정원, 어딘지 모를 복도, 길목과 길목을 지나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척!

    여기입니다, 라고 말하려는 듯 고양이가 무도회장의 계단 앞에서 경례를 취했다. 너무나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나는 녀석의 턱을 잔뜩 만져주었다. 고양이가 냐옹거리며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뭐냐 이거? 고양이 요괴 인간적으로 너무 귀여운 것 아니냐? 가히 법적으로 위험할 정도로 귀엽다. 법적인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일단 내 마왕성에 감금해두겠다. 내 하찮은 욕망 하나를 채우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전히 세상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야겠다는 거다.

    “단탈리안 님.”

    “윽, 알겠습니다.”

    라피스에게 보채져서 무도회장의 계단을 올랐다. 경비병이나 안내원이 없었다. 이미 열려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대리석 문을 지나자 어디로부턴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서열 제71위, 단탈리안 전하 입장이요오오!

    무도회장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세계에서 영화로나 책으로 접하던 것과 다르게 드넓은 홀은 무척 어두웠다. 중간중간에 사람만큼이나 큼직한 촛불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샛노란 촛불에 사람들의 얼굴이 비추었다.

    그들은 막 입장해서 들어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기이한 장면, 유령들의 회합이라 불릴 법한 모습에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나는 곧바로 연기 스킬을 발동시켰다.

    「연기 스킬이 발동합니다.」

    「지력과 매력 능력치에 따라 보너스 효과가 스킬에 부가됩니다.」

    이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 쇳소리같이 불쾌한 효과음이 귓가를 가득 매운 것이었다.

    「다수의 스킬이 당신의 스킬 발동을 저지합니다!」

    「당신은 주사위를 던졌으나 마침 하늘을 날아가던 까마귀가 주사위를 낚아챘습니다. 스킬 발동 실패!」

    뭐, 뭐라고?

    기계음이 쉴 새 없이 처음 듣는 말을 쏟아냈다.

    「당신은 '압도적인' 능력 차이로 인해 스킬 발동에 실패했습니다.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동 스킬을 발동할 수 없습니다.」

    「패널티에 따라 당신의 지력 능력치가 5 저하합니다.」

    「패널티에 따라 당신의 매력 능력치가 5 저하합니다.」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았다.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라피스가 남몰래 구두로 발을 밟아준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헛, 하고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충 기둥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가 안드로말리우스를 죽인 애 맞지? 영 맹해 보이네.”

    “어떤 정신 나간 마왕이 같은 마왕을 살해했다 싶었는데 의외로 평범한 이로군요.”

    “그러게 언젠가 죽을 줄 알았다니까. 흥, 멍청한 노숙자 녀석.”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 같기도…….”

    나에 대한 험담이 많이 오갔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연기 스킬은 미덥지는 못해도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구석이었다.

    그것이 깨지자 나는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 만일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굳건하고 냉정하게 곁에 서 있어주지 않았다면 무도회 내내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연출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무릎을 지탱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에 대한 관심은 금새 사라졌고, 마왕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소곤소곤거렸다. 그중 나한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  *  *

    내 뒤로 마왕이 서너 명 더 왔다. <던전 어택>을 통해 이름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들이었다. 마지막 마왕이 들어온 것을 끝으로, 커다란 대문이 닫혔다.

    홀 한가운데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새하얀 정복을 말끔하게 입은 노신사였다.

    노신사는 사방을 향해 한 번씩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다음, 느릿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여해주신 모든 마왕 전하를 환영합니다. 과분하게도 이번 회합의 진행을 맡은 쿤쿠스카 상회 일곱 간부 중 한 명, 이바르 로드브로크입니다.”

    매우 작은 갈채가 이어졌다. 대충 여섯 명 정도만 박수를 친 것 같았다. 사회자를 환영하는 것치고는 적이 부끄러운 박수소리였으나, 이바르는 대단히 황공하다는 듯 허리를 다시 한 번 숙였다.

    내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역시 <던전 어택> 중후반에 등장하는 캐릭터였다. 그러나 내가 알던 외모와 너무나 달랐다.

    ‘이바르는 저런 노인네가 아니었을 텐데?’

    같은 쿤쿠스카 상회에서 일하는 라피스한테 사정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쉬이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확실히 나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도 늦지 않겠지.

    “먼저 이번 회합의 의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초열지옥에서 발생한 후계자 다툼에 대해…….”

    “잠깐만.”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난 여기까지 와서 마계의 일에 대해서 왈가불가하고 싶지 않아. 그딴 건 어차피 사흘 내내 이어질 이 썩어빠질 회합에서 자연스레 해결되기 마련이야. 오늘만큼은 먹고 마시고 싶은걸.”

    이바르가 곤란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뭐라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여자의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가 못 배운 년 아니랄까봐 천박하군. 회의에는 절차란 것이 있다.”

    “싸구려 도발은 그만두시지, 나으리. 다른 사람이 들으면 댁이 회합에 무척 열성적인 줄 알겠어? 꺄르르. 저번 회합에서 댁이 중간부터 꾸벅꾸벅 조는 걸 내가 다 지켜봤는데에.”

    “당치도 않은 모함이다.”

    어두운 조명 탓에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입술만이 톡 튀어나와 까만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또 다른 방향, 나와 맞은편 쪽에서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또 두 분께서 싸우려 하시네요. 도대체 우리는 언제쯤 문명인다운, 마왕다운 회의를 이루어낼 것인지 소녀는 의문스럽답니다. 뭣하러 쿤쿠스카 상회의 진조를 일부러 사회자로 고용한 것인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와요.”

    “으게엑, 그 토나오는 말투 좀 그만해.”

    처음으로 말을 한 여자가 질색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하는 문명인의 회의라는 게 위선과 거짓으로 점철된 목소리로 어머나 어머나 해내는 거라면 난 차라리 고블린 부락의 야만인이 되겠어. 네 년이 밤에는 미노타우르스들이랑 질펀하게 놀아대는 것을 내가 모를까봐? 창녀 씨, 아랫입만큼이나 윗입도 싸구려로 바꾸든지 아랫입을 윗입만큼 정숙하게 바꾸든지 둘 중 하나는 해줘.”

    “발정 난 물소처럼 씩씩거리는 여자에게 제가 뭘 말하겠어요. 친애하는 마왕 여러분.”

    정숙한 말투의 여인이 홀 한가운데로 걸어나왔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누구인지도 알아냈는데, <던전 어택>에서 자그마치 서열 제9위를 차지하는 파이몬이었다.

    찰랑거리는 적발이 매력적인 서큐버스 퀸으로서 수많은 플레이어를 물 먹인 장본인이었다. 나 역시 저 마왕한테 걸려서 게임오버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일러스트로만 알던 것을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저 역시 첫날 밤의 무도회부터 지루한 의제를 토론하는 것은 다소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우선 친교를 나누는 것이 먼저겠지요. 지금까지 원한이 쌓인 분들께서는 더더욱 원한을 쌓을 것인지 아니면 풀 것인지 결정하실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녀가 마치 이쪽을, 정확하게 나를 바라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지요. 이중에서 동족을 죽인 살해자가 한 명 끼어 있으니까요. 그 사람과는 친분을 나눌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그녀는 확실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족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안드로말리우스는 우리의 동지였습니다. 세계에 단 일흔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리 마왕의 일원이었어요. 그런 마왕이 죽었다는 것의 의미가 어느 정도 무게를 갖는지, 이곳에 모인 여러분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사와요.”

    그녀의 시선에 따라 수많은 눈초리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회의와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을 추궁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하옵니다. 이를 위하여 서열 제9위의 마왕인 저 파이몬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청문회를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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